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숨비] “바다에 내 삶을 맡긴 거지”… 영도 해녀 이정옥 이야기 #1-1

입력 : 2022-04-09 07:00:00 수정 : 2022-05-20 21: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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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만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영도구 동삼어촌계 - 이정옥(67) 부녀회장 이야기>


부산에서 태어난 해녀

내 고향은 부산 영도구 태종대. 여기 부산 앞바다에서 18살부터 쭉 물질을 해왔다. 지금 나이는 67세로 동삼어촌계 부녀회장이다. 내가 잘난 게 아니라 심부름꾼으로서 회장 역할을 맡고 있다. 해녀들 모두 연세 많은 할머니인데 그중 내가 제일 어렸기 때문이다.

영도 해녀들은 제주도 출향 해녀가 대부분이다. 제주도에서 여기까지 물질하러 왔다가 정착한 사람이 많다. 난 태종대 앞바다에 살다 보니 해안가에서 놀다가 자연스럽게 물질을 배웠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나고 자란 태종대 사람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제주도에서 오셨다. 어머니는 제주도 우도 출신. 부산에 물질하러 왔다가 아버지와 결혼해서 사셨다.


생계를 책임진 장녀

아버지는 지병으로 내가 17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3남 3녀 중 장녀인 내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18살부터 물질을 했다.

어머니는 물질을 잘 못했다. 제주도 우도 해녀들은 물질을 엄청 잘하는데 어머니는 아니었다. 물질로 생계를 책임질 정도가 아니라서 내가 배워서 한 거다. 바닷가에서 놀고 헤엄치다 보니 수영은 순조롭게 배웠다.

그때 당시 대동 양말공장에 일주일 정도 다녀봤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면 한 달 월급이 6000원이라더라. 근데 물질을 하면 하루 일당으로 1500원~1600원을 벌었다. 직장 생활로는 동생들하고 살기가 어려우니 ‘아 물질을 해야 되겠다’ 싶더라.

그렇게 물질을 해서 바로 아래 동생 2명 빼고는 공부를 시켰다. 둘은 대학, 하나는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하나는 딸내미라 고등학교만 나왔다.

난 스물다섯에 결혼을 했다. 영도구 봉래동에 시집을 갔는데 한 1~2년 남짓 물질을 안 하고 살았다. 배운 도둑질이 물질이라서 다시 태종대로 돌아왔다.


■ 일본으로 수출한 해산물

처음 물질할 때는 주로 말똥성게(앙장구)를 수확했다. 성게알은 ‘원진수산’이라는 공장에서 소금에 절여 가공도 했다. 거기에 몇백 그램씩 잡아서 갖다줬다. 지금은 kg대로 잡는데 당시에는 잠수복을 입지 않을 때였다. 추워서 많이 잡진 못했다.

성게알이랑 우뭇가사리는 일본에 많이 수출했다. 본드 같은 점착제를 만드는 재료인 ‘도박’도 마찬가지였다. 곰피도 많이 채취했다.

태종대가 관광지가 되고 사람이 늘어나면서 다른 해산물도 많이 잡았다. 전복, 미역 등 해산물을 채취해서 판매도 시작했다. 해삼, 멍게 이런 것도 관광객에게 많이 팔았다.

옛날보다 해산물은 많이 줄었다. 백화현상이 심해서 바닥이나 돌 자체에 식물이 안 자란다. 미역이나 곰피 정도는 바깥쪽에 있는데 안쪽에는 시멘트 바닥처럼 하얀 데가 많다. 먹이사슬이 없어지고 바다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영도 해녀들이 이른 아침부터 테왁 등을 들고 물질을 하러 나가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영도 해녀들이 이른 아침부터 테왁 등을 들고 물질을 하러 나가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태종대를 누빈 상군

우리 동삼어촌계 소속 해녀들은 목장원(식당) 밑에서부터 태종대 전체 해양대 앞까지 물질을 한다. 조합원까지 포함하면 100명이 넘는데 실질적으로 물질하는 분은 한 20명 정도 된다. 조합원으로 물질 안 하는 나머지 분들은 예전에 부산시수협에 출자를 했다가 돈을 돌려받지 못해서 해녀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상군(해녀는 물질 실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계급이 나뉜다) 축에 들어간다. 한 15m까지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데 예전에는 해삼 같은 건 바닥에 깔려 있었다. 하루에 수십kg은 기본이었는데 요즘은 많이 잡아도 10~20kg 수준이다.

아직까지 한 15m까지 잠수는 가능한데 지금은 깊이 가도 물건이 없다. 백화현상도 문제이지만, 다이버가 몰래 가져가는 듯하다. 원래 깊은 데까지 들어가는 해녀가 유리했는데 요즘은 잠수부 때문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오전에 한 7시쯤 물에 들어가서 11시까지 작업하고 나온다. 보통 오후에는 장사하고, 비번일 때는 오후 1~2시까지 작업을 했다. 옛날에는 쉬는 날이 없어서 태풍이 부는 게 아니면 해녀들이 쉬질 않았다. 할머니들이 매일 바다에 나가서 이건 아니다 싶더라. 그래서 기준을 정했다. 물이 사리일 때는 바닷속 시야가 흐리고 조류가 세다. 이런 시기가 한 달에 두 번인데 보통 3일씩 쉬고 있다.


