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하면 영국의 낭만파 시인 워즈워드(1770-1850)의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은 뛰누나(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로 시작하는 시 ‘무지개(The Rainbow)’에 나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시구가 먼저 떠오른다.
어린이는 자연·순수·아름다움·거룩한 것·영원한 것·절대적인 것의 상징으로 어른들보다 우월적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다. 어린이의 무지갯빛 아름다운 마음이 자연의 경건함으로 이어지길 소망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된다.
어린이라는 말은 1920년 천도교단에서 펴낸 ‘개벽’ 통권 제3호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신조어였다. 창안자는 소파 방정환(1899-1931)이다. 어린이날 역시 천도교인인 방정환이 주축이 된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에서 제정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천도교 사상은 어린이 역시 한울님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경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 수 있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할 것이다.
한때 우리 성인들도 어린이였다. 어린이거나 어른이거나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고, 지금도 어린이며 앞으로도 어린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심지어 어느 소설가는 10cm 자를 놓고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를 찾는다면 본인은 ‘9.99cm는 어린이고 0.01cm만 어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는 어른의 마음속엔 어린이가, 어린이의 마음속엔 어른이 일부 함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갓난아이의 마음같이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마음이 또 존재할까? 갓난아이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와 눈 맞춤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이 물음에 고개를 선선히 끄덕일 것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어린이란 존재 자체를 예찬하고 있나 보다.
‘어린아이들의 존재는 이 땅 위에서 한없이 고귀한 것’이라고 아미엘의 일기로 유명한 아미엘(H·F Amiel)은 말한다.
맹자가 주창한 ‘성선설(性善說)’은 사람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한데 나쁜 환경이나 물욕으로 악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순수하고 선한 갓 태어난 아이를 붉은 아이(적자·赤子)라고 하고, 이런 마음을 지녀야 대인(大人)이라고 가르친다.
몸이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신생아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린애의 마음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려 말 학인 목은 이색은 외부의 유혹을 이기려면 어린애의 마음이 필요하다고 ‘적자음(赤子吟)’ 시(詩)에서 읊고 있다.
요즘에는 동요 부르는 소리를 언제 들어봤을까 할 정도이다. 사랑타령, 이별타령, 눈물타령, 심지어 막걸리 한 잔까지 외치는 가요를 따라 부르고 어른들의 몸짓을 흉내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잘한다 박수치며 웃고 있다. 이제 아이들의 예전의 그 맑고 순수한 동심(童心)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근간엔 어린이들이 우울증, 주의력 결핍 행동장애(ADHD), 불안장애 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도를 자주 접하게 된다. 티 없이 맑고 밝은 시절을 보내야 할 이들의 영혼이 벌써부터 큰 상처를 입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갈수록 자연스러움이 사라지고, 메말라 가고, 까칠해지고, 거칠어지고, 신경질적이 되어 가고, 비틀어지고, 경직되어 가는 어린이들을 주위에서 많이 접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건강한 성장에 지장을 받을 만한 환경과 조건에 맞부닥뜨리게 된다. 바쁜 부모와 화목하지 못한 가족관계가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의 대중매체를 쉽게 접하게 되면서 성장을 해치게 되기도 한다. TV나 휴대전화·컴퓨터 기기 등에 아이들의 눈과 뇌가 혹사당하고 있다. 교육도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으니 아이들의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아이들이 어른들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은 이제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척추측만증, 목에 이상, 골반 비틀림 등 신체적 증상도 요즘 아이들에게서 흔하게 발견되고 있다.
쉽게 짜증 내고 질서에 반항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왜 그럴까?
현대의 삶은 어린이들에게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을 제공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패스트푸드를 비롯한 각종 선호 대상 음식들은 천천히 성격과 체형의 비틀림을 유도한다. 즉 먹고 사는 것이 오염의 덩어리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장 잠재력이 큰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체적 토대는 올바른 자세이다. 즉 올바르게 서고, 올바르게 앉고, 올바르게 눕고, 올바르게 걷는 일은 개인의 평생 건강을 위해 무엇보다도 귀중하고 보배스러운 자산이 된다.
