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만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22일 오전 9시 10분께 부산 서구 암남동 암남항. 송도해수욕장 끝자락 아담한 항구 해녀촌에 소형 승합차 ‘다마스’가 도착했다. 탈의실에서 수다를 떨던 해녀 3명은 자연스레 짐을 싣고 차량에 올랐다.
파란 다마스는 송도해수욕장 해변도로를 따라 달렸다. 검은 옷을 입은 해녀들은 밀착해서 붙어 앉았고, 짐칸은 주황색 ‘테왁’과 초록 ‘망사리’로 채워져 있었다.
다마스는 송도해수욕장 해상케이블카 탑승장 주변 ‘거북섬’ 앞에 멈췄다. 해녀들은 운전을 해준 ‘삼춘(삼촌의 제주말)’에게 “12시 40분쯤 와줘”라고 소리치고 바다로 들어갔다.
부산 송도 앞바다에도 해녀가 있다. 이날 물질한 송도 해녀는 다마스에 탄 3명이 전부지만, 해녀들은 끈끈한 공동체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왕년의 송도 해녀들도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송도용궁구름다리 옆 암남공원에는 또 다른 해녀촌이 있다. 그들은 장사를 하며 바다 곁에 남아있다.
■ 해녀촌에 남은 5명
송도 암남항 해녀촌을 지키는 해녀는 5명이다. 홍태육(84), 박영자(81), 오순자(80), 고성숙(76) 해녀와 막내 양다경(67) 부녀회장이 함께 물질한다.
서구에는 암남어촌계에만 20명이 해녀로 등록됐다. 신고를 마친 해녀 5명을 제외하면 15명은 미신고 상태. 고령화 등으로 신고 기준인 ‘1년에 60일 이상 물질’을 채우지 못하는 해녀들이다. 등록된 20명도 2012년 말 기준 28명보다 29%가량 줄어든 수치다. 홍태육 해녀는 “고향이 송도인데 제주도 출신 해녀들과 오랜 시간 함께 했다”며 “15살부터 70년 가까이 물질했는데 여기에도 한때는 80명까지 있었다”고 했다.
꾸준히 물질하는 해녀는 손에 꼽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함께 바다로 향한다. 거북섬이나 송도용궁구름다리뿐만 아니라 두도(머리섬) 일대까지 송도 바다 곳곳을 누빈다. 물론 건강 문제 등으로 5명도 동시에 물질하긴 쉽지 않다.
배를 타고 먼바다까지 나가는 ‘뱃물질’은 가끔 있는 일이다. 구정래 암남어촌계장은 “예전에는 송도에도 해녀들이 타는 배가 4~5대 운항했는데 지금은 그런 배가 없다”며 “해녀가 적으면 선주에게 내는 비용이 커져서 수시로 뱃물질을 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 수익은 똑같이
송도 해녀들은 보통 오전 9시 30분께 물질을 시작했다. 해녀들은 우선 암남항 탈의실에 모여 물질을 준비했다. 고무 옷을 갈아입으며 수다를 떨고, 유토(기름을 섞어 굳지 않는 찰흙으로 해녀들은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사용)를 비벼 귓속에 넣고 바다로 향한다. 보통 3~4시간 정도 물질하면 밖으로 나온다.
해녀들은 이달 21일 아침엔 다마스를 타지 않았다. 해녀촌 뒤쪽 산책로를 따라 걷다 갯바위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테트라포드 주변 등을 돌며 물질하더니 암남항 한가운데로 물건을 들고 돌아왔다. 22일에 ‘거북섬’ 일대로 갔으니 조금 떨어진 바다를 누빈 셈이다. 앞서 이달 5일 오전 10시께에는 다마스를 타고 암남공원 해녀촌 옆에 도착했다. 용궁구름다리와 동섬 일대에서 물질하는 날이었다.
그렇게 수확한 해산물은 암남항 해녀촌에서 손질한다. 해녀들이 들고 온 망사리에서 두툼한 해삼과 전복이 쏟아졌고, 미역과 보라성게 등이 해녀촌 바닥을 채웠다. 갓 잡아 온 군소는 난로에 삶았고, 보라성게에서는 성게알(성게소)을 파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해산물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곳 해녀들은 수익을 균등하게 나눈다. 애초에 망사리에 건져온 해산물 양이 달라도 한곳에 모아 함께 손질한다. 암남어촌계 김현진 간사는 “암남항 해녀들은 예전부터 해산물 수확과 장사로 번 수익을 똑같이 나눴다”며 “해녀들끼리 오랜 시간 물질과 판매를 함께 해서 그런 듯하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해녀 5명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코로나19로 어려운 이웃을 위한 성금을 내기도 했다.
