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윤경 칼럼] 누가 사법 신뢰를 무너뜨리나
사법부를 향한 정부와 여당의 공세가 거세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5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퇴를 공개 요구했다. “대법원장이 그리도 대단하냐, 대통령 위에 있느냐, 국민의 탄핵 대상이 아니냐”라는 거친 언사까지 동원하면서다. 민주당이 추진 중인 내란특별재판부에 대해서도 “조희대의 정치적 편향성과 지귀연의 침대 축구가 불러온 자업자득”이라고 날을 세웠다.
여권 내 강경파들의 맹공은 대법원이 민주당의 사법개혁 속도전에 우려를 표명한 가운데 나왔다. 대법원은 12일 전국법원장회의를 열고 “사법 독립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며 대법관 증원, 법관 평가 등에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사법제도 개편은 국민과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폭넓은 논의와 숙의 및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여권의 대법원장 사퇴 요구는 대법원의 반발에 대한 반격의 성격이 강하지만 앞서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삼권 서열’ 발언을 한 게 기름을 부은 측면도 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에는 권력의 서열이 분명히 있다. 최고 권력은 국민, 그리고 직접 선출 권력, 간접 선출 권력”이라고 서열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내란특별재판부, 그게 왜 위헌인가. 사법부 구조는 사법부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입법부 권한이다”고 못 박았다.
이 대통령 발언은 견제와 균형이란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의 취지를 잘못 이해한 위헌적 측면이 있다는 법조계의 우려가 뒤따랐다. 법을 만드는 사람, 법을 집행하는 사람과 법에 따라 심판하는 사람을 분리하는 게 삼권분립의 정신이자 법치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우리 헌법은 권력은 오로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지만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입법·행정·사법의 서열을 매기지 않는다. 국민주권조차 절대적이지 않으며 ‘다수결의 한계’까지 받아들인 결과가 삼권분립이라는 게 법학자들의 해석이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민주당에 국회 다수 의석을 몰아줬지만 위임한 권한이 사법부까지 좌지우지하라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법권 독립의 본령은 법과 양심에 따른 법관의 공정한 재판을 의미하지만 이를 위한 법관 구성과 조직상의 독립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내란특별재판부에 대한 위헌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다. 사건은 재판부에 무작위로 배당되며, 내란 재판부도 그에 따라 사건을 배당받았다. 법원의 정당성은 그 무작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조 대법원장도 지 부장판사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게 사법권 독립이다.
대법관 증원도 마찬가지다. 증원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시기와 방법을 둘러싼 사법권 독립 침해 우려가 본질이다. 국민의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를 두텁게 보호하기 위한 대법관 증원 요구는 법원 내에서도 꾸준히 제기된 사안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하급심 강화, 대법원 전원합의체 기능 약화 등 다양한 논란이 뒤따라 근본적 해결책에 대한 숙의가 필요하다. 민주당이 14명인 대법관 수를 26명으로 증원하는 법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베네수엘라 차베스 같은 권위주의 정권의 사법부 장악 시도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사법부 스스로 불신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자기 확신과 고집으로 스스로를 성역화한 높은 담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국민의 삶에서 멀어진 건 아닌지도 돌아봐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정치권이 사법부를 마음대로 흔들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재명 대선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 1·2심 판결이 유·무죄로 엇갈린 것도, 재판이 오랜 기간 지연된 것도, 대법원이 신속하게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것도 모두 재판의 결과다. 특정 판결만 떼어내 편향적이라 공격하는 것 자체가 정략적이다. 대법원장이 대선에 개입한 자업자득이라지만 정치 보복으로 비치는 게 더 문제다. 그 또한 법적 절차를 통해 해소돼야 하는 게 법치다.
특히나 대통령이 대법원장 거취를 압박하는 듯한 인상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여당의 대법원장 사퇴 공세에 공감을 표시했다는 오해가 일자 대통령실이 긴급하게 진화에 나섰지만, 더 신중해야 할 일이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 실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국면에서 우리는 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를 지켜보며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목도했다. 당시 폭동 사태 배후로 지목돼 경찰 수사를 받는 전광훈 목사가 내세운 게 국민저항권이었다.
