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日교수 “일제강점기 판결문, 유네스코 등록이 목표”

입력 : 2019-02-28 19:53:52 수정 : 2019-02-28 22: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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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가와 노리가쓰 메이지대 법학부 명예교수. 정종회 기자 jjh@ 사사가와 노리가쓰 메이지대 법학부 명예교수. 정종회 기자 jjh@

“일제강점기 판결문은 당시 일본의 억압과 폭력을 드러내는 객관적인 자료입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일본 정부도 사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28일 오전 11시께 부산 수영구 민락동 호도스신학원. 3·1절 100주년을 맞아 강의를 위해 부산을 찾은 사사가와 노리가쓰(78)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 명예교수가 책상에 쌓인 판결문을 만지며 말했다. 그는 1900년대 초부터 1945년까지 한국인에 대한 판결문을 연구하는 데 헌신하는 중이다. 지난 22일 서울에서 관련 내용이 조금 담긴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 논문집’ 출판 간담회를 가진 뒤 한국에 머물고 있다.

사사가와 메이지대 명예교수

“한국인 대한 차별·통제 묻어나

日학내 비판 있지만 진리 추구”

세계학술대회서 日 강점 비판도

“판결문에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통제가 묻어있는데 존재조차 알고 있는 이들이 드뭅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에 굴종하지 않고 저항했습니다.”

사사가와 교수는 당시 한국인이 처벌을 받게 된 상황을 재연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후 그가 보여준 판결문을 보니 1942년 나상풍 씨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처해졌다. 2차 세계대전 승리 기도 현장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는 이유에서다. 같은 해 진택수 씨는 여관 화장실에서 ‘천황의 이름으로!’를 외치며 소변을 털다가 재판을 받았다. 앞서 1930년 조희수 씨는 일본 공사장 감독에게 도끼를 맞아 귀가 날아갔지만, 가해자는 무죄인 반면 자신은 재판을 받았다.

“30년 전 일본에서 우연히 판결문 하나를 보면서 관련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부산과 서울을 찾아 보관된 마이크로필름을 분석했죠. 2008년까지 3500건을 연구했는데 최근 공개된 판결문도 분석 중입니다.”

1989년부터 관련 연구를 시작한 사사가와 교수는 2016년 국가보훈처에서 공개한 6608건의 판결문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3억 원가량의 연구비를 일본 정부에 신청했지만, 학문성이 없다며 거절당한 상황이다. 또 국가보훈처가 마이크로필름에 담겨있지 않은 1000여 개 판결문은 공개하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판결문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고, 한국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본을 내는 게 남은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동안 일본 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학문에는 진리만 있을 뿐입니다.”

사사가와 교수는 2001년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세계학술대회에서 일본의 한국 강점은 국제법상 불법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다. 이우영 기자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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