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사랑하는 <부산일보> 독자를 극장으로 초대하는 ‘BNK부산은행과 함께하는 부일시네마’(이하 부일시네마) 10번째 상영회가 호평 속에 마무리됐다.
25일 오후 7시 부산 중구 신창동 ‘모퉁이극장’에 모인 약 60명의 관객은 2023년 별세한 영화 음악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를 기리는 작품인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2023)를 단체 관람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시네필이라면 모를 수 없는 영화 음악계 거장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로 제3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영화 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브라이언 드 팔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상일 등 거장 감독들의 영화 음악을 작곡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마지막 황제’(1988)로 아시아인 최초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2014년 암 진단을 받은 그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괴물’(2023)을 유작으로 남긴 채 2023년 별세했다. ‘괴물’ 결말부에 삽입된 아름다운 선율의 피아노 연주곡이 바로 사카모토의 작품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고인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라이브 공연을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에서 사카모토는 ‘마지막 사랑’(1990), ‘팜므 파탈’(2002),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등 다수의 영화에 삽입된 20곡을 103분 동안 연주한다. 화면에는 오로지 연주자와 피아노만 등장하고, 음악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흑백으로 연출했다.
평소 고인이 ‘일본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곳’이라 여긴 NHK 509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이 피아노 독주는 8일에 걸쳐 촬영했다. 흑백 화면 속 사카모토의 손은 쭈글쭈글하고 볼품 없어 보이지만, 손놀림에선 생기와 활력이 느껴졌다.
사카모토의 곡은 대체로 템포가 느리고 서정적인 감성이 강해 섬세한 세기 조절이 핵심이다. 투병으로 임종을 앞둔 사람이 연주하기에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거장의 감각은 육신의 노쇠와 병약함으로도 무뎌지지 않았다. 사카모토가 손끝으로 빚어낸 멜로디는 너무나 처연하고 애절했다. 어떤 곡들은 그 아름다운 선율과 기막힌 완급 조절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날 모퉁이극장 상영관의 오디오 시스템도 감동을 배가하는 데 한몫했다. 이곳 상영관엔 미국 QSC와 독일 HK오디오 등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디오 전문 브랜드 스피커 총 10대가 사방에 배치됐다. 여기에 19HZ의 초저역까지 구현하는 최대 800W 출력의 QSC 시네마 서브우퍼가 저음을 담당한다. 72석 규모의 비교적 작은 상영관에서 듣기엔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덕분에 사카모토가 야마하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됐다.
이날 영화 상영 이후엔 관객끼리 감상을 공유하는 시간인 ‘커뮤니티 시네마’가 진행됐다. 모더레이터로 초청된 김지윤 음악칼럼니스트가 자연스러운 소통을 유도하자 관객들은 용기를 내 각자 소감을 밝혔다.
먼저 한 관객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사카모토의 음악을 듣고 견뎌 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게 무슨 느낌일까’ 생각해봤다”면서 “영화를 보니 사카모토가 ‘개구리 왕눈이’ 같은 손가락으로 연주를 하는데 마치 갈비뼈 안쪽을 툭툭 건드리는 것 같은 뭉글뭉글한 느낌이 들어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관객은 “사카모토의 음악만 들었고 실제 생김새는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알게 됐다”며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도 눈이 초롱초롱한 모습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의 눈은 저렇구나’ 싶었다”고 했다.
‘부일시네마’ 참여가 처음이라는 한 관객은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너무 슬펐다. 너무 우울했고 고독한 영화였다. 제가 봤던 영화 중 가장 슬펐다”며 “지금도 그 감정이 여전 남아 있다”고 말했다.
자신을 사카모토의 팬이라고 밝힌 한 관객은 “부일시네마에 당첨돼서 매우 기뻤다”면서 “피아노에 검은 건반과 하얀 건반이 있듯이 영화도 흑백으로 진행됐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 영화 자체가 피아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 밖에도 “100분을 연주만으로 채우는데도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인상 깊었다” “ 좋아하는 곡이 마지막에 연주돼서 좋았다”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해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영화를 계기로 조금 더 많이 알게 됐다” “사카모토의 인생 한 편을 쭉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 다양한 감상 평이 이어졌다.
극장에서 감상한 것이 특히 좋았다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한 관객은 “건반에 손가락이 닿을 때의 느낌을 영화관에서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또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봤다는 관객은 “한동안 사카모토에 푹 빠져서 유튜브로 음악을 듣고 다녔다”며 “그런데 그때 유튜브로는 느낄 수 없었던 건반의 진동이나 연주자의 호흡까지 느낄 수 있어서 뜻깊었다”고 말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다는 사카모토의 팬 역시 “이 영화를 작년 마지막 날에 보고 이제 두 번째로 본다”며 “사카모토의 숨소리나 건반을 밟는 소리, 피아노 해머가 내려가는 소리까지 다 들려 영화관 전체가 하나의 음악 공연장 같았다”고 설명했다.
관객들의 소감을 모두 들은 김 칼럼니스트는 “저는 한국 음악을 전공했다 보니 음양오행에 빗대 나름의 해석을 해보고 싶다”며 “음양오행에서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나이는 겨울이다. 겨울은 색으로 보면 검정인데, 공교롭게도 이 영화가 흑백”이라고 말했다.
이어 “굉장히 화려하게 살았던 젊은 시절 경력에 비해 이 영화는 정말 미니멀하다”며 “혼자 조용히 연주하는 그 모습에서 저는 중용의 미를 느꼈다. 조용한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는 것을 가리키는 ‘정중동’(靜中動)의 미, 절제의 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김 칼럼니스트는 인상 깊은 소감을 남긴 관객 5명을 선정해 소소한 경품도 지급했다.
한편, 부일시네마는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 오후 7시 모퉁이극장에서 열린다. 부산닷컴(busan.com) 문화 이벤트 공간인 ‘해피존플러스’(hzplus.busan.com)를 통해 이벤트 참여를 신청하면 매달 추첨을 통해 영화관람권(1인 2장)을 증정한다. 다음 상영회가 열리는 3월 25일에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독립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2024)가 스크린에 오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