미국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에 늘 꼽히는 게 군대와 함께 연방대법원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배후에 연방대법원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한 과제의 하나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사법부다. 사법개혁의 방향은 이런 공감대 속에 숙의돼야 한다.
-
[밀물썰물] AI 민족주의와 한글 주권
아페르투스(Apertus)는 챗GPT에 대항해 스위스가 개발한 거대언어모델(LLM) 및 멀티모달 인공지능(AI)이다. 2일 공개된 뒤 전 세계의 관심이 뜨거웠다. 사용해 보니 한국어 문답 능력에 손색이 없다. 앞서 공개된 프랑스의 미스트랄(Mistral)도 마찬가지다. 중국계 LLM이라면 딥시크(DeepSeek)가 떠오르지만, 사용자 저변이 넓은 모델은 큐웬(Qwen)이다. 큐웬도 우리말 사용에 불편이 없다. 아랍에미리트도 올해 K2 싱크(Think)를 내놓고 중동·아랍권 밖 전 세계 사용자를 늘리고 있다.
한글이 유창한 외국계 LLM이 쏟아지면서 디지털 세상에 격변이 일고 있다. 문서편집기 MS워드와 검색 포털 구글은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며 전 세계를 장악했지만 한국에서는 독점은커녕 과점조차 이루지 못했다. 아래한글과 네이버·다음이 압도적 점유율로 시장을 지켰기 때문이다. 자국어 데이터 독보성을 지킨 사례가 전 세계에서 유일해서 디지털 세상의 한글 주권 독립에 비유되곤 했다. 한데, LLM이 검색 시장을 급속히 잠식하면서 검색 포털이 예전 같지 않다. AI가 관련된 추가 질문까지 제시하는 친절함을 내세워 국산 포털의 아성을 넘보는 것이다. 디지털 한글 생태계가 변곡점을 만났다.
챗GPT를 만든 오픈AI가 올해 한국 지사를 내면서 “한국 유료 구독자가 미국에 이어 전 세계 2위”라고 밝힌 바 있다. 외국계 AI 도구를 이용하면 한국어 대화 내용이 외국 서버에 쌓인다. 한국형 LLM이 퍼져 한국 서버에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하고 발전하는 AI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하면 기술·데이터 종속은 불가피하다. 세계 각국이 AI 경쟁력을 주권의 개념으로 보는 소버린(Sovereign) AI로 격돌하는 이유다.
IT 강국 한국이 LLM 분야에서 후발 주자가 된 처지가 무참하다. 하지만 추격전이 시작됐다. 네이버, LG, SK 등 대기업까지 참여하는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전 세계 이용자를 겨냥한 AI 모델 개발이 진행 중이다.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12일 “연내 한국형 LLM을 선보이겠다”고 발표했다. 이 모델을 오픈소스로 공개하고 개발자, 이용자 참여를 늘려 궁극적으로 전 세계인이 한국형 LLM을 사용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다.
바야흐로 AI 민족주의(Nationalism, 혹은 국가주의) 시대다.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AI 개발 경쟁에서 2, 3위는 의미가 없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AI 시대 한글 주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
-
[홍순연의 도시 공감] 도시+디자인, 부산다움의 시작
얼마 전 일본 규슈의 작은 도시인 미야자키를 방문한 적이 있다. 미야자키는 부산에서 후쿠오카를 경유하여 일본 국내선을 타고 다시 40분을 가야 도착하는 작은 도시이다. 지역의 건축가들과 함께 도시를 답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특산물인 삼나무로 지은 철도 역사였다. 역사의 주요 구조뿐만 아니라 역 내부에 위치한 자전거 거치대까지 삼나무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지역의 뜨거운 여름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랑 같은 역사의 넓은 공간은 지역 축제를 비롯하여 어린이 집 전시회 등 다양한 지역 활동의 주 무대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의 플랫폼은 기차를 타는 기능 외에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망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치 건축물 하나로 미야자키 전체를 설명하는 듯하였다. 이것이 도시의 경쟁력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계디자인수도 걸맞은 실험 이어져야
다양한 분야 시민참여형 프로젝트 도입
공간의 질과 지역 미래 경쟁력 높여가길
