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대학입시의 추억과 교훈

입력 : 2020-12-01 18: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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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그날도 어김없이 추웠다. 무슨 징크스처럼 바로 전날까지 따뜻하다가도 당일이면 늘 그렇게 추웠다. 영어가 포함된 셋째 시간, 여느 때처럼 차분히 문제를 풀고 답안지에 답을 옮기는 중이었는데, 번번이 답을 잘못 옮기는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마지막 10분을 남기고 무려 여섯 번이나 답안지를 새로 작성한 끝에 여전히 몇 개의 답을 잘못 옮겨 적은 채 시험은 끝났다.

나도 모르게 얼굴은 눈물, 콧물, 땀 범벅이었다. 받아들여질 리 만무한데도 무작정 감독 선생님을 따라가며 애원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몇 점의 차이가 나고, 지원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울며불며 감독 선생님을 졸랐다. 결국 아무 소용 없이 나머지 시험은 반쯤 정신 없이 끝냈다.


한 번의 평가로 평생이 결정되는 현실

극단적인 성과주의 따른 근원적 문제

진정한 배움으로 내실 있는 성장 필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시엔 대입학력고사 점수를 갖고 원하는 대학교의 학과에 지원하고 논술고사를 한 차례 더 치러야 했다.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던 시험 성적을 갖고도 소신껏 지원했던 내게 논술고사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너무나 평범해서 상당히 광범위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던 논술 제목 ‘꿈과 일터’를 아직도 기억한다.

제한된 시간과 지면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것인지를 두고 이리저리 끄적이기만 하다가 “30분 남았으니 잘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감독 선생님의 말을 들을 때까지 난 한 글자도 제대로 적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얘지면서 스스로 생각에 거의 0점에 가까운 답안을 제출했다. 낙방할 것이라는 생각이 무섭게 엄습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나는 불합격을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담담하게 텅 빈 마음으로 적어 내려간 글은 오히려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모양이다. 아직도 하늘이 노래지던 그날의 당혹감은 여전하다.

흔히 똑똑하다는 것이 이해와 계산이 빠르다는 말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영재교육 프로그램 등 학생들과의 경험에서 보면 빠른 생각과 오만한 확신은 독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난 ‘천재’를 믿지 않지만, 굳이 ‘천재’를 말하자면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주위의 무관심에 개의치 않고 집요함으로 계발하는 사람이다. 결코 빠르게 성과를 양산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AI가 개발되고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돼 온 세상이 숨 가쁘게 돌아간다고 해도 지옥과 천국을 감수해야 하는 고통과 이에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은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김없이 찾아온 대학입시. 대학입시를 치러 본 이에게는 세대를 망라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학력고사를 치렀지만 나의 몇 년 위까지는 예비고사를 치렀고, 지금은 수학능력시험(수능)으로 바뀌었다. 수능이 1994년도부터 치러졌으니 예비고사 13년 (1969-1981), 학력고사 12년 (1982-1993)보다 훨씬 오래 된 대학입시 제도 셈이다.

학령인구가 급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입시에 또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등교육 6년의 결과인 대학입시로 거의 평생이 결정돼 버리는 현실은 확실히 지옥임이 분명하다. 밝은 표정으로 사춘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자연과 사회를 호기심과 열정으로 배우며 알아 가야 할 나이에, 점수를 내는 요령과 세상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를 먼저 배워야 하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 정작 요령에만 밝은 우리 아이들은 공부의 진득한 재미보다는 빠른 성과에만 길들여지고 있다. 생각하는 즐거움이나 새롭고 고유한 별난 생각과 방법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시적인 성취에만 집착한다. 결과 하나로 모든 것에 서열을 매겨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을 나누고 극단적인 성과주의에만 매몰된 우리 사회의 근원적 문제다. 경쟁은 동기 유발의 동인이 될지는 모르지만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기에는 오히려 독이다. 결과에 대한 조급함에서 가시적인 성과 내기와 타인과의 비교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특히 성과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이룬 뒤에는 이에 안주하여 더 이상의 도전은커녕 기득권 지키기에만 연연하기 마련이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는 빨리 달려갈수록 느려지고 느리면 느릴수록 축지법을 쓰듯 성큼성큼 달려갈 수 있는 묘한 공간이 존재한다. 코로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멈춰서야 했던 전 세계가 다시 기지개를 켤 날이 다가오고 있다. 멈춤을 통해 무엇을 얼마나 배웠느냐가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변화가 관건이다. 학벌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 보여 주기 성과가 아닌 내실 있는 성장이 필요하다. 나락에 떨어진 듯한 일상도 실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내일을 위한 것이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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