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화재가 발생한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쿠팡 덕평물류센터가 20일 오전 폭격을 맞은 듯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5일 미국 규제 당국인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에 32세의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 리나 칸이 임명됐다. 칸은 ‘아마존 저격수’로 불리며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를 줄곧 주장했다. 그의 예일대 로스쿨 졸업논문 ‘아마존의 반독점 역설’은 가격 인하가 곧 소비자 편익이라는 기존 독점 규제의 틀로는 아마존과 같은 지배적 플랫폼 기업의 독점 위험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플랫폼 기업이 수익보다 성장을 추구하는 ‘약탈적’ 가격 책정으로 일단 시장을 장악하고 나면 경쟁자들은 이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시장에 진입하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 시애틀의 시의원 크샤마 사완트는 아마존에 맞서는 또다른 전사다. 시애틀에는 아마존 본사가 있다. 그는 2013년 ‘시간당 최저임금 15달러’ 공약을 내세워 당선됐고, 시애틀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인상한 도시가 됐다. 이후 시애틀 시의회는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대기업을 대상으로 노동자 수만큼 ‘인두세’를 거두는 조례를 통과시켰다가 기업들의 반발로 철회하기도 했다. 사완트는 아마존이 기업친화적 후보 당선을 위해 내놓은 막대한 기부금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2019년 3선에 성공했다.
2010년 소셜커머스로 출발한 쿠팡은 한국의 아마존을 꿈꾼다. 지난해 매출은 13조 원으로 1년 만에 배 가까이 늘며 전통의 유통 강자 롯데쇼핑(16조 원)을 바싹 따라붙었다. 누적 4조 원이 넘는 적자를 감수하며 ‘로켓배송’에 투자한 것이 주효했다. 로켓배송의 핵심은 쿠팡이 직접 매입한 상품을 전국 30개 도시 170여 곳 자체 물류센터에 보관했다가 배송하는 ‘풀필먼트’(물류 일괄 대행 서비스) 시스템이다. 최근에는 OTT 서비스에 진출해 도쿄올림픽 온라인 중계권도 따냈는데, 이는 모두 아마존의 성공 전략이었다.
문제는 아마존의 그늘까지 착실히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아마존 물류창고 노동자와 하청 배송기사의 산재 사고는 경쟁업체의 배에서 세 배에 달하는데, 과중한 업무 강도와 생산성 목표, 부족한 휴게 시간이 원인으로 꼽힌다. 쿠팡은 잇따른 노동자의 사망에도 업무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다가 지난해 10월 대구물류센터에서 야간근무 일용직으로 일하던 28세 장덕준 씨의 과로사가 산업재해로 인정되자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소방관의 희생을 부른 경기도 이천 덕평물류센터 화재는 기어이 불매 운동에도 불을 붙였다.
쿠팡을 탈퇴하든 그렇지않든 소비자들은 이제 로켓배송의 편리함 뒤에 노동자의 얼굴이 있고, 혁신이 저임금과 과로로 지탱된다는 사실을 더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됐다. 막 출범한 쿠팡물류센터노조의 SNS에 따르면 노조의 과로 관련 요구안은 ‘2시간 근무-20분 휴게시간 부여’다. 이 정도 요구안을 품지 못하는 혁신이라면 혁신이라 부를 가치가 없다. 쿠팡은 소비자와 노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소비자의 불매운동에만 기댈 수는 없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국민 3분의 1에 가까운 유효 고객 1600만 명, 직고용만 5만 명이 넘는다는 근로자를 위해서라도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정부와 의회가 함께 빅테크 기업 규제에 나선 미국처럼 한국의 리나 칸, 부산의 크샤마 사완트가 부상할 때가 머지않았는지도 모른다. iwill@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