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반도에는 평화의 바람이 불었다. 한 해 동안 모두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한반도에 평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전 세계가 기뻐했다. 해를 넘긴 지금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지난해 우리는 과연 평화로웠는가. 대답은 불행히도 ‘아니다’다.
지난해 한국 사회는 수많은 ‘내전(內戰)’을 치렀다.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남녀 성 대결, 젊은이와 노인 간 극단적인 충돌, 난민과 다문화 가정을 향한 거친 시선, 성 소수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 돌이켜보면 ‘혐오’라는 이름의 총성이 멎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급기야 지난 연말에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극단적 대립이나 혐오 표출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포용과 자제를 주문했다. 그럼에도 날 선 혐오는 당최 무디어질 기색이 없어 보인다.
성 대결, 성소수자 경멸
젊은이와 노인의 충돌…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혐오’
이젠 화해의 방법 찾을 때
다양한 이해 관계가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해의 충돌과 대립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능은 이해의 충돌·대립을 조율하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인터넷에 넘쳐나는 실체 없는 편견에서 비롯된 현재의 혐오 앞에선 이러한 조율 기능마저 무력해진다.
“동남아시아 출신들은 게으르다.” “여자는 운전을 못한다.” 실체도 없는 편견을 자양분으로 혐오는 자란다. 그리고 그 혐오는 아주 우연히 정당성을 얻는다.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폭행사고 중 어느 한 건의 가해자가 동남아시아 이주민일 때, 수많은 교통사고 중 한 건의 가해자가 여성일 때, 혐오는 말한다. “그럴 줄 알았다.”
정당성을 얻은 혐오는 상대를 베고, 상처를 입은 상대의 혐오는 다시 나를 벤다. 서로의 상처는 혐오를 더욱 단단하게 한다. 그렇게 혐오는 악순환을 거듭하며 확대재생산된다.
새해가 밝았다. 이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때다. 이에 본보는 ‘한국 사회의 혐오에 대한 종전(終戰)을 선언하자’고 제언한다. 이를 위해 7회에 걸쳐 시리즈 ‘혐오를 끊자’를 게재한다. 시리즈를 통해 한국 사회 곳곳에 만연한 혐오의 깊이를 각각의 갈등 주체별로 나눠 재어 보고, 그 원인을 살펴 화해의 방법을 모색한다. 또 사회 각계 다양한 이들의 기고를 더해 2019년 새해 다짐으로 ‘혐오 금지’를 함께 선언한다.
2019년, 당신은 혹시 지금 누군가에게 ‘혐오’의 총구를 들이대고 있지는 않은가? 당장의 삶이 지난하다고 그 원인을 애먼 누군가에게 덧씌워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타인의 삶을 비웃고 있지 않은가? 혐오, 이제는 멈출 때다.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