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대륙을 가다]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입력 : 2018-12-19 19:05:41 수정 : 2018-12-19 22:28:47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핀 델 문도' 세상의 끝에 서다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의 비글해협 투어에서 만난 '지구 마지막 등대' 모습.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에서 아휘(장국영)의 슬픔을 묻은 곳이다.

여행 28일째. 오늘은 아침 일찍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버스를 타고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Ushuaia)로 떠난다. 국경 통과는 매우 간략해 관능검사만으로 통관이 이뤄졌다. 대국(아르헨티나)의 여유라고나 할까. 아르헨티나 리오그란데에 도착한 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우수아이아로 향했다. 출발한 지 12시간 만인 오후 8시 45분 '세상의 땅끝'에 도착했다.

240여 ㎞ 비글해협 투어
마젤란 펭귄 사는 펭귄섬과
영화 해피투게더에 나온
세상 끝 '빨간 등대' 만나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지구 마지막 우체통'서
바닷가 걸어가는 트레킹
폭포·숲·설산 풍경 만끽

'불의 땅' 티에라 델 푸에고

우수아이아 도심 광장에 가면 'Ushuaia fin del mundo'라고 쓰인 입간판을 만날 수 있다.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란 뜻이다. 많은 여행자의 인증샷 장소이기도 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250㎞, 남극에서 1000㎞ 떨어진 우수아아이는 길이 닿는 가장 남쪽이자 남극에서 가장 가까운 최남단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남극대륙으로 가는 관문 도시로 항구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화물선, 크루즈선, 군함들이 빼곡하게 정박해 있다. 지금은 겨울을 막 지나 봄에 접어든 계절이라 아직 남극행 배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우수아이아를 품고 있는 이 섬의 이름은 티에라 델 푸에고, 즉 '불의 땅'이다. 1520년 대서양 쪽에 남하했던 마젤란은 벼랑 위에서 몇 개의 불을 발견했다. 이 불은 이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횃불이었다. 바람이 강한 불모의 땅에서 불이 타고 있는 것을 기이하게 여긴 마젤란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사실은 불보다 얼음에 가까운 땅이다. 1년 내내 여름다운 여름은 없고 겨울은 지독하게 추운 곳이므로.

안타깝게도 이제 이곳에서 원주민들을 볼 수 없다. 침략자들에게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수천 년간 이 땅의 주인이었던 야간족, 테우엘족, 오너족 등 원주민들은 백인의 총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 처절했던 현장은 온데간데없고, 원주민들의 삶과 역사는 박물관에 박제돼 있을 뿐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를 본 터였다. 동성애자 아휘(장국영)와 보영(양조위). 사랑하면서도 끝내 서로의 중심에 가닿지 못하는 비련을 그린 영화, 해피 투게더. 땅끝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련함과 아휘의 슬픔이 겹쳐 우수아이아는 왠지 '우수' 어린 도시로 인식됐다. 여행자들도 이곳에서 삶의 환희보다 비애를 발견하는 데 주력하는지 모른다. 아휘의 슬픔을 묻은 빨간 등대가 빨리 보고 싶었다.

세상의 슬픔을 묻는 마지막 등대
비글해협 투어 중인 선박과 물개들.
다음 날 우리는 비글해협 투어에 나섰다. 너비 5~13㎞. 길이 240여 ㎞의 비글해협은 영국의 찰스 다윈이 타고 온 탐사선 비글호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해협의 북동부는 아르헨티나령이고, 서부와 해협 남쪽의 나바리노·오스테를 비롯한 작은 섬들은 칠레에 속한다. 비글해협 투어는 배를 타고 해협을 둘러보며 바다사자와 가마우지 등 다양한 생물들을 관찰하고 등대섬과 펭귄섬을 돌아오는 5시간가량의 관광 상품이다.

배의 갑판 위에 서니 남위 54도의 찬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배 위에서 둘러보면 눈을 뒤집어쓴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20여 분이 지날 무렵 바위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추위에 아랑곳없이 바닷새들이 빼곡하게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어 나타난 바위섬에는 수십 마리의 물개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한참 더 나아가면 지구 최남단 등대가 보인다. '해피 투게더'의 아휘가 슬픔을 묻은 바로 그 빨간 등대이다. 배는 10여 분이나 이곳에 머물며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을 여유를 준다. 나도 등대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으며 내 안에 오래 기생해 온 슬픔과 우울을 바닷속에 수장한다. 이때 남극에서 불어온 짠 바람이 눈가의 이슬을 슬쩍 훔쳐 달아난다.

