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도 저는 있었어요. 진상품으로 나라님의 수라상에 올라 붉은 속살을 그대로 드러냈을 때, 바로 그 순간을 기억해요.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에도 ‘담채’라는 이름으로 반짝 출연합니다. 삶거나 말린 상태로 왕실의 사옹방에 들어가 전복이나 토하젓과 같은 동배들과 같이 낙점되기만을 기다렸지요.
저는 고향인 동해안에서 ‘섭’으로 태어났어요. 아직도 강원도에서는 저를 섭으로 부른답니다. 제 이름과 운명이 바뀐 건 한참 뒤의 일입니다. 일제강점기 개항과 6·25를 거치면서 이양선과 함께 이복형제들이 하나둘씩 나타났죠.
서민 음식으로 오래전부터 인기
유럽에서도 여러 요리에 활용돼
뉴질랜드에선 수산물 수출 핵심
최근엔 생체 접착제 원료로 부각
전 세계 의료용 시장 규모 급성장
한국도 해양바이오 투자 늘려야
처음에는 ‘진주담치’라는 이름으로 밀입국하더니, 이제는 ‘그린 셸’이라는 모양새 나는 브랜드를 달고 유명 레스토랑 테이블에 올라갑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참 홍합’이 되어 뒷방지기로 밀려났지요. 우리 바닷가를 무혈점령한 진주담치는 ‘지중해 홍합’이라는 본명도 되찾았어요. 많은 연구를 한 선생님들의 끈질긴 추적 덕분입니다. 홍합에 얽힌 불행한 역사를 알 길 없는 소비자들은 야속하게도 홍합은 다 같은 홍합이라고 믿을 뿐이지요. 집안 비밀을 하나만 더 알려드릴까요? 속이 붉은 게 암컷이고, 수컷은 허연색입니다. 맛은요? 붉은 게 더 맛이 좋다는 사람도 있으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게 정설입니다.
홍합 요리는 본래 서민 음식입니다. ‘가난한 자의 굴’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이지요. 요리법도 제법 간단합니다. 간기가 배어 있어 간도 적당하고, 몸 안에 소스를 품고 있어 조미료를 따로 하지 않아도 맛이 일품이지요. 마늘 한 쪽에 대파를 숭숭 썰어 넣고, 한소끔 후루룩 끓이면 개운한 홍합탕이 됩니다. 이렇게 된 저는 어느 술꾼의 해장국으로, 포장마차의 안줏거리로 올려졌지요. 포장마차 같은 주점에서 공짜 안주로 내놓던 그 맛을 기억하나요? 저의 타고난 맛이 그거예요.
이국땅에서는 탕보다는 찜으로 애용됩니다. 물기는 없고, 짭짜름한 맛이 나는 그 홍합찜은 태생이 벨기에 음식입니다. 프렌치프라이와 곁들여 먹는 거죠. 그것을 프랑스에서 발 빠르게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으로 대중화했습니다. 이탈리아에 들어가면 ‘코제’라는 이름의 홍합찜으로 변신합니다.
스페인과 터키에선 요리법이 조금 달라요. 쌀을 넣거든요. 스페인 해산물 요리 ‘파에야’에서 저의 역할은 실로 막중해요. 음식을 풍성하게 만들잖아요! 홍합 없는 파에야는 상상이 되지 않죠? 터키 이스탄불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길거리 음식 ‘미디에 돌마쓰’는 어떻던가요? 껍질을 밥으로 채우고 그 위에 홍합을 하나씩 얹어 먹는 요리. 하나에 250원가량 하는데, 어떤 사람은 무려 10개 이상을 먹더라고요.
제 몸값을 제대로 올린 곳은 뉴질랜드예요. 저를 체계적으로 양식하고, 글로벌 일등 상품으로 만든 나라니까요. 홍합양식협회까지 만들어 청정 해역인 남섬 말버러 해역에서 주로 생산합니다. 1960년대부터 관절염 등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대량 양식을 시작했죠. 그때부터 초록 홍합을 뜻하는 그린 셸이라는 브랜드를 붙여 글로벌 프리미엄 상품으로 띄우기 시작합니다. 최근에는 홍합 양식장을 지속적으로 복원하면서 생산성도 높이고, 스마트화하는 작업도 곁들이고 있어요. 이런 노력 덕분에 저는 뉴질랜드 수산물 수출의 일등 공신으로 떠올랐어요.
뉴질랜드가 홍합 수출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는 2016년 중국 알리바바와 맺은 마케팅 협약에서도 잘 드러나요. 건강에 민감한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알리바바 티몰에 입점하는 한편, 주문한 홍합을 72시간 이내에 중국 전역으로 공수하는 시스템까지 갖췄어요. 뉴질랜드는 현재 20개국 이상에 저를 수출하는데,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곳이 중국이에요. 그만큼 시장과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죠.
얼마 전 대한민국에서도 제 진가를 알아주는 진정한 고수를 만났어요. 포항공대 차형준 교수인데요. 저는 본래 갯바위 등에 붙어살아요. 끈끈하게 잘 붙지요. 섬유질로 된 족사(足絲)를 갖고 있기 때문인데요, 차 교수는 이 족사를 이용해 생체 접착제를 만드는 특허를 냈어요. 물론 족사를 그대로 쓰는 게 아니라 인체공학적으로 배양한 다음 의약품으로 활용하는 겁니다. 네이처글루텍이라는 회사도 세우고, 30억 원이 넘는 투자도 받았어요.
2019년 기준 전 세계의 의료용 생체 접착제 시장 규모는 2조 7000억 원입니다. 이 시장을 주도한다는 게 네이처글루텍의 목표입니다. 현재 해양바이오 시장은 선진국이 거의 독점하고 있어요.
최근엔 대한민국의 해양수산부도 해양바이오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고 하네요. 잠재 가치가 큰 바이오 시장을 키운다는 전략이죠. 아셨죠? 이제 홍합을 값싼 술안주로만 기억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