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타도!” 46년 만에 다시 거리에 선 백발의 청춘들

입력 : 2025-11-14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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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 초반에 광장에 나섰다가 46년 만에 백발이 성성한 상태로 동지들을 다시 만나니 감개무량합니다.” 지난 7일 10·16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관련 5개 단체가 힘을 합쳐서 개최한 부마항쟁 유적지 답사 행사에 나선 한 참가자의 소감이었다. 부마민주항쟁에 참가해 온갖 고초를 겪었던 관련자 50여 명이 전국에서 모여서 유적지를 답사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어떤 분들일지 궁금했다. 부산에 살면서도 그동안 부마민주항쟁을 잘 몰랐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을 간직한 채 답사 행사에 동행했다.


부마민주항쟁 주역들과 윤일현 금정구청장 등 금정구청 관계자들이 부마민주항쟁로 동판 앞에서 이날의 출발을 선언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주역들과 윤일현 금정구청장 등 금정구청 관계자들이 부마민주항쟁로 동판 앞에서 이날의 출발을 선언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주역들이 속속 부산대 정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10·16부마민주항쟁로'를 알리는 도로 바닥의 동판에는 ‘꺼지지 않는 민주의 횃불’이란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의 박상도 이사장이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박 이사장은 “오늘 동지들을 만나서 너무 반갑다. 이제 우리 나이가 거의 70이 넘어가는 상황이 되었는데, 건강 조심하고 자주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더 노력하겠다”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박 이사장은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이자 5·18민주유공자로 양서협동조합 이사, 24대 부산YMCA 이사장 등을 지냈다.


부마민주항쟁로 바닥에 새겨진 동판. 부마민주항쟁로 바닥에 새겨진 동판.

이날 답사는 부마민주항쟁 주역들을 맞이하러 나온 윤일현 금정구청장 등 금정구청 관계자들의 안내로 부마민주항쟁로 걷기로 시작했다. 부마민주항쟁로는 금정구청이 2023년 9월 부산대 정문에서 부산도시철도 부산대역까지 440m 구간을 명예 도로로 지정하며 만들어졌다. 학생 시위대가 부산대 정문 옆 사대부고 담벼락을 허물고 시내로 진출했던 자리에는 지난해 말 상징물을 조성했다. 벽에 새겨진 부마민주항쟁 당시 사진들은 부산대에서 시작된 시위가 시민들의 참여로 순식간에 들불처럼 퍼진 역사를 말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학생 시위대가 부산대학교 정문 옆 사대부고 담벼락을 허물고 시내로 진출했던 자리에는 부마민주항쟁로 상징물이 만들어 졌다. 학생 시위대가 부산대학교 정문 옆 사대부고 담벼락을 허물고 시내로 진출했던 자리에는 부마민주항쟁로 상징물이 만들어 졌다.

부산대 안으로 들어가 먼저 지난해 4월에 문을 연 ‘부산대 역사관’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모두 부산대 학생인 이진걸 씨의 ‘민주 선언문’, 신재식 씨의 ‘민주투쟁선언문’, 정광민 씨의 선언문 등 부마민주항쟁 선언문 3종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들 선언문은 각각 유신정권의 폭압을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의지를 표명했다. 1979년 10월 15일 공대생 이 씨와 법대생 신 씨는 별도의 선언문을 뿌리면서 호소하지만, 학생들이 뒤늦게 모여들며 실패하고 만다. 다음날인 16일 경제학과에 다니던 정 씨가 선언문을 뿌리며 호소하자 학생들이 동조해 시위대가 수천 명까지 불어나 부마민주항쟁의 불이 붙은 것이다.


10·16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정광민 이사장이 부산대 역사관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0·16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정광민 이사장이 부산대 역사관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날의 시위 주동자가 오늘의 10·16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정광민 이사장이다. 정 이사장은 당시 사진을 가리키며 “화폐금융론 수업을 기다리던 경제학과 2학년 학생들에게 싸우자고 외쳤더니 50여 명이 모두 나와서 동참해 주었다. 이게 결정적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였다”라고 말했다. 경제학과 학생들이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도서관까지 300m를 행진하자 학생들 숫자가 점차 불어나 부산대 전체가 확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정 이사장은 그해 10월 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50일간 복역했다. 이듬해 5·18이 나면서 신군부의 예비 검속에 걸려 다시 복역했다. 부마민주항쟁 시발점이 된 옛 상대 건물터에 지난해 설치된 부마민주항쟁 발상지 표지석을 보고는 다들 감회가 새로워지는 표정이었다.


부마 민중 항쟁을 기념하는 최초의 기념물인 ‘10·16부마민중항쟁탑’. 부마 민중 항쟁을 기념하는 최초의 기념물인 ‘10·16부마민중항쟁탑’.

주역들은 다음 장소인 부산대 새벽벌도서관 앞 10·16부마민중항쟁탑으로 향했다. 1988년에 건립된 부산 최초의 부마항쟁 기념물이자, 전국에서 유일한 부마항쟁 관련 탑이다. 정 이사장은 “이 탑은 대학 당국이 부마항쟁에 대해서 소극적일 때 총학생회가 자발적으로 모금을 해서 만들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형상도 부산대 미대 학생이 디자인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탑에는 역시 부산대 학생들이 작사 작곡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시월에 서서’ 노래 가사가 새겨져 있다. ‘동지여 전진하자/깨치고 나가자/뜨거운 가슴으로/빛나는 내일로’로 끝맺음하는 가사 시구는 백발의 청년들 피를 여전히 끓게 만들었다. 부마항쟁탑이 있는 곳은 ‘민주 언덕’이 되어 있었다.


