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입력 : 2013-06-07 11:04:23 수정 : 2013-06-07 15: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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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생활상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 국회의원 돼야"

한국 야당사(史)를 이끌었던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6일 서울 마포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최근의 근황과 한국 정치사에 대한 견해 등을 밝히고 있다. 박희만 기자 phman@

4·19혁명의 주역, 김영삼(YS)과 김대중(DJ) 한국 현대 정치의 두 거목들과 어깨를 견주며 야당사(史)를 이끌었던 이기택(76) 전 민주당 총재. 정치인에겐 정년이 없다지만, 이 전 총재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곧 희수를 앞둔 그가 현재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단체만 3곳이다. 스스로도 "바빠서 다른 걸 할 짬이 안난다"고 행복한 불만을 털어놓는 그를 휴일인 6일 서울 마포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매서운 눈매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이전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근황은 어떠신지.

"사무실이 서울 여의도와 마포, 서대문 등 3곳에 있다. 해외동포 1.5세대와 2세대에게 우리역사 알리기 운동을 펴고 있는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여의도) 이사장을 맡고 있고, 우파 성향의 전국시민단체연합회(마포) 상임고문이기도 하다. 또 4·19혁명 공로자회 회장을 주변의 강권으로 맡게 돼 서대문 4·19혁명 기념도서관 내 사무실에도 출근한다. 특히 올해 4·19혁명 53주년을 맞아 얼마 전 국민문화제를 진행했는데 일이 굉장히 복잡해 애를 좀 먹었다."

쇄신이다, 전문가다, 하면서
경륜 무시 사람 너무 자주 바꿔
정치권 소통 부재 심화 원인

출범 100여 일 박근혜 정부
남북관계·국제 문제 잘 대처
다만 인재 폭넓게 구해서 써야

"국민들이 열정 갖고 동참하는
국가 사회적 분위기 조성위해
정치인들의 결기 필요한 때"

-그럼에도 건강이 좋아보인다. 비법이 있으시다면.

"일주일에 6일을 3곳의 사무실로 출근해 서류작업을 하거나 서예, 독서 등을 한다. 매일 저녁을 먹고 나면 옷을 갈아입고 마포 사무실에서 한강변까지 1시간가량 걷는다. 그런데 운동은 순간의 건강을 위해 하긴 하지만, 수명은 타고나는 것 같더라. 그래도 술은 폭음하면 안된다."(그는 작고한 신상우 전 KBO 총재, 손태인 전 국회의원 등 지인들을 거명하며 '아까운 사람들이 술 때문에 일찍 갔다'며 수차례 절주를 당부하기도 했다)

-정치권 인사들과도 교류하시는지, 요즘 정치판을 보며 드시는 생각은.

"세대가 바뀌었는데…. 가끔 조언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은 있다. 옛날에는 여야가 낮엔 싸우고, 저녁에는 같이 소주 마시고 그랬다. 그런 것 때문에 '사쿠라 논쟁'도 나오고 했지만, 서로 대화가 통했다. 그렇게 하면 서로 당에 가서 '저쪽 얘기도 들어보니 일리가 있더라'하면서 문제가 풀렸다. 공식적 회의만 있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여야의 리더 그룹들이 그런 소통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정치가 소통이 안되니 여야가 맨날 평행선을 달리지."

-정치권에 소통의 문제가 심화된 근본 원인을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선진국 국회는 그렇지 않은데, 우리는 국회의원 얼굴이 너무 자주 바뀐다. 국회의원 경륜 4년은 공부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꿀만한 하자가 있다면 바꿔야 하지만, 요즘엔 여야 막론하고 멀쩡하게 정치 잘하는 사람도 쇄신이다 뭐다해서 바꾼다.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 전문가 뭐 이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데, 국회의원은 민중의 생활상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배운 사람이 국회의원을 해야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지났는데, 평가를 하신다면.

"박 대통령이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도와달라고 청했는데, 당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미안한 마음이 있다. 지금 잘하고 있다. 특히 외교 분야에서, 남북관계나 국제적인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상당히 냉정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문제도 경제민주화와 국민대통합 등 목표 설정을 잘한 것 같다. 다만 좋은 인재들이 많은데 사람을 폭넓게 구해 썼으면 좋겠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지낸 입장에서 남북관계 해법을 제시한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북한을 움직이는 힘은 중국밖에 없다. 최근 중국이 북한의 핵무장화에 반대하는 기류가 강한데, 그런 걸 잘 활용해야 한다. 특히 정부가 한반도 통일에 대한 비전과 계획을 구체화한 시안을 만들어서 중국을 설득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때는 그런 게 없었다. 한·중 정상회담이 굉장히 중요한 고비가 될 것인데, 만전의 준비를 해야한다."

