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세상 선물하러 나왔다"

■케이팝 응원봉 걸스/ 희주, 일석, 구구
탄핵 광장서 만난 K팝 여성 팬 6인 인터뷰
아이돌 응원봉 들고 노래 떼창 한 이유 담아
나이·직업 달라도 '좋은 나라 만들자' 공감
계엄 선포·탄핵 정국 속 민주주의 지킨 주역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2025-12-07 09:00:00


지난해 부산 부산진구 서면 쥬디스태화백화점 일원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촉구 행사에 응원봉을 들고 온 시민 모습. 부산일보DB 지난해 부산 부산진구 서면 쥬디스태화백화점 일원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촉구 행사에 응원봉을 들고 온 시민 모습. 부산일보DB

2024년 12월 3일 평온했던 대한민국 일상을 깬 계엄 선포와 내란 주범 윤석열 탄핵 선고까지 4개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한편으로 유난히 뜨거웠다. 강추위에 맞서 광장에 모였고, 시민의 뜨거운 열정은 마침내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전 세계는 아이돌 응원봉을 쥐고 케이팝 노래를 떼창하는 대한민국의 시위에 놀라움을 표현했다. 특히 2030 여성 청년들은 남태령에 갇힌 농민들 곁을 밤새워 지켰고, 폭설에도 은박 비닐을 쓴 채 자리를 지킨 주축들이다.

<케이팝 응원봉 걸스>는 이 책을 쓴 3명의 저자가 만든 팀 이름이자 탄핵 정국 응원봉을 들고 광장을 지킨 여성들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오랜 친구 사이였던 저자들의 공통점은 일명 ‘빠순이’로 불리는 케이팝 열성팬들이다. 희주 씨는 평생 아이돌을 사랑해 왔고, 팬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 <환상통>을 쓴 작가이다. 일석 씨는 케이팝 관련 뉴스레터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발행하며 케이팝과 아이돌 관련 글을 여러 매체에 쓰기도 했다. 구구 씨는 덕질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여성단체활동가이자 독서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세 사람은 아이돌 응원봉을 가지고 나온 이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아이돌 덕질에 진심인 저자들은 광장에서 만난 이들과 케이팝, 팬덤, 응원봉, 정치를 넘나들며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그걸 이 책에 담았다.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 등장한 아이돌 응원봉 모습. 클레이하우스 제공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 등장한 아이돌 응원봉 모습. 클레이하우스 제공

인터뷰에 응한 6명이 광장에 나온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나이도 직업도 아이돌 덕질 경력도 다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세상을 선물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광장에서 유행한 가장 유명한 밈은 “해찬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줄게”였다. 여기서 해찬은 최정상 인기 그룹인 NCT의 멤버 이름이다. 이 문장은 각자 자신의 최애 이름에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 줄게’라는 식으로 변주되며 광장의 대표 문구가 되었다.

자신이 사는 도시의 모든 인쇄소에 연락해 2시간 만에 ‘네오문화기술연구소’의 깃발을 들고 나타난 해련. NCT 멤버들이 팀 구호를 외칠 때 만드는 손 모양이 들어간 이 깃발은 광장에 모인 시즈니(NCT 팬을 뜻하는 말)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계기가 됐다. 해련은 사랑을 담보로 팬들을 지배하려는 엔터사와 싸우며 아이돌 팬은 자연스럽게 ‘특전사’가 되었단다. 덕질 노하우와 엔터 특전사의 전투력은 이번 시위에서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여러 그룹의 팬이지만 일부러 걸그룹 응원봉을 챙긴 유원. 걸그룹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발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고 싶었다. 굉장히 날씬해야 하고 춤을 잘 추며 동시에 완벽한 라이브까지 요구받는 걸그룹. 그들은 어쩌면 편견에 갇힌 소수자인 것 같았다. 그런데 광장 무대에선 소수자에게 박수를 보내주는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신간 <케이팝 응원봉 걸스> 책 표지. 클레이하우스 제공 신간 <케이팝 응원봉 걸스> 책 표지. 클레이하우스 제공

민중가요 ‘불나비’부터 샤이니 키의 ‘가솔린’까지 통달한 숨눈. 숨눈이 응원봉을 들고 나선 건 혼자 시위에 나가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샤이니 응원봉을 들고 나가는 것만으로 나랑 연결되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고, 현장에서 만난 팬들을 통해 안전망이 생긴 것 같았다. 더불어 연예인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호의적이지 못한 분위기였지만, 언제나 당당하게 나섰던 종현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집회에 참여한다는 말도 했다.

삶에 정치와 덕질 두 가지를 모두 품고 사는 젤리는 진한 연대감을 느낀 부산의 응원봉 팬걸의 만남을 감동적으로 전한다. 윤석열 정부가 길고양이 중성화사업을 외면하며 길고양이가 넘쳐났고, 고양이를 기르는 집사로서 분노도 그를 집회로 이끈 동력 중 하나이다.

집회에 참여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팝콘은 케이팝 문화가 있는 이번 시위가 편안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핫팩, 방석, 담요를 챙기고 공개방송에 들어가기 위해 오랜 시간 대기했던 경험은 광장 집회에 참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케이팝인데 세상이 이래서야 케이팝이 제대로 될 리가 없으니, 집회에 열심히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보수 정당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할아버지와 대화가 되지 않았다는 콩알. 추운 날씨에 광장을 계속 지키는 콩알을 보며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탄핵 후 진행한 대선에서 콩알이 지지하는 후보를 믿어본다고 했다.

‘빠순이’의 정체성이 ‘응원봉 동지’로 확장되며 이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품어주지 못한 소수자를 걱정하고 위급했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함께 지켜냈다. 희주·일석·구구 지음/클레이하우스/324쪽/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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