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권력 강화 노린 신참 황제의 선택…“로마인에 원형극장 선물을”

입력 : 2020-12-18 12:54:41 수정 : 2021-02-02 14: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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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문학기행]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이탈리아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규모면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맞먹는 고대 로마 건축의 최고 걸작이다. 지은 지 2000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튼튼하게 남아 있어 누구나 로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랜드마크가 됐다. 해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만 400만~500만 명이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콜로세움은 로마 신참 가문의 고민이 담긴 건축물이다.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근무하던 도중 뜻하지 않게 로마 황제가 된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의 이야기다.




네로 사후 황제 자리 오른 베스파시아누스

‘호모 노부스’ 약점 벗어날 방안 고민하다

시민들 즐기는 검투사경기 전용극장 착안



■신참 황제의 고민


네로 황제가 자살한 뒤 차례로 황제 자리에 올랐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내전에서 살해당하거나 자살했다. 그 덕분에 황제를 전혀 꿈꾸지 않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야말로 덩굴째 호박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동방과 아프리카, 도나우 지역에 파견돼 있던 모든 로마 군단이 지지했고, 원로원이 황제로 추대한 결과였다.

로마 북부 팔라크리네에서 세금 징수원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베스파시아누스는 사람이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에서는 아첨을 일삼지만 언제 배신해 등에 칼을 꽂을지 알 수 없는 게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지방의 하급 집안에서 태어난 호모 노부스(신참)였기 때문에 귀족으로 가득 찬 원로원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쉽지 않았다.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금세 누군가 등을 떠밀어 절벽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등극한 뒤 원로원에 여러 가지를 양보했다.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었던 그는 늘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한 태도를 지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이후 생애를 마칠 때까지 늘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친구의 솔직한 충고, 변호인의 빈정대는 말, 철학자의 반항적인 말도 너그럽게 받아넘겼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도 전한다. 그는 우연히 견유파 철학자 데메트리우스를 접견하게 됐다. 데메트리우스는 황제에게 인사하기는커녕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고개도 들지 않았고, 계속 엉뚱한 소리만 지껄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야말로 개로구나.”

신참 가문이 황제 자리를 대대로 유지하려면 평범한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베스파시아누스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취임하자마자 여러 가지 공공사업을 벌였다. 내전 중에 소실된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복원했고. 도로를 정비하고 공공건물도 연이어 건설했다. 물론 공사비는 속주 총독 시절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을 팔아 만든 사비로 충당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네로가 짓던 황금궁전 부지 사들여 착공

유대 전쟁 전리품으로 공사비 전액 충당

큰 아들이 준공, 둘째아들이 지하시설 확충


■로마 시민에게 즐거움을


베스파시아누스는 검투사경기나 축제 등에 직접 참여해 평민과 함께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 있는 키르쿠스 막시무스나 로마 외곽 바티카누스(바티칸)의 네로 전차경기장에서 열리는 전차경주나 검투사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시민들이 매우 불편하게 여기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대부분 경기장은 로마 시내 바깥에 있어 오가기가 불편했다. 게다가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장방형이어서 길쭉한 모양이었기 때문에 검투사경기를 거행하기에는 매우 불편한 구조였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했을 무렵 로마인은 석재로 튼튼하게 만들어 검투사경기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대형 원형극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점을 간파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머리에 떠오른 기억이 하나 더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유업이었다. 제정 시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즉위 이후 많은 토목, 건축 공사를 시행했다. 동물사냥을 무척 좋아해서 동물 3500마리를 한꺼번에 죽이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머리에는 로마 한복판에 도시 규모에 걸맞은 원형극장을 건설하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꿈을 실천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원로원에서 거행한 즉위 인사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유업을 이어받겠다고 선언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도시 한복판에 석재 원형극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로 짓는다는 게 목표였다.