도시의 경쟁력을 경제력이나 인구 규모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는 지난 듯하다. 도시의 경쟁력은 디자인과 공간의 질 그리고 활용에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는 대표적 국제 프로젝트가 바로 세계디자인수도(World Design Capital·WDC)이다. 세계디자인수도는 단순한 도시 미관이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사회·문화·경제적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냈는지에 대한 평가를 통해 선정된다. 그간 헬싱키, 케이프타운, 타이베이, 멕시코시티, 발렌시아, 세종, 상파울루 등이 세계디자인수도의 이름을 거쳐 갔다. 이들 도시는 디자인을 사회 혁신의 도구로 활용했다. 예컨대 2012년 헬싱키는 ‘시민 생활 중심 디자인’을 기치로 내걸며 공공도서관과 공원, 교통 체계를 시민 눈높이에 맞게 개선해 북유럽식 복지 도시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2014년 케이프타운은 남아공 특유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디자인으로 풀어내려는 도전을 시작했다. 불평등한 도시구조 속에서 시민 참여형 거버넌스를 강화하며 ‘디자인이 사회통합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2016년 타이베이는 첨단 ICT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시티 구축과 생활밀착형 공공디자인 확대를 통해 아시아 도시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2018년 멕시코시티는 역사와 문화자산을 보존하면서도 공공공간을 재편해 시민의 일상 경험을 바꿔냈다. 2022년 발렌시아는 해양도시로서 지속 가능한 건축·도시디자인 전략을 내놓으며 유럽 지중해 도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같은 해 세종시는 스마트 행정도시라는 특수성을 기반으로, 시민 참여형 공공디자인 정책을 강화해 한국형 도시디자인 모델을 구축했다. 가장 최근 2024년 선정된 브라질 상파울루는 세계적 대도시의 인프라 문제를 디자인으로 재구성하며 사회적 불평등 개선까지 시도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된 도시들은 핵심 키워드를 기반으로 도시혁신의 실험장이자, 도시의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제 부산이 그 깃발을 이어받았다. 세계디자인수도 선정으로 부산 또한 도시의 정체성과 경쟁력을 새롭게 디자인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핵심 키워드, 지역적 특성, 그리고 시민, 디자이너들의 참여와 역할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해양이라는 핵심 키워드 하나만으로 연결되는 디자인은 무수히 많다. 북항 재개발, 영도 해양관광벨트, 수영만 요트경기장 일대 등 주요 공간별로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해양 친화적 건축은 무엇인지, 친환경 해양 레저 인프라를 위한 방법은 없는지 등이다. 그 외 해양 생태와 공존하는 도시디자인,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해양도시 모델 등 각종 키워드를 연결하는 다양한 디자인 활동들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적 특성을 살린 다양한 디자인이 요구된다. 원도심만 보더라도 과거의 흔적과 쇠퇴가 공존하는 곳이다. 영도·초량·동구 일대는 항만과 철도의 기억을 품고 있지만, 인구 유출과 상권 침체로 활력을 잃고 있다. 역사적 맥락을 보존하고 항만 지역의 역사 문화자원들을 중요한 매개물로 삼아 지역에 새로운 기능을 덧입히는 건축적 재생 전략이 필요하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디자인은 전문가의 영역이지만, 그 결과는 시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부산이 세계디자인수도로서 진정한 성과를 위해 시민참여형 도시디자인 프로젝트가 많았졌으면 한다. 과거 부산에서 이루어진 공공디자인 프로젝트인 ‘광복로의 광복’ ‘미로미로 프로젝트’ ‘산복도로 일번지’처럼 주민과 디자이너들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생활권 단위의 공공건축, 15분 도시, 교통체계, 공공디자인, 해양산업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참여형 프로젝트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부산의 세계디자인수도 선정은 도시의 ‘외형적 치장’이 아니라 도시의 경쟁력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이다. 과거와 현재, 지역과 장소, 시민과 전문가가 함께 엮어내는 디자인 실험을 통해 지속 가능한 도시, 부산다움의 시작점을 제대로 구축하길 기대한다.
-
[오늘을 여는 시] 생의 무게-최휘웅 (1944~)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의 무게는 얼마쯤일까?
