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령 푸에르토리코가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로 인해 괴멸적 타격을 입었을 때 일화다. 고립된 주민들은 식량과 음료수, 연료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당시 뉴올리언스에 정박해 있던 노르웨이 선적 그린피스 선박이 구호품을 운반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외국적 선박의 국내 운항을 금지하는 존스법에 발목이 잡혔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존스법이 미국 해운업을 보호하고 있다’는 고집을 피우며 버텼지만 재난 상황이 심각해지자 사상 초유의 ‘10일 면제’ 조치를 발동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열흘 만에 컨테이너 53개에 물자를 싣고 푸에르토리코에 기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도주의 활동조차 보호무역의 규제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1920년 제정된 존스법은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의 정수로 꼽힌다.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인이 소유하고, 미국인 승무원이 일하는 선박만 미국 내 항구를 오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자유무역에 반하는 이 보호 조치가 104년간 이어지면서 조선과 해운 분야는 경쟁이 없는 시장으로 전락했고 조선업은 쇠퇴했다. 미국은 상선은 고사하고 군함조차 건조와 유지·보수·정비(MRO, Maintenance, Repair and Overhaul) 분야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윤석열 대통령에게 조선 분야에 협조를 요청한 까닭이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면서 징벌적 관세와 강한 달러를 밀어붙일 참이다. 경제 전쟁 중인 중국뿐만 아니라 동맹인 한국과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무역주의를 거스르는 과잉 보호 탓에 조선·해운산업이 몰락한 교훈을 잊었나? 미국발 무역전쟁 광풍에 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커져만 가고 있다.
■ 과보호가 빚은 경쟁력 상실
존스법은 ‘연안무역법’(Merchant Marine Act) 제27조를 지칭한다. 미국 내 해상 운송 권한을 미국 선박에 한정하는 규제다. 당초 전쟁이나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선박 건조 능력과 필수 인력을 유지하려는 취지로 도입됐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고비용과 경쟁력 저하의 악순환에 빠져들면서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항구와 내륙 수로에서 시장 경쟁이 사라지자 선박 운송료의 고삐가 풀렸다. 화주들은 저렴한 도로와 철도 수송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화물 수요가 줄어들자 해운업계는 신규 선박 발주를 하지 않게 되고 조선업계는 일감이 줄어 쇠락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상업용 선박이 4만 척 있지만 55%가 미시시피강에서만 운항하는 바지선이다. 2010년 이후 건조된 선박 10척 중 9척이 바지선과 예인선이었을 정도로 편중돼 있다. 1000t 이상 원양 선박은 노후화 탓에 2000년 이후 193척에서 99척으로 감소했다. 미국 컨테이너선 4척 중 3척이 20년 이상, 65%는 30년 이상 노후된 선박이다. 미국에서 대형 선박 건조가 줄어든 것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느린 공정 탓이다. 미국 싱크탱크 카토(CATO)는 2017년 <존스법 : 미국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부담> 보고서에서 미국 내 피더선 건조 비용이 1억 9000만~2억 5000만 달러(우리 돈 2660억~3500억 원)인 반면, 한국, 중국 등에서는 3000만 달러(우리 돈 420억 원)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카토 보고서는 가동 중인 124곳의 조선소 중 군함, 잠수함, 원양 화물선, 시추 장비 등 중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중대형 조선소는 22곳에 불과하다면서 한국과 일본, 중국이 제각각 1000~2000곳씩 보유하고 있는 것에 비교했다.
존스법은 군함의 건조와 정비에 차질을 준 것에서 나아가 군사 기동력까지 약화시켰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군은 군수 물자 수송을 외국적 상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책임자인 한 장성은 의회에 출석해 “외국 선박의 지원 없이 존스법을 따르는 미국 선박만 투입했다면 수송에만 3개월이 더 걸렸을 것”이라며 존스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 밀주업자와 침례교회 동맹
미국 조선·해운업계는 고정된 국내의 상선 및 군함 수요를 독점하기 때문에 최소 이익이 보장된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해외로 수출하는 미국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외국적 선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조선·해운업계의 취약성이 가중되는 구조다. 전 세계 선박 건조는 중국과 한국이 주도하고 있는데, 올해 10월까지 점유율에서 중국이 65%, 한국이 26%를 차지했다. 미국 조선산업의 점유율은 0.1% 수준으로 의미가 없어진 상태다.