목적은 간단했고, 명분은 확실했다. 시민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황제에 대한 지지도를 높여 정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원형극장 건설은 아우구스투스의 오래된 유업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명분은 모든 로마인이 듣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이런 생각은 기록에 남아 있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 이렇게 적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했다. 평화의 신전, 클라우디우스 신전 건설은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소중히 여겼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계획, 바로 로마 한복판에 원형극장을 짓는 일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원형극장을 짓기 위한 땅을 찾다 팔라티노 언덕과 포로 로마노 근처에 있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를 떠올렸다. 원래 이곳은 서민들이 살던 주거지였지만 서기 64년 로마를 휩쓴 대화재 때 잿더미로 변했다. 네로는 이곳의 땅을 헐값으로 사들였다. 이 때문에 ‘네로 황제가 땅을 싸게 매입하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네로는 황금궁전을 짓기 시작했지만 에스파냐에서 총독 갈바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쫓겨 자살하는 바람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원형극장 건설 부지로 황금궁전을 선택한 데에는 정치적 이유가 숨어 있었다. 그는 ‘네로가 궁전을 짓는다며 반강제적으로 빼앗은 땅을 다시 로마인에게 돌려준다. 네로는 재산을 갈취하며 로마인을 괴롭힌 폭군이지만, 나는 그런 네로를 응징하고 로마인의 한을 풀어주는 성군’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베스파시아누스는 황금궁전과 인근 땅을 모두 사들여 70~72년 사이 공사를 시작했다. 원형극장을 세운 곳은 정확하게 황금궁전에 있던 인공 호수 위였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69년이었으니 불과 1~3년 만에 공사에 들어간 셈이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 설계를 그렇게 짧은 기간에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미 아우구스투스 시대나 그 이후에 설계도는 완성돼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원형극장 건설비는 황제 즉위 직전 치른 유대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콜로세움 인근에서 발견된 명문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전리품을 바탕으로 새 원형극장을 짓도록 명령했다.’

로마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새 경기장 건설을 환영했다. 시내 한복판에서 수시로 편안하게 검투사경기를 보게 됐다며 원형극장이 서둘러 완공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원형극장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 그는 건물이 3층까지 올라갔을 무렵인 79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공사를 완성한 이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큰아들 티투스였다. 그는 아버지가 숨진 이듬해 원형극장을 완공했다. 공사에 8~10년 정도가 걸렸으니 당시 건축 기술과 건물 크기를 고려하면 상당히 빨리 지은 셈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검투사, 동물 등이 이동하는 지하 공간인 히포지움을 추가했다. 당시 원형극장 준공을 본 로마인들은 ‘이제 더 이상 로마에는 대형 건물을 세울 필요가 없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동상 콜로서스 네로니스에서 이름 유래해

신분 따라 나눠 앉은 관중석 5만~8만 석

타원형 경기장 아레나에는 15cm 모래 깔아


■네로 황제의 동상과 콜로세움


콜로세움이 개장했을 때 이름은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이었다.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라는 뜻이다. 테아트룸은 ‘극장’이고 암피는 ‘둘’ 또는 ‘양쪽’이라는 의미다. 플라비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가문의 성인 플라비우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일부에서는 암피테아트룸 카이사레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카이사레움은 카이사르를 뜻했다. 당시에는 황제를 카이사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부르는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11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 원형극장 앞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대형 동상 콜로서스 네로니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네로 동상은 구리로 만든 것이었는데, 높이가 무려 30m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콜로서스 네로니스는 고대 7대 불가사의로 불린 그리스 로도스 섬의 거상인 로도스 콜로서스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결국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로도스 거상에서 나온 셈이다. 콜로서스가 거대하다는 뜻이니 콜로세움은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의미가 된다.

콘크리트, 대리석, 각종 석재를 사용해 건설한 콜로세움은 긴 쪽이 188m, 짧은 쪽이 156m, 높이는 57m였다. 경기가 벌어지는 무대인 아레나는 긴 쪽이 87m, 짧은 쪽이 55m였다. 관중석 높이는 56m에 이르렀다.

콜로세움을 기독교도가 순교한 성소로 생각한 옛날 기독교 신도 사이에서는 콜로세움을 설계한 건축가가 기독교도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 일부에서는 티투스가 예루살렘에서 노예로 끌고 온 유대인 2만~6만여 명을 공사에 동원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 있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콜로세움은 총 4층이었다. 바깥에서 볼 때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층마다 변화를 주었다. 1~3층은 각종 조각상이 세워진 아치형 구조로 만들었다. 1층에는 도리아식 기둥, 2층에는 이오니아식 기둥, 3층에는 코린트식 기둥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4층에는 코린트식 벽기둥과 직사각형 창문을 설치했다.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아치형 출입구는 무려 80개여서 행사가 끝난 뒤 아주 빠른 시간에 모든 관람객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출입구 중 두 개는 검투사 전용이었는데, 하나는 죽음의 신의 이름을 딴 포르타 리비티나였다. 경기 도중 목숨을 잃은 검투사가 실려 나가는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검투사는 포르타 사니비바리아로 걸어 나갔다.

