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6월, 햇볕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바깥 공기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자연 감성’을 가득 채워놔야 할 때.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초록'이 연상되는 전남 보성군으로 힐링 여행을 떠났다. 보성의 차밭이야 워낙 유명하니 이번엔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려 봤다.
■득량역 추억 감성 찍고 율포솔밭해수욕장에서 푸른 쉼표
‘득량역’은 승무원이 없는 작은 간이역으로 추억과 낭만의 공간이다. 역 앞 거리에 들어서자 ‘추억의 거리’ 간판이 나오고 순식간에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 역전 이발관, 꾸러기 문구사, 장군 대포, 득량 사진관, 백조 의상실 등 1970~1980년대 정겨운 거리 풍경이다. 이곳의 지명인 득량은 얻을 득(得), 양식 량(糧)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많이 조달한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이런 내용을 담은 벽화도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추억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지만 잠깐의 시간여행은 즐거운 추억을 새긴다.
득량역 대합실로 들어가니 시간여행의 조각이 이어진다. 한쪽 벽면 가득 옛날 영화 포스터와 방문객들의 메시지가 붙어 있고 흑백텔레비전, 아이스께끼 통도 전시돼 있다. 옛날 역무원들이 쓰던 모자와 개표 가위, 운전용품, 차권 통도 있다. 1970년대 역무원 유니폼을 직접 입어 보고 찰칵찰칵 사진을 남길 수도 있다.
‘율포솔밭해수욕장’의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흰 모래밭과 파란 하늘, 더 파란 바다까지 넋 놓고 바라보게 하는 풍경이다. 저 멀리 둥둥 떠 있는 고깃배들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완성한다. 해수욕장 입구에서 문정희 시인의 시 ‘율포의 기억’을 만났다.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하략).’ 시를 읽고 저 멀리 검은 뻘밭과 고깃배를 다시 바라보니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해수욕장의 모래밭 뒤쪽은 평균 수령 100년 이상인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들은 빽빽하게 붙어 있지 않고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늘은 충분히 짙고 바람은 시원하게 드나든다. 나무 아래는 텐트촌. 텐트 앞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에서 행복이 묻어난다. 모래밭 곳곳에 있는 조형물은 재미있는 포토존이다. 빨강 파랑 화려한 옷을 입은 배 한 척은 이국적인 느낌마저 준다.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고 있는 커다란 손 조형물은 SNS에서 유명하다. 하늘과 바다와 섬이 마음 속 ‘하트’도 꽉 채워준다. 지친 일상에 혹은 하루 여행에 쉼표를 찍기에 딱 좋은 곳이다. 해수욕장 바로 앞에는 율포해수녹차센터가 있다. 해수에 녹차를 우린 ‘녹차 해수탕’으로, 노천탕이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노천욕을 즐길 수 있다.
■초록 제암산자연휴양림 걷고 한옥 카페 춘운서옥서 마침표
제암산은 정상에 임금 제(帝)자 모양의 높이 30m 기암괴석이 솟아 있다. 나라가 어렵거나 가뭄이 들었을 때 국태민안을 빌었던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한다. 제암산자연휴양림의 휴양관, 야영장 등에서 하룻밤 쉬어 가면 더없이 좋겠지만, 잠시 걸을 수 있는 산책로도 잘 조성돼 있다. 어드벤처, 곰썰매와 집라인 등 즐길 거리도 있다.
가장 짧게 걷는 길은 수변 순환산책로이다. 길이 2.1km로 담안저수지 둘레를 도는 길이다. 초록 그늘이 시원하게 내려앉은 덱 길을 걷다 보면 곰돌이 쉼터가 반긴다. 이름 그대로 커다란 곰 얼굴 모양이다. 얼굴 안쪽에 쉴 수 있는 벤치가 있다. 덱을 따라 걷다 보면 어드벤처 시설과 곰썰매를 만난다. 짜릿한 스릴을 좋아한다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눈이 동그래질 것 같다. 왼편으로 계속 저수지를 바라보며 초록 공기를 실컷 맡으며 걷는다. 널따란 잔디광장으로 내려서면 저수지를 시원하게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나온다. 졸졸 흐르는 계곡 위 작은 목교를 건너면 그네 의자 앞에 잠시 앉아 보자. 새소리 물소리에 절로 눈이 감긴다. 푹 쉬다 갈까 했지만 곁눈으로 보이는 초록 나무숲이 어서 오라며 유혹한다. 황토 포장된 산책로라 걷기 좋다. 마지막 구간은 시야가 뻥 뚫린 둑길. 짧은 산책로지만 이처럼 다채롭게 구성돼 있어 발걸음이 즐겁다. 조금 더 길게 걷고 싶다면 5.8km 더늠길을 택하면 된다.
보성읍내를 벗어나자마자 야트막한 산 아래에 ‘춘운서옥’이 숨어 있다. 춘운서옥은 ‘글과 그림이 있는 초봄의 구름과 같은 가옥’이라는 뜻이다. 한옥 카페와 한옥 스테이로 운영된다. 단순한 한옥 인테리어가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한옥이다. 춘운서옥은 150년 전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문가 회생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을 현 소유주가 매입해 복원했다고 한다. 1987년 전남 문화재 자료로 지정됐지만 관리상 어려움 등으로 2009년 지정이 해제됐다. 부지를 쓸어 버리고 빌라를 지으려는 계획은 당시 출입구 소유주가 달라 무산됐다고 한다.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조경공사를 거쳐 오랜 세월의 가치와 옛 멋을 그대로 살렸다.
카페 건물로 쓰이는 한옥은 100년 이상 된 안용섭 고택을 그대로 옮겨 와 복원한 것이다. 내부의 샹들리에와 앤티크 가구가 한옥 건물과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룬다. 툇마루 방석에 앉아 소반에 커피 한 잔 놓고 앉으니 호사가 따로 없다. 초록이 쏟아져 내릴 듯한 뒷산 나무들과 정원의 오래된 나무들이 눈과 마음을 씻어 준다. 예술품 가득한 조경도 멋스럽다. ‘동굴’이란 푯말이 눈에 띄어 길을 따라가 보니 정말 동굴이다. 개미집처럼 안쪽까지 차 마실 수 있는 공간들이 이어져 있다. 바깥 기온과 확연히 다른 시원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옛 색에 이색까지 더해진 신선함으로 힐링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여행 팁 : 전남 보성군 웅치면 대산길 330 ‘제암산자연휴양림’의 주차요금은 중·소형차 기준 3000원이다. 입장료는 성인 1000원, 청소년(만 13~18세) 600원, 어린이(만 7세~12세) 400원. 수변 순환산책로와 더늠길은 각각 주차장이 마련돼 있으니 매표소에서 표를 살 때 가는 길을 문의하면 된다. 모험시설은 최근 운영을 재개했다. 곰썰매와 전동휠은 오전에만 체험할 수 있고 어드벤처와 집라인은 오후에만 운영한다. 이용일 3일 전까지 홈페이지에서 예약이 가능하다. 곰썰매는 상황에 따라 현장 접수도 받는다. 기상 상황이 나쁘면 시설 운영이 중단될 수 있으니 미리 전화로 운영 여부를 확인하는 게 좋다.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송재로 211-9 카페 ‘춘운서옥’은 오전 10시 30분 문을열고 오후 8시 닫는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일이다.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