솜털처럼 가벼운 그런 중량이었기를 바란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길인데
철 같은 무게를 품고 살았다면 헛된 일이지
그때 너와 헤어지면서 비수를 꽂았다면
그 또한 철부지의 가난한 퍼포먼스였을 뿐이야
그때는 그게 그렇게 억울해서 죽고 싶었는데
그것조차도 저울에 달면 하찮은 무게에 불과하지
한때의 희망과 한때의 절망도 시간 위에서는
투명한 깃털처럼 부유하지 부유하다 떨어지지
새처럼 가볍게 날지 못한다 하더라도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구름처럼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는 꽃잎처럼
무한한 가벼움에 내 마지막 생을 얹고 싶어
시집 〈꿈의 방정식〉 (2024) 중에서
불행은 쉽고 행복은 힘겹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면서 마음을 비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구름처럼 꽃잎처럼 생이 가볍기를 바라는 시인의 회한 앞에서 나는 어떠한가, 하고 서성이게 됩니다.
왜 내 삶의 무게는 이렇게 무거운가. 그러나 누구에게나 내려놓고 싶은 짐이 있을 것입니다. 희망과 절망은 같은 무게. 그래서 매일 매일 잘 살았는지 반성하고 용서하고 다짐하게 됩니다.
내 생의 무게는 내가 결정하는 것. 주어진 삶의 무게를 내 몸처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의 무게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런지요.
거부할 수 없는 상실의 체험 속에서 실존의 가치는 더 드러나겠지만 부드럽고 너그러워진 감정들만이 그 짐의 무게를 줄일 줄 아는 힘이 아닐런지요. 신정민 시인
-
[독자의 눈] 벼랑 끝 자영업 생태계 언제까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겪는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이 위기는 단순한 경제적 충격을 넘어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 문제로 자리 잡았다.
2023년 한해 동안 자영업자의 폐업 신고가 98만 건에 육박했으며, 2025년 1월 기준 자영업자 수는 약 550만 명으로 줄어 감소세를 이어갔다. 고금리·고물가 상황에서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원자재와 인건비 부담이 크게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자영업자 금융권 대출 연체율 또한 12.24%로 금융 리스크가 심각한 수준이며, 자영업자의 40% 이상이 향후 3년 내 폐업을 고려하고 있다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조사 결과도 있었다.
정부는 다각적인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2024년 7월 발표된 ‘소상공인·자영업자 종합대책’은 금융지원과 공공요금 부담 경감, 배달비 지원 등을 포함했다. 2025년 제1차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전기·가스·수도 요금 등 50만 원 상당의 신용 지원과 최대 1000만 원 한도의 비즈플러스카드 발급, 배달·택배비 지원 30만 원 지급 등이 본격화됐다. ‘소상공인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으로 공공요금 지원과 정책자금 상환유예 근거도 명확해졌다. 이로써 자영업자는 공공요금을 직접 지원받거나 요금 차감 방식으로 부담을 덜 수 있으며, 금융부담 완화를 위해 대출 분할 상환 등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정책 효과 체감도가 낮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다. 자영업자는 임대료와 인건비 부담으로 인해 경영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한 디지털 전환 지원, 맞춤형 재기 교육, 부채 구조조정, 지역경제 활성화 전략이 절실하다. 더불어 지속 가능한 자영업 생태계 구축을 위한 법적·제도적 보완책 마련이 요구된다.
김동석·부산진구 부전로
-
[사설] 해양수도 부산의 미래 북항재개발 활성화에 달렸다
부산 북항 1·2단계 재개발이 공정 지체와 사업비 증가에다 투자 유치 부진까지 겹치면서 총체적 난항을 겪고 있다. 북항재개발은 기존 항만 기능에서 해양산업·금융·연구개발(R&D)이 집적된 글로벌 비즈니스 중심지로 도약하는 방향으로 추진되는 국책사업이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1단계는 당초 2027년 사업이 종료될 예정이지만 기한을 맞추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2단계는 사업비 7000억 원이 늘어나면서 사업계획 수립 착수조차 못하고 있다. 공기 지연과 비용 증가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구조다. 북항재개발 부진은 해양수도 부산의 미래 비전의 차질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전면적 구조 진단과 정상화 대책이 시급하다.