콜로세움 관중석은 모두 5만 석이었다. 좌석이 4만 5000석, 입석이 5000석이었다. 관중석이 8만 석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다. 황제와 원로원 의원이 관람하는 공간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안전을 위해 주위에 높은 차단벽을 세웠다. 다른 관중석은 부자용, 중산층용, 노예와 외국인용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꼭대기 층에는 입석이 만들어져 있었다. 주로 가난한 사람이나 여성이 사용하는 관람석이었다. 천장에는 관람객을 햇빛에서 보호하기 위해 천으로 만든 가리개를 달았다.

경기장인 타원형 아레나 바닥에는 15㎝ 두께로 모래를 깔았다. 아레나 주변에는 관중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담벼락을 세웠다.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때로는 빨갛게 염색한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부드러운 모래를 라틴어로 하레나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아레나라는 이름이 나왔다. 오늘날 경기장을 뜻하는 아레나의 어원이다. 경기에 출장하는 검투사의 출신 지역에 따라 이국적 분위기를 내려고 아레나 주변을 나무나 바위로 장식하기도 했다. 지하에는 동물을 실어 나르기 위한 승강기 설비를 설치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사에 사용된 석재 표면에 숫자가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그 석재가 어느 지방에서 생산됐는지를 알려주는 숫자다. 로마인이 돌 하나를 쌓더라도 얼마나 관리를 철저히 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나무 재질 많이 사용해 화재에 절대 취약

번개로 큰 피해 입어 240년에 새로 건설


■새로 지은 콜로세움


지금 우리가 로마에 가면 볼 수 있는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가 만든 원래의 원형극장이 아니다.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콜로세움은 수시로 화재에 시달렸다. 전체적인 구조는 석재였지만 지하공간과 아레나, 관중석 지붕 등은 모두 나무였기 때문에 화재에 취약했던 것이었다. 나무에 불이 붙으면 대리석 등 석재의 화학적 성질을 변화시켜 붕괴시킬 정도로 화염이 뜨겁고 거셌다.

처음에는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땜질보수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217년 최상층부 관중석을 때린 번개로 불이 났을 때에는 상황이 달랐다. 불이 얼마나 거셌던지 로마에 있는 7개 소방 회사 직원은 물론 카스트라 미세나티움 해군기지에 있던 선원까지 모두 불을 끄러 달려와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불길을 잡지 못해 콜로세움은 겨우 뼈대만 남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아예 없애 버리든지, 아니면 새로 지어야 할 형편이었다.

이곳에서는 도저히 검투사경기를 치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검투사경기에 미치다시피 한 로마인을 생각할 때 행사를 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후 5년 동안 검투사경기는 마르스 평원에 있던 스타디움 도미티아나(도미티아누스 경기장)에서 거행해야 했다. 오늘날 나보나 광장이 바로 그곳이다.

원형극장을 완전히 새로 짓는 데에는 30년 이상이 걸렸다. 재건축을 시작한 황제는 203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니었다. 그의 아들인 코모두스가 죽고 발생한 내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고 집권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처조카였던 엘라가발루스였다. 시리아의 제사장 출신이었던 그가 황제로 취임한 뒤 얻은 공식이름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였다.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새 원형극장 봉헌식은 222년 엘라가발루스의 사촌동생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열렸다. 당시 공사가 끝난 상태는 아니었지만 원형극장에서 검투사경기를 열어 달라는 시민 요구가 빗발쳐 할 수 없이 서둘러 임시 개장한 것이었다.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240년 고르디아누스 3세 때였다. 당시 발행한 동전에 완공 사실이 담겨 있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성대한 개선식을 열고 싶어 했다. 승리를 축하하는 검투사경기와 동물사냥을 새로 개장한 원형극장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행사에는 코끼리 32마리, 엘크 사슴 10마리, 호랑이 10마리, 사자 60마리, 표범 30마리, 하이에나와 곰, 기린 10마리, 물개 6마리, 코뿔소 1마리 등이 동원됐고, 검투사는 2000명이 출전했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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