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BIFF, 뜨거웠던 순간들] 19. 또 다른 전쟁 '프린트 반입'

입력 : 2015-05-07 20:04:44 수정 : 2015-05-08 16: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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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더 긴박한 프린트 입수하기

1998년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치러질 당시의 프린트 보관 창고의 모습.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제는 특성상 시간과의 싸움이 많은 편이다. 특히 프린트 반입과 반출이 그러하다. 매년 영화제가 임박하면 프린트 담당 부서는 피를 말리는 '시간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프린트 원활한 수급 위해
매번 '시간과의 전쟁' 치러

이란 영화 '고향의 노래'
통관 불허돼 미국에 억류
상영 직전 가까스로 받아

8회 땐 故 안상영 시장 방북
북한 영화 7편 프린트 입수
특별전 마련해 상영 성공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부산영화제 앞뒤로 열리는 영화제와의 관계 때문이다. 특히 산세바스찬, 뉴욕, 토론토, 밴쿠버영화제 등 직전에 열리는 영화제와 로마, 도쿄영화제 등 직후에 열리는 영화제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부산영화제 초청작 중 직전에 열리는 영화제에서도 상영될 경우 프린트는 이들 영화제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리고 상영이 끝나면 다음 영화제에 신속하게 프린트를 보내줘야 한다. 때문에 이들 영화제의 프린트 담당자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때로는 연락이 원활하지 못해서 애를 태우기도 한다. 기술팀에서는 프린트를 빨리 받아서 상태를 점검해야 하는데, 상영 직전에 겨우 프린트가 도착하면 밤을 새울 수밖에 없다.

사전 점검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가끔 프린트가 손상되어 반입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손상 부위의 사진을 찍어 제작사나 배급사에 통보를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배상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필름이 거꾸로 감겨서 들어오거나 영어 자막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영화제는 프린트가 들어오기 전에 미리 대본을 받아서 번역해 놓는데, 최종본이 이와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급하게 자막을 수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프린트 담당 부서와 기술팀, 자막팀은 영화제가 끝나는 순간까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일을 한다.

상영 포맷의 급격한 변화도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초창기에는 35㎜, 16㎜ 프린트만 있었으나 이후 디지털시대가 도래하면서 HDCAM, (Digital)BETA, MiniDV, HDV 등 포맷이 다양해졌다. 이에 따라 영사기도 상영 포맷에 따라 구비해야 했다. 현재는 DCP로 규격화 되어 가고 있지만, 고전영화의 경우에는 여전히 35㎜ 프린트로 상영한다.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영화관에서 35㎜ 영사기가 사라졌고, 영화의전당에서만 35㎜ 상영이 가능하다.

영화제 초창기에는 상영 도중에 35㎜ 프린트가 손상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는 프린트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가끔 영사실에서 실수를 하기도 했다. 1997년 구마이 게이 감독의 '사랑하기'는 영사기사가 릴을 바꾸기 위해 필름의 가장자리에 찍어야 할 구멍을 필름의 가운뎃자리에 찍어버린 것. 영화제가 끝난 뒤, 김동호 위원장과 나는 일본으로 날아가 감독에게 사과해야 했다. 다행히 감독은 이해한다며 아름다운 술자리(?)로 마무리했다.

2002년에는 이란 영화 '고향의 노래' 때문에 애를 태우기도 했다. 바흐만 고바디가 연출한 이 작품은 남미의 영화제에서 상영을 마친 뒤 우리 영화제로 프린트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예정 날짜가 지나도 도착하지 않아 수소문을 한 결과 경유지인 미국의 마이애미 공항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유가 어이없었다. '고향의 노래'의 영문 제목은 'A Marooned in Iraq'. 송장에 이라크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통관이 불허된 것이다. 우리는 당시 운송을 맡았던 운송회사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는 공문을 보내어, 상영 직전에 겨우 프린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극적인 프린트 반입은 2003년에 일어났다. 부산영화제는 오랫동안 북한 영화계와의 교류를 추진해 왔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고, 2003년 제8회 영화제에서 딱 한 번 '북한영화특별전'을 개최한 바 있다.

1999년과 2000년에 북한영화 초청을 시도한 바 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중, 2003년에 안상영 당시 부산시장이 경제교류 협의를 위해 북한을 방문하면서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때 프린트를 점검하고 있는 영사 기사.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8월 28일 방북을 앞두고 부산영화제는 안 시장에게 북한 영화 초청에 관한 도움을 부탁했고, 안 시장의 제안에 북한 측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면서 상황은 급진전되었다.

사전 실무협의를 거친 끝에 9월 27일, 당시 배영길 부산시 행정관리국장과 이용관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이효인 한국영상자료원장이 금강산을 방문하여 북한 영화인들과 만남을 가졌다.

당시 북한 측에서는 북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와 조선영화수출입사 관계자들이 나왔다. 그리고 사전 협의에서 논의되었던 7편의 북한 영화 프린트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조건은 한국영상자료원이 비상업적 목적의 상영이 가능한 아카이브 판권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구매비용은 총 10만 달러였다.

하지만 영화제 개막일은 10월 2일. 나머지 준비 작업을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단 전달받은 프린트는 한국영상자료원으로 가지고 가서 텔레시네로 전환한 다음 비디오를 만들어 통일부에 심의를 신청했다.

당시 신청했던 작품 7편은 이념이나 정치색이 전혀 없는 작품들로, 194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북한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내 고향'(1949년, 강흥식 감독), '신혼부부'(1955년, 윤룡구 감독), '우리 렬차 판매원' (1973년, 고학림 감독),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1985년, 윤기찬 감독), '봄날의 눈석이'(1985년, 림창범, 고학림 감독), '대동강에서 만난 사람들 1, 2편'(1993년, 김길인 감독)이었다.

통일부에서 나온 심의 결과는 2편에 대해 제한 상영('내 고향' '봄날의 눈석이'), 나머지 5편에 대해서는 일반 상영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영화제는 통일부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0월 7일부터 사흘간 대영시네마에서 상영에 들어갔다. 제한 상영작의 경우는 게스트만을 대상으로 상영이 가능했다. 하지만 관객의 반응은 미지근한 편이었다. 이유는 북한영화특별전의 일정이 너무 늦게 결정되는 바람에 홍보가 부족해서다. 시민들의 관심이 여타 상영작에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북한영화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던 것. 이 7편의 프린트는 지금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관 중이다.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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