자유무역주의 전도사였던 미국이 과잉 보호를 고집한 결과는 참담하다. 하지만 조선·해운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존스법은 여전히 건재하다. 비효율·고비용을 이유로 폐지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번번이 국익을 앞세운 규제론에 밀린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상황을 두고 ‘밀주업자와 침례교회’ 이론까지 등장한다. 이해가 엇갈리는 집단에 의해 금주법이 지탱된 데 대한 비유다. 검은 돈을 벌게 되는 밀주업자와 도덕적 권위를 얻는 복음주의 교회. 대척점에 선 두 집단이 금주법을 지킨 아이러니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카토 보고서는 외부 경쟁자가 퇴출된 뒤 업계와 규제 기관, 정치인들끼리 기득권이 공고화됐다고 분석한다. 미 의회 16개 위원회와 6개 연방 기관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얽혀 존스법을 관리·감독하면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 후퇴 모르는 보호주의
현재 미국 해군은 노후화에다 유지·보수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존스법에 의거 수리를 하려면 미 본토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일이 소요되고 현지 조선소의 비용과 기술도 한계에 다다랐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지만 보호주의는 요지부동이다. 존스법을 완화하거나 폐지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대신 동맹국을 끌어들여 해결하는 임시방편이 동원된다. 한국과 일본 민간 조선소에까지 미 해군 함정 MRO를 맡기는 식이다. 경남 거제의 한화오션 등이 속속 미국 MRO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조선업 수주에 청신호이긴 하나 미국 정부가 자국 조선소와 일자리 보호를 핑계로 언제 돌변할지 몰라 안심할 수만은 없다. 취임 전부터 벌써 이차전지 보조금 폐지론을 흘려 한국 기업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약속했던 반도체 보조금도 마찬가지. ‘트럼프 2.0’ 행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를 핑계로 과거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 대처해야 한다.
■ 무역전쟁 불가피… 불확실성 커져
‘트럼프 2.0’ 행정부는 강경 보호무역주의를 공언하고 있다. 미국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징벌적 고율 관세를 무기로 삼겠다는 식이다. 선거 유세 때 국내 산업 보호와 해외에 뺏긴 일자리 회복을 위해 모든 수입품에 10~20% 관세를 매기겠다고 공약했다. 특히 중국에는 60% 관세를 물리겠다고 엄포를 놨다. 관세 부담을 안겨 생산 거점을 미국으로 옮기게끔 강제한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적 관세 장벽에 중국과 유럽은 보복할 것이고, 따라서 전 세계적인 무역전쟁은 불가피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무역전쟁이 발생하면 2026년까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1.3% 감소할 것으로 경고했다.
하지만 휘발유 세금을 올리면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에게 부담이 돌아가는 것처럼 관세 장벽의 부메랑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관세 전쟁의 효과 분석을 보면 결국 자국 기업과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과 콜롬비아대, 프린스턴대가 공동으로 발표한 <2018년 무역전쟁이 미국 물가와 복지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고율 관세로 정부 세수가 늘긴 했지만 오른 세금만큼 제품 가격이 인상됐다. 결국 그 부담은 미국 기업과 소비자들에 고스란히 전가됐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와 관료 중 고율 관세 정책의 효율성에 찬성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트럼프 2.0’ 행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을 태세다. 이미 첫 번째 임기 때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 돌연 탈퇴한 전력이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까지 탈퇴하는 초강수를 둘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자유무역주의를 무시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전면화할 것이다. 모순 덩어리인 존스법이 조선·해운업을 몰락시키고도 100년 넘게 건재하는 것처럼 미국은 스스로의 경쟁력을 무너뜨릴 보호주의 깃발을 내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무역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벌써 전운이 감돈다. 미군 MRO 수주로 한국 조선업에 ‘반짝 호황’이 올 수는 있겠으나 나머지 산업 전반의 기상도는 흐림 일색이다. 수출 주도로 경제 성장을 일군 한국 경제 앞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장기 불확실성 시대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한국은 비상한 각오와 대비책이 필요하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