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또 하나의 비극

입력 : 2004-07-10 09:00:00 수정 : 2009-01-13 00: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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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기밀문서로 본 '민간인 학살' 진상] '먼저 죽일 뿐이다'

형무소 수감자들이 사살되기 직전 나무 말뚝에 묶여 있는 모습. 이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동유럽 지역 공산국가에서 한국과 미국의 만행이라는 제목하에 널리 배포됐다. 왼쪽 위 작은사진은 총을 쏘기 위해 수감자의 가슴에 과녁을 부착한 모습.

한국전쟁 중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 규명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학살 현장에서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누구냐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그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최종 책임자가 누구인가를 입증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1천명의 증언보다 한 장의 문서를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우리의 현실은 책임자 규명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학살 책임=한국 정부의 지시로 학살행위가 저질렀다는 사실은 이미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는 만큼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명령을 내린 한국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많은 미국 기밀문서 가운데 한국 정부의 학살 책임과 관련해 가장 주목되는 기록은 국제적십자단 프레드 비에리(Fred Bieri)가 1950년 12월 18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로,그 내용은 이렇다.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여성들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국제적십자단은 김준연 법무장관에게 이같은 비인도적 처우에 대해 이유를 물었습니다. 김 장관은 그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던 자'라고 했습니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오로지 죽이는 생각만 한다.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며,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죽이기 전에 먼저 죽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법무장관의 발언 중 '먼저 죽일 뿐'이라는 말은 '예방 학살'을 뜻하는 것으로,학살이 정부에 의해 계획적이며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북한지역에서 전개된 '공산주의자 사냥'과 관련해서도 주목되는 기록이 있다.

50년 11월 16일 미 8군사령부 프란시스 힐(Francis Hill) 대령이 주한 미 대사관 에버릿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에게 보낸 통신문 중 한 부분이다.

'사냥이 일시적으로 모인 군인들의 임의적 행동이라 보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하다. 한국 정부의 명령 계통으로부터 교사 혹은 부추김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공산주의자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은 어땠을까?

1947년부터 48년까지 한국에서 미군 CIC 요원으로 근무했던 케네스 맥더글(Kenneth E. MacDougall)은 이승만을 이 같이 평가했다.

'그는 파시스트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접근방식이 극단적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50년 10월 30일 주한 미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내용에서도 이승만의 공산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을 읽을 수 있다. 이승만이 기자회견 석상에서 한 말이다.

'공산주의자,이전에 공산주의자였던 사람 혹은 그 조직이나 기구는 절대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이승만의 극단적 사고는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사람들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미군 정보보고서는 지적했다. 51년 4월 3일 미군 CIC 활동보고서는 '한국정부가 재판도 없이 사람들을 죽였다. 그들 모두가 파괴분자였던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이승만에 반대한 사람 또한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50년 12월 16일 가톨릭 신부 2명이 이승만의 정치범에 대한 극단적 대응을 막겠다며 직접 찾아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대신 '왜 분개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적을 죽여야 한다. 따라서 학살에 있어 우리는 무죄다'라는 말을 남겼다.

△미국의 책임=미국도 한국 정부의 학살 행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해방 이후 한국군을 재건한 것도 미국이며,무엇보다 전쟁 중 군통수권을 미국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의 학살행위가 문제될 때마다 거리를 두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50년 7월 11일 국무부가 재외 공관에 보낸 공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공문은 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만들어졌다.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잔혹 행위에 대한 수많은 보도가 있었고 앞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까지 우리는 대응하지 않을 것이며,이후 발표가 잔혹행위에 대한 것일 경우 미국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잔혹행위가 보도된다면 전쟁포로에 대한 인도적 처우를 강조한 미국의 입장을 강조하라.'

50년 12월 19일 극동사령부가 국무부에 보낸 통신문에선 학살 사건을 '한국의 내정문제'라고 규정했다.

내정문제로 돌려 발뺌을 시도한 경우는 51년 1월 20일 미 법무연락관이 미 상원 에드워드 마틴(Edward Martin)에 보낸 '한국군에 의한 어린이가 포함된 민간인 처형에 대한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정부의 처형 행위는 주권 국가의 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미 국방부가 이를 감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리고 (학살과 관련해) 미국과 한국 정부 사이에 어떠한 연관도 없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미국은 한국정부의 학살행위가 외부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외신 기자들의 취재 활동까지 제한했다.

50년 11월 13일 미 육군참모부가 일본 극동사령부에 보낸 통신문에는 50년 11월 9일 미국 시카고 트리뷴 지가 보도한 내용이 담겨있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특파원들이 한국 정부에 의한 집단학살을 보도했다. 그 희생자들은 38선 이남 지역에서 인민군 점령기간 중 그들에 협조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이같은 보도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학살이 없어서가 아니라 군이 특파원들의 취재를 제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학살 문제는 미국 정부의 최고 수뇌부에서도 논의된 적이 있다. 그러나 '거론해선 안 될 주제'로 취급됐다.

50년 10월 15일 오전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맥아더는 대통령 국가안보참모 헤리먼(W. Averell Harriman)이 한국전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전쟁범죄는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전쟁범죄에 대해선 건드리지 마라. 문제될 게 없다. 내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다.'

조금 전까지 한국 상황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던 맥아더가 전쟁 범죄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과민한 반응을 보이며 말을 잘랐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회의석상이었고 국방장관,국무부 차관보,무초 주한 미 대사 등이 동석해 있었다. 트루먼도 갑자기 주제를 일본으로 바꿔버렸다.

영국 가디언 지는 50년 12월 미국의 책임 회피에 대해 맹비난을 가했다.

'한국군의 잔학행위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한국군 지휘자가 유엔군(즉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령을 내리면 그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 -끝-

김기진기자 kkj99@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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