사라진 불턱

잠수복을 안 입던 시절에는 물질할 때 불을 피웠다. 그곳에서 몸을 말리고 따뜻해지면 다시 바다에 들어갔다. 물질을 오래 못 하니까 20~30분 하다가 나와서 몸 좀 녹이고 풀리면 또 들어갔다. 그렇게 불을 피우던 공간을 ‘불턱’이라고 했다.

영도는 이제 불턱이 없다. 지금은 잠수복을 입으니까 보통 4~5시간 작업이 기본이다. (영도해녀문화전시관 안) 탈의장에서 옷을 입고 물질을 가고, 하리 쪽에서 물질을 시작하는 우리는 집에서 잠수복을 입고 간다. 샤워는 집에 가서 한다. 탈의장에 앉아 쉬면서 대화를 할 만한 공간은 없다. 앞으로 샤워시설이나 쉬는 공간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물질을 하다가 시야가 안 좋으면 조류에 따라 위험할 때도 있다. 선박이 지나갈 때 스크루에 사람이 다칠까 봐 걱정되는 것도 있다. 파도가 갑자기 치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건강은 적신호

해녀들은 납을 많이 차고 잠수를 하다 보니 허리가 아픈 분이 많다. 관절뿐만 아니라 두통도 심하다. 그래서 우리처럼 깊이 잠수하는 사람은 ‘뇌선(만성 두통을 이겨내기 위해 해녀들이 먹는 진통제)’을 먹는다. 하루에 두 첩씩 먹고 작업을 한다.

부산시에서 1~2번 정도 부산 백병원에 추천을 해줘서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형편이 안 됐는지 그걸 또 안 하더라. 제주도 해녀들은 의료 등 지원이 많고 시설도 괜찮던데 부산은 그렇지 못한 상태다. 우리는 탈의장에 망사리나 납 벨트 같은 무거운 물건만 놔둘 수 있는 정도다.

제주도에 견학도 가봤는데 거기는 구의원 등 지방의원들이 해녀를 위한 사업을 많이 하려는 분위기였다. 반면 부산은 기장군 같은 데도 혜택이 큰 거 같진 않더라. 부산은 시의원이나 구의원도 해녀 같은 사람한테는 신경을 안 쓰는 거 같다.

보통 해녀들을 하찮게 보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네들 필요하면 이것저것 말을 해도 돌아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정옥 해녀가 물질을 떠나 수확한 곰피를 들고 있다. 동삼어촌계 제공 이정옥 해녀가 물질을 떠나 수확한 곰피를 들고 있다. 동삼어촌계 제공

그래도 큰 자부심

해녀는 첫째로 자유롭다. 보통 직장에 다니면 남 밑에서 눈치 봐야 하고 시간도 따져야 한다. 그런데 이건 내가 자유로운 시간에 노력하는 만큼 버니까 그게 좋다. 내 능력에 따라 할 수 있는 거고, 내일모레 칠십이 다 됐는데 이 나이에 어디 가서 그런 돈을 벌긴 어렵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할 수 있는 직업이다. 그래서 자부심을 느낀다. 뭐 자식 공부시키고 이런 건 어느 부모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능력에 맞춰 일하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게 좋다.

젊은 사람이 있으면 양성하고 싶긴 하다. 그런데 백화현상 같은 여파로 앞으로 예전처럼 생계유지가 될지 걱정이 된다. 스포츠처럼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환영할 수 있다. 할머니들이 연세가 많으니까 젊은 세대가 할 수 있는 역할도 있다고 본다.

얼마 전에는 스쿠버 다이빙하는 50대가 막내로 들어왔다. 바다를 청소하거나 종패를 넣어주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끈끈한 공동체

테왁 같은 건 잘 만드는 사람이 대신 만들어주기도 한다. 서로 도와주는데 제주도 해녀들은 단합도 잘 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함께 한다. 나쁜 일이 있으면 2~3일씩 가서 협조해서 도와주고, 결혼식 같은 것도 많이 도와준다. 요즘에는 식장에서 경조사를 치른다 해도 옛날에는 집에서 음식 만들어 대접하고 그랬다. 그런 일 있으면 해녀들이 음식 만드는 거 도와주고 그러기도 했다.

어촌계에서는 풍어제도 매년 한 번씩 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지금은 못하고 있지만. 자주는 안 그러지만, 이 섬에서 나다 보니 미신을 따르기도 한다. 해녀들을 위해 바다에 술을 뿌리기도 한다.

60대가 3명인데 대부분이 70~80대다. 이렇게 가면 대가 끊길 수도 있다고 본다.


인생을 건 바다

바다는 내 밥줄이자 생명줄이다. 내 삶의 의미이자 전부를 맡긴 공간이다.

여기 할머니 중에 80대 할머니도 아직 물질한다. 우리보다 더 건강한 거 같다.

건강이 허락하면 앞으로 10년 이상은 더 물질하고 싶다.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정옥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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