두어 시간 가면 펭귄섬이 나온다. 3500여 쌍의 마젤란 펭귄, 20여 쌍의 젠투펭귄 등이 서식하는 곳이다. 펭귄을 가까이서 볼 방법은 섬에 내리는 것이지만 사전에 예약을 못 한 우리는 배 위에서 펭귄이 노는 모습을 관찰한다. 날지도 못하면서 다리까지 짧게 태어난 펭귄의 아장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의 한계와 업보를 생각해 본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내의 기이한 나무 모양.
다음 날 우리는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트레킹에 나섰다. 국립공원 트레킹은 3~5시간이 걸린다. 우수아이아 시내에서 공원으로 가는 투어버스가 있다. 
비글해협 너머 설산이 보인다.
트레킹은 '지구의 마지막 우체통'에서 시작한다. 비글해협을 따라 바닷가 산책로를 걸어가는, 대체로 완만한 코스이다. 해협 너머는 칠레령이다. 폭포와 숲, 토탄 늪과 호수, 해안과 빙하, 설산을 두루 품고 있는 길이다. 바람은 잠시도 그치지 않고 불어온다. 차갑지만 상쾌하다. 하늘은 티없이 맑고 바다는 쪽빛으로 출렁이며 호수는 평화롭다. 봄인데도 도무지 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황량한 불의 땅. 유일하게 보이는 꽃은 노란 민들레다. 민들레의 강한 생명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마지막 우체통'

얼음의 땅에 꽃을 피운 여자
'지구의 땅끝' 우수아이아를 찾는 한국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르는 집이 있다. Le Martial 796번지 '다빈이네 민박집'이다. 다빈이는 60대 초반의 임영선 씨 아들 문다빈 씨의 이름이다. 우리 일행도 다빈이네서 3박을 했다. 임 씨가 직접 마련해 준 씽씽한 킹크랩으로 푸짐한 만찬도 즐겼다. 도타운 교포의 정은 덤이다.

임 씨는 꽃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채널A에 '서민갑부'로도 소개된 적이 있다. 사시사철 꽃이 피지 않는 '얼음 도시'에 수백 종류의 꽃을 재배해 공급함으로써 부자가 된 여자. 하지만 임 씨의 삶은 꽃길과는 거리가 멀다. 외려 신산하고 힘겨웠다.
다빈이네 민박집
임 씨는 처녀 때 친척 언니의 초청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놀러 갔다. 우수아이아에 놀러 가자는 언니 친구의 꼬드김에 따라갔다가 그 언니의 오빠와 결혼하면서 우수아이아에 눌러앉게 됐다. 시아버지인 고 문명근 씨는 남미 이민 1세대로, 현지인과 일본인이 실패한 채소 농사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문 씨는 우수아이아에 처음으로 비닐하우스 농법을 도입해 성공을 거뒀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들 병경 씨가 아내 임 씨와 농사일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통업의 발달로 싼 채소가 밀려들면서 채소 농사는 경쟁력을 잃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경 씨마저 급환으로 세상을 떴다.

혼자 남은 임 씨는 독학으로 화훼 공부를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신발을 파는 것처럼 무모해 보였던 화훼 재배는 20년 만에 대성공을 거뒀다. 아들 다빈 씨도 전도양양한 의과대학을 그만두고 우수아이아로 와 어머니를 돕고 있다. 이제 우수아이아 택시기사들에게 임 씨의 농장 '비베로 로스 꼬레아노'로 가자고 하면 모를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다빈이네는 1층은 게스트하우스로 꾸며져 있고 가족들은 2층에서 생활하고 있다. 임 씨는 한국 여행자들에게 다정한 안내자 역할도 하고 있다. 꼭 자신의 집이 아니라도 근처 숙소를 안내해주고 여행상품을 최대한 값싸게 구입해 준다. 좋은 조건으로 환전을 도와주기도 한다. 이국 멀리까지 와서 성공을 거두기까지의 힘겨웠을 이력이 얼굴에 보여 가슴이 아리기도 하지만 그녀의 굳건한 생활력은 우수아이아의 등대처럼, 지치고 의기소침해진 영혼에 큰 위안이 된다.

"내내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우리는 임 씨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시내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우수아이아 국제공항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수아이아(아르헨티나)/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