
우리 나라처럼 인종차별에 민감한 국가도 드물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인들의 재일동포 차별,미국에서 인종차별을 극복하며 어렵게 성공한 우리 교포들에 대한 이야기는 늘 듣던 바이다. 어디 그뿐인가,개고기에 대한 프랑스 여배우의 발언도,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김동성 선수에 대한 미국 코미디언의 발언도 모두 인종차별의 구호를 유발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국민처럼 남을 차별하면서도 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국민도 또 드물다. 특히 피부색깔에 관련된 인종차별적 인식,발언,글은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TV에서,신문에서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밥먹듯이 쓰고 있다면 '흰 대륙 유럽'도 같이 통용되어야 한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검은 대륙이라는 표현에는 흑인들에 대한 비하와 피부 색깔에 대한 불필요한 강조가 들어있다. 남아프리카에 사는 교포들이 애써 자기는 흑인들과 떨어져서 백인 사회에 동화되어 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역시도 같은 차원의 이야기다.
인종차별을 극복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다는 미국 교포들도 그렇다. 여기서 인종차별이라는 말은 백인에게서 받는 인종차별이라는 뜻이다. 흑인에게서 받는 인종차별은 어떠냐고 하면 아마 의아해 할 것이다. '아니,우리가 아무려면 흑인보다 못해'라는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다. 사실 미국에서 한국인처럼 흑인을 차별하고 피부색에 민감한 인종을 찾아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쓰지 않아야 하는 '검둥이'라는 표현도 교포사회에서 매우 흔히 들어볼 수 있다. 아예 '흑인들이 많이 가는 슈퍼마켓에는 가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흑인이 많은 지역에 사는 한국사람을 거꾸로 다른 한국 교포들이 차별하는,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일도 있다. 백인 남자 친구를 가진 한국계 미국 여학생은 자랑스럽게 부모에게 소개하는 반면,흑인 남자 친구를 가진 한국계 미국 여학생은 부모가 오면 부랴부랴 흔적을 없애려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보았는데 이런 경우는 차라리 애교스러운 편에 속한다.
신문에 자주 보이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면서 '벽안의 미국인','미국인들의 흰 피부색깔' 등과 같은 표현도 인종차별적이다. 왜냐,다인종 국가인 미국을 백인들의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백인들 중 실제로 눈이 파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벽안의 미국인' '벽안의 외국인'은 아직도 한국 언론에 건재하다.
기자들이 또 잘 쓰는 인종차별적인 진부한 표현이 '흑진주' '검은표범' 등이다. 백인 여자가 뭘 잘하면 '디바' '팝스타' 어쩌고 하면서 흑인 여성은 '흑진주'다. 같은 테니스 선수라도 스테피 그라프는 '테니스 스타'고 비너스 윌리암스는 '흑표범'이다. 백인 미녀는 그냥 미녀고 흑인 미녀는 흑인 미녀,흑진주다. 영화배우 덴젤 워싱턴을 두고 '흑인치고는 너무 잘생겼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국제화 시대에 결코 써서는 안 되는 말들이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표현해서는 안 된다. '여자치고는 잘한다','3류 대학을 나왔지만 괜찮다'등의 표현도 우리 사회 안의 차별의식을 잘 나타내는 표현인데, 안타깝게도 흑인 차별은 경우에 따라 여성들이 더 심하다.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하고 선교한다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인종차별적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흑인에 대한 의료 선교 단체 일원이 수술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피부는 검지만 속은 똑같아요'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았는데 이런 표현을 백인들에게도 쓸까?
그럼 우리는 왜 인종차별 국민인가? 간단하다. 백인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며,우리 사회 내에 내재하는 차별 때문이다. 백인보다는 당연히 못하지만 흑인보다 못할 수는 없다는 이상한 자존심(?) 때문에 화장품 선전에서는 언제나 흰 피부를 강조한다. 백색 미녀,이국적인 미모 모두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이런 우물안 개구리 식의,차별과 더불어 열등감에 가득한 세계관 가지고는 우리 나라는 결코 세계 사회의 진정한 일원이 될 수 없다. 이런 후진적 생각의 피해는 바로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받을 것이다. 아프리카와 미국의 흑인이 아니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