이렇듯 키 쑥쑥, 튼튼, 강건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심신의 성장과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성장이란,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몸무게가 늘고, 키가 크는 것을 말한다. 발달이란, 신체적 능력과 사회적인 기능과 기술을 익히는 것을 말한다. 성장과 발달이 골고루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완성되어 가는데 이것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몸의 일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적절하게 발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형식과 형상이 내용을 만든다 했다. 그러므로 자세는 그 사람의 마음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세는 성격을 만드는 근본이고, 마음은 자세를 만드는 근본이다.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곧 그 사람의 마음을, 성정(性情)을 표현하는 것처럼 마음이 흐트러지면 자세도 흐트러진다.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마음 또한 해이해지고 흐트러지기 쉽다. 똑바로 앉아라, 등 구부리지 마라, 허리를 곧게 펴라와 같은 말을 자라면서 한두 차례 안 들어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자세가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바른 자세를 유지하면 많은 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아이들의 힘들고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은 없을까? 그 해법 중 하나가 ‘요가’라고 감히 필자는 주장한다. 아니 어쩜 아주 훌륭한 대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어린이 요가’는 어린이가 바른 자세를 갖게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성장을 돕는 여러 운동 중에서 온몸 구석구석까지 전신 운동을 하는 요가를 첫 번째로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느림의 미학과 정지의 극치를 추구하는 요가는 남과 늘 경쟁하고 비교 당하는 상황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결과가 아닌 과정과 목적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또한 오늘날 어린이들이 성인이 될 무렵, 그들의 최고 경쟁자는 더 이상 명문대 졸업생과 유학생도 아닌, 생각할 수 있는 기계일 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아이들에게 미래 기계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감성지수’ 등 인간 고유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키는 대안으로 역시 요가가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요가는 어린이들의 사고를 다차원적으로 열어 주고 책임감 있는 세계의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각 나라의 동량이 되고 나아가 전 세계를 떠맡게 될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을 완전한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풍요로 이끄는 데에 있어 요가야말로 필수불가결한 21세기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B.K.S 아이엥가)
“아기들은 발달 단계마다 요가의 대가들이 부러워할 만큼 자연스럽게 몸을 비틀거나 구부리며 다양한 요가 동작을 행한다. 네 발로 기는 방법을 배울 때, 아기들은 코브라 자세로 몸통을 활 모양으로 굽히며 머리를 위로 치켜든다. 그리고 아기들은 걷기 직전에 아래로 보는 개 자세로 몇 주 동안 이 방 저 방을 가로질러 다닌다. 심지어 새근새근 잠자는 동안에도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구부리는 이른바 아기 자세를 취한다. 이런 자세들은 아기들의 몸을 골고루 발달시켜주고 아기들이 자라는 데 필요한 근육들을 강화시켜준다. 요가는 아기들이 두 발로 설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타고난 운동이다.”(수지 아네트)
“무색 무취 무미인 요가와 어린이는 선한 마음, 겸손한 마음,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메마른 현대 사회에서 이처럼 풍요롭고 맑고 청정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요가의 움직임은 자연의 흐름 그대로이다. 어린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예쁜 것은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요가의 호흡을 통한 명상을 하다 보면 내면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 깨끗하고 맑고 투명한 마음을 보는 훈련이 된다.”(원정혜)
예로부터 갓난아기들에게 시키는 몸동작이 전해 내려온다. 고개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동작인 ‘도리도리(道理道理)’는 천지의 무궁한 도리를 알고 살라는 뜻이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잼잼(지암·持闇)’은 쥘 줄을 알았으면 놓을 줄도 알라는 뜻으로 과욕을 경계한다. 한 손바닥은 펴고 다른 한 손바닥으로 노궁을 부딪치는 동작인 ‘곤지곤지(困地困地)’는 땅의 도리를 알라는 뜻이며, ‘에비에비(업비업비·業非業非)’는 부당한 것은 하지 말라는 금지의 뜻을 전할 때 하는 몸짓과 언어이다.
‘아함아함(아합아합·亞合亞合)’은 입에 손바닥을 대고 두드리며 아아아아 하는 동작으로 살아가면서 입조심 하라는 뜻이요, ‘짝짝쿵 짝짝쿵(작작궁작작궁·作作弓作作宮)’은 양 손바닥을 부딪치면서 하는 동작으로서 남녀 간의 결합을 뜻하며 하늘의 이치, 음양의 이치를 알리고 있다. 이러한 이치들을 깨달아 영과 육이 잘 자라도록 기원하는 의미의 동작들은 우리 조상 고유의 교육기법으로 아기의 성장을 돕고 올바른 정신과 얼이 자연스럽게 심어질 수 있도록 했다. 어쩜 일종의 베이비 요가라고 칭해도 좋을 듯하다.
집에서나 요가원 등에서 요가 수련을 할 때에는 가능한 한 재미있게 진행하는 게 좋다. 자세가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어린이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요가 자세가 좀 잘 된다고 다른 친구들보다 우월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아이들에게 주지시키는 게 좋다. 겸손함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리고 비교하지 않는 게 좋다. 서로 간에 경쟁심으로 요가 동작을 무리하게 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어려운 자세를 완성하려고 너무 애쓰지 않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요가는 자기의 능력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도 몸에 작용력은 충분히 발휘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요가를 경주하듯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로지 요가는 자신과의 내적인 속삭임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즉 춤추듯이 즐기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경쟁심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그 순간부터 요가는 잘못된 것이다. ‘요가 아사나 챔피언십 경연대회’ 등은 보다 완전한 아사나를 지향하고 고무시키는 차원은 있을지언정 요가의 참된 정신은 망각한 행위라고 본다.
