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서면에 있던 '노구치(野口) 부대'. 일제강점기에 하야리아 부대 자리에 있던 일본부대의 이름이다.
하야리아 부지의 공원화 추진과정에서 '역사성'이 논의되면서 노구치 부대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햐야리아 미군부대에 가려져 60년 이상 드러나지 않았던, 부산 역사의 숨겨진 일부분이다.
일본의 전후를 대표하는 역사소설가인 시바 료타로의 '가이토오 유쿠'라는 책의 한국편에는 일제강점기 서면에 있었던 노구치 부대가 일부 등장한다. 이 책에는 일제 말기 그가 군인이었을 때 졸병들과 함께 만주 심양에서 출발하는 열차에 탱크 3대를 실어서 부산의 서면으로 이송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부산과 만주는 철도로 하나의 축으로 연결돼 있었고, 일제 말기에는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부산에 군사력을 모으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 2008년 10월 발간된 '김은 왜 재판을 받았나'라는 책에도 노구치 부대가 등장한다. 이 책은 조선인이 왜 'BC급' 전범으로 대거 처벌됐나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태평양전쟁의 'BC급' 전범을 40년 가까이 연구해온 우츠미 아이코 와세다대학 교수로, 지난달 중순 하야리아를 방문했었다.
그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때 포로감시원으로 일하다 'BC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조선인 모두가 이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는 서면의 노구치 부대를 "조선인 포로감시원 군속 출신 BC급 전범 문제의 출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조선인 포로감시원 출신 'BC급' 전범 129명 가운데 14명은 사형선고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머지 115명도 유기징역·무기징역에 처해져 조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부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도쿄 등지에서 감옥을 살았다.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가운데서는 7명이 사형에 처해지고, 나머지 'A급' 전범들이 모두 풀려난 것과 비교할 때 가혹하게 느껴진다.
일제는 1941년 말 이후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자바 등을 잇따라 점령하면서 25만~30만 명의 미국 호주 네덜란드 등의 전쟁포로 관리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의 젊은이 3천16명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등에 포로감시원으로 파견하게 된다.
일본측 자료에 따르면 이들은 1942년 8월 19일과 8월 21일 두 차례에 나뉘어 부산항을 출발, 기타큐슈의 모지 항에서 석탄을 적재한 후 대만 기륭항을 거쳐 베트남, 싱가포르, 자바 섬 등으로 향한다. 수송선 4척에 호위함 1척도 동원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포로 감시와 관련된 국제협정에 대해 배우기는커녕, 구타 등의 가혹한 방법으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힘없는 군속으로 일본의 명령에 따라 포로를 공사에 동원하고 다뤘을 뿐이지만, 연합국 군인들로부터 구타 증언이 잇따르면서 행위의 당사자로 처벌됐다. 당시 미국은 전범재판소에서 조선을 피해국으로 참여시키지 않았으며, 피해국의 국민을 전범으로 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야기가 많이 돌아왔지만, 다행히 '강제동원 역사기념관'이 연내에 부산 유엔평화공원 인근에 착공된다고 한다(본보 20일자 2면 보도). 징용 징병 군대위안부 등 점점 잊혀 가는 일제 핍박의 역사를 일깨워주는 곳으로 잘 가꾸어지기를 기대한다. 또 부산에서 시작된 비극인, 조선인 포로감시원 군속의 운명과 관련된 기록도 잘 전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cho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