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9월 1일(양력 10월 5일), 조선 수군은 부산포를 공격했다. 전라도 해남에 주둔하던 전라우수군까지 먼 바닷길을 거쳐 참전했다. 조선 수군이 본거지를 멀리 떠나 남해안을 따라 일본군의 핵심 거점인 부산포까지 진격했다는 점에서, 부산포해전은 매우 담대하고 전략적인 대규모 원정작전이었다.
부산포에는 일본 함선 약 470척이 정박해 있었다. 조선 수군은 함선과 육상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뚫고 적선 100여 척을 깨뜨리고 불태웠다. 전라좌·우수군이 주력을 이뤘고 경상우수사 원균도 남은 함선을 이끌고 참전했다.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책이 생기기 전이었지만,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사실상 지휘하여 대승을 이끌었다.
부산포해전을 되돌아보면, 자연스럽게 이순신이 7년 전쟁에서 남긴 전공과 군사적 혁신을 생각하게 된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순신은 자신이 참전한 해전에서 적선 700여 척을 격파하는 세계 해전사에서도 보기 드문 전공을 세웠다.
필자의 사료 고증과 군사공학적 분석에 따르면, 부산포해전에도 투입된 거북선은 적진으로 돌진해 대형을 교란하고, 견고한 덮개로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초근접 함포 사격의 명중률을 극대화한 장갑형 돌격함이었다. 세계 해전사에서도 주목할 군사혁신이자 16세기 해전의 ‘게임체인저’였다.
이러한 이순신의 전공과 군사혁신을 세계 해전사의 시야에서 바라보면 200여 년 뒤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떠오른다. 시대와 전쟁의 조건이 달라 두 사람의 우열을 단순히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순신이 서방 세계에 알려지던 일제강점기, 일부 해외 군사사가와 해군 인사들은 그의 전공과 지휘 능력을 넬슨에 비견하거나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오늘날 해외에서도 이순신은 만화와 짧은 영상 등을 통해 간헐적으로 소개되지만, 주로 영웅적 일화나 신화적 서사에 머물러 있다. 영미권 주류 해전사 학계에는 사료 고증과 과학적 검증에 기초한 영문 전문서와 연구가 부족하고, 국내 연구 성과도 언어의 장벽을 넘어 충분히 확산되지 못했다. 이러한 학술적 공백으로 인해 이순신은 그 역사적 성취에 걸맞은 조명과 평가를 아직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
대중적 인지도와 학문적 평가는 다르다. 역사적 인물의 세계사적 위상은 명성이 아니라 검증된 연구의 축적과 학계의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 세워진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러한 학술적 공백을 메우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K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 이순신과 거북선도 세계 해전사의 공론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순신의 세계화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료 고증과 과학적 검증에 기초한 연구 성과를 세계 학계와 공유하고, 그 역사적 성취에 걸맞은 자리에 올려놓는 일이다.
부산포해전 승전일, 세계 해전사에서 이순신이 차지해야 할 진정한 자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이순신을 흔히 ‘한국의 넬슨’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언젠가 세계인이 넬슨을 ‘영국의 이순신’이라 부르는 날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