■ 한 가게 두 간판
송도 암남공원에는 또 다른 해녀촌이 있다. 공영주차장 귀퉁이에 해녀들이 오랜 시간 해산물을 팔아온 공간이 있다. 암남어촌계 임원순(88) 해녀는 “주차장 부지 매립 전에는 접시에 해산물을 담아 팔면 바위에 그대로 앉아서 먹었다”며 “주변이 개발돼도 암남공원 해녀촌은 계속 자리를 지켜왔다”고 했다.
암남공원 해녀촌을 유심히 관찰하면 특이한 점이 있다. 포장마차는 13개인데 간판은 26개다. 한 가게에 상호가 2개씩 붙은 셈이다.
기존 암남공원 해녀촌은 삼각형 형태일 정도로 포장마차가 더 많았다. 하지만 2016년 태풍 ‘차바’가 모든 포장마차를 무너뜨렸다. 서구청과 부지 문제로 갈등 끝에 해녀 장사 공간은 복원 과정에서 축소됐다. 임시 허가를 받아 세금을 내와도 소용없었다.
결국 해녀들은 상생하기 위해 한 가게를 2명씩 운영하기로 했다. 암남어촌계 강명순(72) 해녀는 “수십 년을 장사했는데 누가 쉽게 떠날 수 있겠느냐”며 “마음이 맞는 해녀 둘이서 같은 공간에서 각자 간판을 달고 장사를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 자리는 제비뽑기로
암남공원 해녀촌은 매년 10월 제비뽑기로 가게 자리를 바꾼다. 위치가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일부 가게만 손해 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보통 여름에는 바닷가와 가까운 곳이 좋지만, 겨울에는 다른 가게보다 추운 편이라고 한다. 양쪽 끝 집은 그냥 지나치는 손님이 많아 중간을 선호하는 해녀도 있다.
매년 테이블과 냉장고 등을 모두 옮겨야 해 5일 정도는 영업이 어렵다. 그래도 자리를 바꾸는 이유는 같이 먹고 살기 위해서다. 강명순 해녀는 “그래야 같이 살 거 아니냐는 생각에 해녀들이 동참한다”고 말했다.
암남공원 해녀촌은 포장마차 밖 영업도 자제한다. 누구도 테이블을 밖에 내놓진 않는다. 손님이야 탁 트인 바다와 영도를 바라보며 해산물을 즐길 수 있겠지만, 커지는 욕심을 자제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다.
■ 관광지로 떠오른 송도
송도 해녀촌은 유명세를 얻으며 SNS 등에도 많이 노출된 상태다. 암남항 해녀촌은 아담한 항구 바로 앞에서 해산물을 즐길 수 있어 주변 횟집과 함께 젊은 세대 방문이 늘고 있다. 노상포차에서 바다향 가득한 자연산 안주를 곁들일 수 있어 타지에서도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왕년의 해녀들이 많은 암남공원 해녀촌도 마찬가지다. 송도 앞바다를 그리워하는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이 깃든 장소다. 코로나19 유행 전까지는 조개구이와 각종 해산물을 즐기려는 외국인 단체 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메뉴판에 중국어가 병기된 가게도 있을 정도다.
송도는 거듭된 개발로 국제적 관광지로서 면모를 갖추는 중이다. 해상케이블카뿐만 아니라 호텔 등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서기도 했다. 송도구름산책로와 송도용궁구름다리도 관광객을 끌고 있다.
송도해수욕장은 집계 방문객 1000만 명을 넘어서며 해운대와 광안리와 격차를 좁히기도 했다. 특히 송도는 1913년 개장한 국내 최초 공설 해수욕장이라는 역사도 있다.
이처럼 송도는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지만, 오랜 세월 바다를 지킨 해녀는 점차 줄고 있다. 바다가 깨끗해도 개발 여파로 물건도 줄었다고 한다. 구정래 암남어촌계장은 “송도 바다는 항상 1급수나 1.5급수를 유지해 산호초가 있었고, 물고기 새끼도 많았다”며 “주변이 개발되면서 불가사리는 많아졌는데 전복이나 해삼 등은 줄어드는 추세”라고 말했다.
※송도 해녀 이야기를 생생히 담은 영상은 기사 위쪽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인터뷰 기사로 송도 해녀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