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계단, 이바구거리, 초량전통시장, 초량불백거리, 차이나타운, 텍사스거리…. 역동적이며 자유분방하며 부산스러운 동네, 초량의 흩어진 보물들이며 공간이다. 이처럼 초량에는 근현대 부산의 역사가 곳곳에 서려있다. 감히 말하지만, 초량은 근현대 부산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초량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초량 산보>(하은지, (주)지능디자인)가 최근 나왔다. 책에는 초량 일대의 자연과 역사‧생활사‧예술 자원 등 내용이 수록돼 있다. 이름 그대로 초량동을 ‘산보(散步)’하며 의미 있는 공간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안내서다. 직접 저자가 현장을 둘러보고 주민의 이야기를 토대로 작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저자 하은지는 지역의 공간,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깡깡이마을 100년의 울림-산업 편>에 공동 저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는 ‘B-Local’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연구와 구술기록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하은지 작가 ‘초량 산보’
168계단·백제병원…
생활사·예술 자원·자연
의미있는 공간들 소개
주민 이야기 토대로 기록
하 작가는 “주민의 목소리를 통해 지역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산보를 할 때 마치 주민이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 구술 내용을 책자에 적극 반영했다”고 말했다. 또 책은 재미를 더하기 위해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글, 옛 지도와 사진, 신문기사, 지역민의 구술)와 삽화 등을 활용한 점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옛 추억을 소환하는 주민들의 일상을 담은 흑백 사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초량의 속살들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산보하듯 초량 골목과 거리를 거닐어도 될 듯하다. 책은 부산 동구의 ‘초량천 예술정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돼 비매품이지만, 부산지역 대부분의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책은 ‘초량 산보 준비’ ‘초량 지역 알기’ ‘초량 산보하기’ ‘예술정원 산보하기’로 구성돼 있다. ‘초량 산보 준비’에서는 초량의 범위를 얘기해 준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초량은 부산 중구 중앙동, 영주동, 동구 초량동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 각 동별 명칭이 생기면서 지금의 초량 지역만을 지칭하게 된다.
‘초량 지역 알기’에서는 초량의 옛 이름이 새띠(혹은 새터)였음을 알 수 있다. 새띠 마을은 ‘억새와 띠풀이 우거진 마을’이란 의미다. 초량천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도 있는 것은 덤이다. 초량천은 구봉산에서 발원해 초량동과 수정동을 경유한 뒤 다시 초량동에서 만나 부산항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길이는 2.3km 정도다. 초량천은 1970년대 복개되고, 하천이 있던 자리는 너른 땅이 된다. 하지만 2020년, 복원을 통해 흐르는 초량천 물을 지금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됐다.
‘초량 산보하기’에서는 부산 동구와 서구 경계에 있는 구봉산(408m)부터 초량 산복도로, 초량 당산, 168계단, 초량성당, 초량불백거리, 초량맛거리, 초량돼지갈비골목, 초량전통시장, 남선창고·백제병원·중앙극장 자리, 초량 차이나타운, 중동길, 정발 장군 동상, 다나카 주택 자리, 부산역, 부산항 북항까지 초량의 주요 공간 28곳을 소개한다. 산복도로에 사는 주민들은 수도가 놓이게 된 1980년대 전까지는 ‘물과의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물동이를 들고 공동수도 앞에 쭉 늘어선 산복도로 주민들의 모습은 진풍경이었다. 역사적인 공간에 대한 이해도 넓혀준다. 초량교회가 1892년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에 의해 설립된, 부산지역 최초의 교회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것만이 아니다. 초량교회는 일제강점기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의 진원지 구실도 했다. 1925년 주기철 목사가 부임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85년의 역사를 가진 초량초등은 스타를 배출한 학교로도 유명하다. 가수 나훈아, 방송인 이경규, 음악감독 박칼린이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음식 이름에 ‘동네 명칭’이 붙은 ‘초량돼지갈비골목’, 건물은 없고 그 흔적만 남아 있는 부산지역 최초의 근대적 창고인 ‘남선창고’ 얘기도 재미있다. 초량 주민의 물 전쟁, 초량돼지갈비집 J 씨의 장사 수완, 어느 사할린 여성의 텍사스촌 취업기 등 다양한 에피소드도 전한다.
‘예술정원 산보하기’에서는 복원된 초량천을 중심으로 조성된 ‘예술 정원’을 안내한다. 예술 정원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다양한 매체(설치, 빛과 소리, 영상 등)를 활용해 초량의 생태와 역사, 주민들의 자취를 작품으로 표현해 놓았는데, 저자는 이를 소개한다.
저자는 “이제는 흐르는 물줄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초량천 본류를 거쳐 부산항이 자리 잡은 바다 쪽으로 걷다 보면, 기능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를 지닌 다채로운 초량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