왜냐면 요가는 몸과 정신의 쌍두마차를 타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회 등은 오롯이 서양식 사고와 상업적 측면이 강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가는 강요가 아닌 착하고 건강하고 지혜로운 어린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부담 없이, 연령에 맞게, 각자의 능력에 맞게 조정해 가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 요가가 평생운동·평생수련·평생학습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덤으로 요가를 통해서 얻는 자신감은 어린이가 학교생활에서 경험하는 성공에 대한 압박감을 해소하는 데 좋은 해독제 구실을 할 것이다.
요가경전 중 하나인 기원전 6세기경에 쓰인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에서는 “행운의 결과에만 관심을 쏟는 것은 무지에 이르는 길이며, 반면 성공이나 실패에 대한 걱정을 접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가정에서 비경쟁 철학을 강조하는 요가 수련을 함께하면 어린아이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성공에 대한 부담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어린이들은 타고난 요가 수행자들이다. 본래 좋은 자세를 가지고 태어나며, 깊게 호흡할 줄 알고 삶에 안주한 편견을 갖지 않는다. 요가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호흡하면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도구이다.
이렇듯이 요가 수련을 하면 몸만 유연해지고 건강해지는 게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과 영혼도 유연해지고 강해지면서 활짝 열리게 된다. 자연에서 멀어진 몸과 마음을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이끌어 주는 것이 요가의 주된 기능이기도 하다. 바깥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자신감과 힘, 용기와 인내심을 키우게 된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평화와 행복, 나눔의 마음을 갖는 것이 요가의 궁극적 목적이다.
요가는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슬프고 힘들고 우울한 일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
예를 들어 변화가 많이 일어날 때에는 ‘다리 자세(세투반다 아사나)’를 취해 봄으로써 스스로의 다리가 될 수 있다. 불안할 때는 ‘사자 자세(싱하 아사나)’를 취하면서 용기를 북돋우고, 공부에 집중이 안 될 때에는 ‘물구나무서기(시루시 아사나)’를 취해 머리를 식히고 집중도를 높이며, 나약해지고 소심해질 때는 ‘영웅·무사 자세(비라바드라 아사나)’를 취함으로써 대범해지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요가를 하면서 축적된 육체적 정신적인 능력은 생활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의 요가수련원에는 아들딸 자녀의 손을 잡고 엄마와 함께 들어서는 회원들도 많다. 때로는 부녀지간에 부자지간에, 때로는 온 가족이 손을 잡고 들어서는 회원들도 있다. 동작이 잘되고 못됨을 떠나 그들이 함께 요가 수련을 한 기억들은 평생을 두고 소중한 추억으로 감동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함께한 취미생활, 함께한 요가라는 공감대를 공유한 것이기에 말이다. 서로의 아사나 모습을 보며 때로는 깔깔대고, 때로는 진지해지고, 때로는 와우하며 격려도 해주는 그들의 눈빛은 분명 밖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서로 대화가 많이 없어도 서로간의 눈빛만으로도 벌써 더없는 가족 간의 사랑은 굳게 다져지고 있는 것이다.
수천 년 요가의 역사에서 요가는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어 왔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요가는 여러 가지 얼굴로 삶의 현장을 찾아왔다. 이제 미래의 주인공이자 희망인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 요가’에도 눈을 돌릴 때이다.
지금 당장 아이들의 손을 잡고 어린이 요가를 시작해 보자.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제대로 된 요가수련원이나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따뜻한 성정을 지닌 요가 선생님을 만난다면 그보다 더 큰 행운이 없을 듯하다.
어린이 요가를 통해 가족 간의 사랑과 이해, 모든 사람들과의 사랑과 이해,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더욱 넓어지기를 기원해본다.
끝으로 고대 선불교의 격언을 패러디한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가 어릴 적 산은 산이요, 강은 강이며, 하늘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길을 잃은 다음부터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린이 요가’를 만나면서 다시 산이 되고 강은 강이 되었으며, 하늘은 하늘이 되었다!”
[어린이 요가 / 최진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어린이는 한울님/ 어린이는 자연/ 어린이는 순수/ 어린이는 맑음/ 어린이는 청정법신/ 어린이 마음 하늘 마음/ 어린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천국 입장/ 이런 어린이 몸/ 이런 어린이 마음과 영혼/ 온전히 지키는 것/ 깨끗하고 맑고 투명한 마음을 보는 훈련/ 바깥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들/ 뚫고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 배양/ 그리고 힘들고 지친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시기·질투·미움·폭력·거짓 멀리하고/ 평화·행복·사랑·나눔의 마음 갖게 하고/ 몸과 마음의 균형과 조화/ 꽃피게 하는 것/ 어린이들이여/ 요가를 춤추듯 즐기기를!/ 요가가 일시적이 아닌/ 생활 속에 젖어든/ 평생운동 평생수련 평생학습이 되기를!/ 그리하면 그대들의 영육에/ 피와 살과 뼈가 될지니!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