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인 김대중 정부부터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와 현 문재인 정부까지 대선 공약과 국정과제로 대두되었던 자치경찰제 도입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실마리는 권력과 경찰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자행해왔던 뼈아픈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베이비 부머 세대인 50대 이상은 경찰이 두려움과 무서움의 존재라는 경험적 트라우마를 겪어 보았을 것이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권력의 시녀였던 경찰을 피해 도망 다녔던 경험이 있는 대학생·노동자·시민은 지금도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면 혹시 경찰의 미행이 없는지 한 번쯤 두리번거리는 행동을 습관처럼 할지도 모른다.
‘권력의 지팡이’였던 과거 경찰
비대한 중앙권력이 만든 병폐
도입 추진 중인 자치경찰제
‘주민 위한 경찰’로 거듭날 기회
자치분권은 미래 위한 최고 가치
입법·시범실시 조속히 이뤄져야
순경의 전신이었던 일제 강점기의 순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정래 작가는 장편소설 〈아리랑〉 4권에서 순사로 인해 살벌했던 시절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이들은 벌써 오래전부터 일본 순사들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호랑이는 할머니 이야기 속에서만 사람을 잡아먹을 뿐이었지만 순사들은 바로 눈앞에서 아무나 죽이고 두들겨 패고 잡아가고 했던 것이다… 그전에는 ‘호랭이 온다, 호랭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순사 온다, 순사! 순사가 니 잡으로 온다’로 바뀌었던 것이다.”
순사는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권력의 지팡이’의 대명사였다. 8·15 광복 이후 순사는 경찰로 탈바꿈하여 무고한 학생·노동자·시민을 억압하고 감금·폭행을 일삼는 중앙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경찰의 불명예스러운 과오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권력이 만든 병폐 중 하나이다. 중앙권력이 비대해지고 집중되면 권력 유지를 위해 경찰을 남용하는 유혹을 떨칠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와 군부독재 시절의 순사와 경찰이 그랬다. 이제 20년 전의 경찰로 다시 돌아갈 이유가 없다. 중앙권력을 지방으로 분산시키고, 지역 주민에게 다가서는 자치경찰로 거듭날 기회가 ‘순사’에게 주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연방제 수준의 자치분권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자치경찰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에 서울·제주·세종 등 5개 광역지방정부에서 자치경찰제를 시범 실시하고, 2021년에 이를 단계적으로 확대하여 2022년에는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자치경찰제를 실시하고 있는 광역지방정부는 제주특별자치도가 유일하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참여정부인 2006년에 자치경찰제를 시범적으로 실시하여 현재까지 생활안전·교통·관광 등을 위한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다. 제주도에 가면 흔히 마주치는 말 탄 경찰이 바로 자치경찰 소속 기마대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13년 동안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시행해 왔던 자치경찰의 성과와 과제를 분석·보완하여 자치경찰제를 2022년까지 전국에 단계적으로 확대 시행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올 2월 당·정·청은 자치경찰제 도입 방안을 발표했다. 당·정·청의 방안을 바탕으로 민주당 홍익표 의원은 자치경찰제 도입을 위한 경찰법·경찰공무원법 전부개정안을 3월에 발의했다. 개정안에서 자치경찰의 사무 범위는 생활안전·교통안전·공공시설과 행사장 경비 등 주민 생활과 밀접한 치안 서비스로 규정되어 있으며, 자치경찰의 수사권은 성·가정·학교폭력 수사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 등의 범죄 수사로 한정되어 있다. 그 밖에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상호 협력, 자치경찰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지사 소속 합의제 행정기관인 시·도경찰위원회 등을 두도록 했다.
당·정·청의 예정대로라면 자치경찰 5개 시범 실시 지역은 5월에 선정되어야 했었다. 하지만 국회에서 개정안의 심사가 지연되고, 자치경찰제 도입에 대한 여·야와 검·경의 입장 차이에 따라 시범 실시 공모 일정조차도 확정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계속 지연되다 보면 지난 20년 동안 시행하지 못했던 자치경찰제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에서 외쳐졌던 ‘이게 나라냐’에 응답하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출범한 정부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자치분권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갈수록 덩치가 커져가는 수도권의 ‘초집중세력화’를 방지하고 중앙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자치분권국가만이 미래의 대한민국을 지속가능하게 발전시킬 최고의 가치다. 선진국만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조차도 자치분권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중앙권력과 중앙집권체제를 분산시키고 있다. 이제 자치분권국가는 전 지구적 패러다임이다. 그것의 시작 중에 하나가 자치경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순사 온다, 순사!’가 ‘자치경찰 오세요, 오세요!’로 속히 바뀌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