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까진 길이 하나였다. 주변 풍경은 삭막했다. 사람들은 코를 박은 채 꾸역꾸역 앞으로 향했다. 포기자도 속출했다. 몇몇은 출발조차 하지 않았고, 도중에 나가떨어져 태반이 잠을 잤다. 수능으로 대학에 진학하던 시절 이야기다.
2002년 ‘수시’라는 두 번째 길이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풍경도 점차 달라졌다. 수능점수에 맞춰 대학을 선택하던 ‘정시’와 달리, 내신과 학교생활을 두루 평가하는 ‘수시’는 진로·적성을 살릴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수시의 길은 갈수록 확장돼 2007년 정시보다 넓어졌고, 지금은 10명 중 8명이 수시모집으로 대학에 가는 시대가 됐다.
부작용도 터져 나왔다. 일부는 ‘부모 찬스’를 썼다. 고등학생 시절, 대학 논문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등 화려한 스펙을 쌓았고, 고액 컨설팅으로 자기소개서를 만들어 ‘하이패스’처럼 활용했다. 정유라 씨 체육 특기자 입학 논란,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 시험지 유출 사건에 이어 조민 씨의 부정입학 논란까지. 반칙이 잇따라 드러나며 여론은 들끓었다.
그런데 이후 양상이 묘하게 흘렀다. ‘공정’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수시를 축소하고 정시를 확대하는 기조로 역행한 것이다. 과연 정시는 공정한 룰일까. 점수로 줄을 세워 앞사람부터 순서대로 자르는 방식은 언뜻 합당해 보이지만, 이면엔 구조적인 불공정이 존재한다. 수능은 반복 학습을 할수록 고득점에 유리한 데다, 변별력을 가르는 ‘킬러 문항’을 맞히려면 사교육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스카이(SKY) 정시 합격자 상당수가 서울 강남 8학군 고교 재학생 혹은 졸업생인 현실은, 수능 고득점을 위해 사교육과 N수를 뒷받침할 배경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시 확대의 더 큰 문제는 학교 현장이 과거로 회귀할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 책상에 코를 박고 꾸역꾸역 문제풀이만 하는 풍경은 20세기 선배들로 족하다. AI 친구와 메타버스를 노닐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학교생활에 충실할 수 있도록 수시의 단점을 보완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이미 몇 년 전 외부 스펙 기재가 금지됐고 2024학년도엔 자기소개서도 사라져, 수시에서 반칙과 뒷배의 여지가 한층 줄었다.
‘대입 불공정’에 분노한다면 수시·정시 비중을 놓고 다툴 게 아니라, 두 길을 더 공정하게 만드는 데 관심을 가져야 있다. 최근 탐사보도매체 〈셜록〉은 미성년이 논문 공저자에 오른 입시비리 사례를 엄단하지 않는 교육부를 상대로 공익감사를 준비 중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킬러문항 출제금지 등 수능제도 개선을 요구하며 사교육의 힘을 빼는 방향으로 길을 내왔다. 두 가지 길 너머의 움직임도 있다.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저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통해 서울대 수준의 대학을 9개 더 만들어 스카이(SKY)로 몰린 입시병목현상을 해소하자고 제안했다. 9개 지역거점국립대는 물론 서울대도 이에 화답하며 논의가 구체화하고 있다. ‘교육의봄’은 더 나아가 학벌·스펙에 의존하지 않는 기업 채용문화를 만들겠다며 시민운동에 나섰다. 이들 모두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길, 나은 풍경을 만들어주려는 노력이다.
정유라와 쌍둥이 자매, 조민 때문에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어른들이 더 나은 길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무책임하지 않은가.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