-현대 정치사를 몸으로 겪으셨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꼽자면.

"옛날에 친한 언론인이 '당신은 만나면 한 일이 그렇게 많은데, 열 가지 해놓고 왜 한 가지만 얘기하나'라고 한 적이 있다. 내가 한국 정치사를 바꾼 사람이지만, 제대로 인정을 다 못받았다. 수많은 사건들이 있지만, 1979년 신민당의 5·30 전당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당시 총재 경선에 나선 KT의 막판 지지로 YS가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이철승을 근소한 차로 제치고 총재에 당선된다) 개인적으로 이철승 씨가 고려대 선배고, 그 양반이 대표할 때 내가 사무총장을 해 인간적으로 도저히 배신할 수 없었지만, 역사의 흐름을 감안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때의 한 수가 결국 부마항쟁을 촉발시켰고,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도화선이 됐다."

-YS, DJ와 때론 힘을 합하기도, 때론 반목하기도 했다. 두 사람에 대한 지금의 생각은.

"YS, DJ가 우리 정치사에서 점하는 가치는 인정해줘야 한다. 1970년대 이후 두 사람이 없었다면 과연 유신체제와 싸울만한 야당이 존재할 수 있었겠나. 나는 없었다고 본다. 두 사람이 앞장 서서 싸워줬기 때문에 우리가 뒤에 다 따라가게 된 것이다. 물론 대통령 먼저 하려고 서로 싸우다 전두환, 노태우 시대 열어준 과는 크지만."

-많은 부침을 경험하셨는데, 정치적 행로를 정한 원칙이 있다면.

"내가 원칙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좋은 기회가 참 많았다. 90년 3당 합당 때도 내 원칙은 야당이 여당 되고, 여당이 야당되는 것은 국민이 만들어주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라는 것이었다.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전두환 측에서 손을 내밀었지만, '쿠데타 세력과 어떻게 손을 잡느냐'고 거절했다. DJ가 정계은퇴 약속을 번복했을 때 그렇게 구애를 했지만, "어떻게 국민과의 약속을 깨느냐"고 매몰차게 거절한 것도 원칙 때문이었다. 그때 DJ의 손을 잡았으면, 노무현 대통령 자리가 내 자리가 됐지 않았을까."

-후배 정치인들에게 꼭 하고 싶은 충언이 있다면.

"대한민국이 총체적 위기에 빠져있다. 요새 창조경제도 그렇고 다 좋은데, 그게 정부 정책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국민들이 열정을 갖고 동참하는 국가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한데, 그 분위기는 정치가 만들어야 한다. 정치인들의 결기가 필요한 시기다."

-이 전 총재에게 부산은 어떤 곳인가요.

"부산은 정치인 이기택을 만들어준 대지다. 서울은 나의 꿈과 이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무대이고, 그렇게 활동하도록 만들어준 곳은 내가 자라고 성장한 부산이다. 요즘도 내가 선거할 때 이유도 없이 지지해주던 부산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번은 유세를 하고 나와 차를 타는데 초등학교 5,6학년쯤 되는 여학생 둘이 어깨동무 하고 와서 '아저씨 우리 커서 유권자되면 꼭 찍을게요. 정치 잘해주세요'하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이기택이 걸어온 길
초선 때 서울 중구 태평로 국회에서 연설하던 이기택 전 총재. 이기택 씨 제공

1937년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 출생

1957년 부산상고 졸업

1961년 고려대 상과대 졸업(경영학 석 사),민주청년회 경남위원장으로 정계 입문

1967년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7대 국회의원 당선, 8·9·10대 국회의원(부산 동래구)

1976년 신민당 사무총장

1979년 신민당 부총재

1980년 신군부 집권, 정치활동 규제로 11대 총선(81년) 불출마

1982년 도미, 펜실베이니아대 객원교수

1985년 정치활동 재개, 12대 총선 당선(부산 해운대구)

1987년 전두환 대통령 4·13 호헌조치에 항의 15일간 단식 투쟁

1990년 YS의 3당 합당 참여 거부, 노무현 김정길 등과 '꼬마 민주당' 창당, 총재에 선출

1992년 DJ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 DJ 대선 패배 뒤 정계은퇴하자 당 대표 선출

1995년 DJ 정계 복귀 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합류 거부

1996년 15대 총선(부산 해운대구) 낙선

1997년 포항 보궐선거 출마 낙선

1997년 민주당,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 공동선대위 의장

1998년 한나라당 부총재

2000년 16대 총선 공천 탈락, 김윤환 김광일 등과 민주국민당 창당, 부산 연제구 출마 낙선

2002년 노무현 후보 지지 선언, 새천년민주당 중앙선대위 상임고문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지지 철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지지

2008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2011년~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 이사장,

4·19 혁명 공로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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