신영복 선생이 글을 쓴 부마민주항쟁 발원 표지석. 신영복 선생이 글을 쓴 부마민주항쟁 발원 표지석.

부산대에서의 마지막 답사로 옛 도서관 앞 표지석을 찾았다. 부마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해 1999년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유신 철폐 독재 타도’라는 당시의 구호가 새겨져 있다. 표지석은 이곳이 초기 시위대가 집결해서 더 많은 학생의 참여를 끌어내며 항쟁의 규모를 키운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수천 명의 부산대 학생들이 민주화 시위를 시작했던 대운동장 입구는 ‘시월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6월 항쟁의 구호였던 ‘호헌 철폐 독재 타도’도 여기서 유래됐던 것 같다. 부산에 이만한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이 또 있을까 싶었다.

오전 행사인 부산대 답사를 마친 뒤 동아대 구덕캠퍼스에 가기 전에 점심 식사를 위해 전세버스로 자갈치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서울에서 온 노승일 씨(전 부마민주항쟁 부산동지회 회장)는 “부마항쟁은 오직 민주화를 위해 하나의 정신으로 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니까 관련 단체를 자꾸 만드는 점이 안타깝다. 그때의 의미로 돌아가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고, 하나로 뭉쳐서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창원에서 참가한 부마민주항쟁 기념사업회 이창곤 회장도 “뜻이 뭉치면 길도 하나가 된다. 오늘 이 자리가 동지들이 하나의 길로 모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부마민주항쟁 주역들이 동아대 구덕캠퍼스 옛 도서관 앞에 섰다. 부마민주항쟁 주역들이 동아대 구덕캠퍼스 옛 도서관 앞에 섰다.

오후가 되어 버스는 동아대 구덕캠퍼스에 도착했다. 구덕캠퍼스는 동아대병원과 의대 위주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이 자리에 있었던 법대와 문리대는 하단캠퍼스를 거쳐 다시 부민캠퍼스로 이전했다. 부마재단 이동관 이사를 따라 구덕캠퍼스를 한 바퀴 돌면서 답사에 나섰다. 그는 당시 법학과 3학년으로 동아대 항쟁의 주역이었다.

이 이사는 “10월 17일 도서관 앞 잔디밭에 학생들을 모았다. 오전에 200명 수준이던 학생들의 숫자는 오후가 되면서 1500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경찰이 교문 밖으로 못 나가게 막아서 6시에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인근 경남고 담이 좀 낮은 곳을 부숴서 통로를 만들어 그쪽으로 빠져나갔다”라고 말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는 17일 시위 분위기에 대해 ‘동아대 학생들로 인해 도심의 학생 수는 더욱 불어났고, 국제시장과 광복동으로 학생 청년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시위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동아대는 부마민주항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부산대와는 달리 기념비는커녕 표식조차 없었다.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인 2019년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측에서 동아대 구덕캠퍼스에 상징 조형물 건립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부마민주항쟁 주역들은 아쉬움을 간직한 채 동아대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16일까지 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부마민주항쟁 기념기획전’에 출품된 곽영화 작가의 그림. 16일까지 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부마민주항쟁 기념기획전’에 출품된 곽영화 작가의 그림.

애초 다음 목적지는 시민 항쟁이 시작된 옛 부영극장 앞과 광복동이었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박상도 이사장의 긴급 제안으로 행선지가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곳에서 16일까지 열리고 있는 부마민주항쟁 기념 기획전을 꼭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고등학생 시절 부마민주항쟁을 직접 목격했다는 곽영화 작가의 그림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박 이사장은 “곽 작가가 부마항쟁 격전지를 답사하고, 시위하는 감정에 몰입해서 날짜와 시간별로 상상해 그림을 그려 감동적이어서 관련자들은 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옥상열 씨는 남포 파출소에 돌을 던지고 방화한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옥상열 씨는 남포 파출소에 돌을 던지고 방화한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참가자 가운데 옥상열 씨는 특히 남포파출소를 그린 그림 앞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는 남포 파출소에 돌을 던지고 방화한 범인으로 몰려 150일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참가자 중에는 재봉사 일을 하면서 부마항쟁에 참가했다가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삶이 망가진 제정화 씨도 있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이들의 희생 위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부산대 록밴드 ‘해모수’가 부마민주항쟁 기념 공연을 펼치고 있다. 부산대 록밴드 ‘해모수’가 부마민주항쟁 기념 공연을 펼치고 있다.

행사는 부산대 앞으로 돌아와 부산대 록밴드 ‘해모수’ 공연 관람으로 마무리됐다. 해모수 싱어 심정원 씨(컴퓨터 공학과 2학년)는 “그동안 잘 몰랐던 부마항쟁에 대해 공연을 준비하면서 찾아봤다. 선배님들 덕분에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아갈 수 있게된 데 대해 감사드린다. 이제는 저희가 이어받아서 더 멋진 나라로 만들어 나가겠다”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정광민 이사장은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아직 제대로 된 다큐조차 나오지 않아서 아쉽다. 이제는 ‘변호인’처럼 부마민주항쟁을 다룬 영화가 나올 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 땅에 민주화의 싹을 틔운 부마민주항쟁이 발행한 지 46년이 지났으니, 탐스러운 열매가 매달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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