해양수산부 부산항북항통합개발추진단에 따르면 북항 1단계 매각 대상 부지 중 35%만 분양을 마친 상태다. 북항의 상징이 될 랜드마크 부지는 공모 유찰이 거듭되고 있고, 명물로 주목되던 노면 전차(트램)는 착공 일정조차 안갯속이다. 도로·항만시설·공원은 부분 완공됐지만 상부 공공 콘텐츠인 해양레포츠콤플렉스, 부산항기념관, 공원대체시설, 유·도선장은 기본구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전문가들은 1단계 사업 기한인 2027년 말까지 마무리되기에는 빠듯하다고 전망한다. 1단계 완공이 늦어지면 총공사비 증가에 따른 투자 유치 차질도 우려된다. 부산의 신성장 동력의 구심점을 기대한 시민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2단계 사업은 첫 삽조차 뜨지 못한 채 난관에 부딪혀 있다. 2022년 2단계 사업 예비타당성조사 이후 사업비가 7000억 원 증가하면서 수익성 지수가 하락한 데 발목이 잡힌 것이다. 2단계 실행 기관인 부산시컨소시엄에는 부산항만공사가 45% 지분을 갖고, 나머지 유관 기관들이 55% 지분으로 참여해야 하는데, 수익성 하락을 이유로 결정이 미뤄져 사업계획까지 순연된 것이다. 이대로라면 2026년 사업계획 수립, 2027년 실시계획 승인 신청 일정이 불투명하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데는 정부의 미흡한 대응이 지목된다. 사업비 증가에 대응한 재정 대책을 외면했고, 컨소시엄 참여 기관 조정에도 한계를 드러냈다.
부산항 북항 현장은 부산이 글로벌 해양수도로 도약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해수부 및 유관 기관·기업의 부산 집적과 북극항로 개척에 따른 시너지 효과로 수도권에 버금가는 해양경제권이 태동하는 산실이기도 하다. 북항재개발 성공에 국토균형발전의 실질적 진전이 있다. 이 사업이 국책사업으로 추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부는 사업비 확보, 기관 조율, 민간 참여 활성화에 실질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부산시는 컨트롤타워로서 사업계획의 현실화, 현장 주도의 실행력을 확보해야 한다. 책임 회피와 조율 실패가 설 자리는 없다. 북항재개발 차질은 곧 해양수도 부산의 좌절이라는 각오로 심기일전해야 할 때다.
-
[사설] 정부와 여당, 대법원장 사퇴 압박 도를 넘었다
집권 여당이 국내 최고의 사법 기관 수장을 향해 공개적으로 사퇴를 압박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조희대 대법원장이 특정 재판에서 편향성을 보여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했다고 주장하며 사퇴를 강력 촉구했다. 여기에 15일 대통령실까지 “원칙적으로 공감한다”며 여당의 대법원장 사퇴 압박에 가세하면서 상황의 심각성은 더 커지고 있다. 여당과 대통령실의 이러한 움직임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사법부 독립과 헌법상 권력 분립 원칙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것으로 단순히 정치 공방을 넘어 사법부 흔들기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을 낳는다. 이는 법관의 독립성과 재판의 독립을 침해하는 명백한 월권행위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를 비롯한 여당 의원들은 ‘내란 수괴 혐의자 윤석열’ 재판 결과를 겨냥하며 대법원장 사퇴는 물론 내란전담재판부 설치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통령실의 태도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특별한 입장은 없다”면서도 “선출 권력인 국회의 요구가 있다면 임명된 권한이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는 모호한 발언으로 사법부 독립 훼손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비록 이후 해명에 나섰으나 행정부가 입법부의 압력을 빌미 삼아 사법부 수장을 공격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는 헌법 수호의 최전선에 서야 할 행정부가 오히려 헌정 질서를 위협하는 꼴이 된 셈이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이런 압박에 대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사건 유죄 판결을 뒤집으려는 중대한 헌법 위반이자 탄핵 사유”라고 비판했다. 개혁신당 또한 “사법부를 길들이는 순간 재판은 정권의 하청으로 전락하고 민주공화국의 원칙과 법치는 무너진다”며 우려를 표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사법부 내부에서조차 이러한 정치권의 압박에 대한 우려와 반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법부 독립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자 국민 기본권 수호의 핵심이며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삼권분립의 핵심 전제이다. 따라서 어떠한 권력도 재판 과정에 개입하거나 특정 판결을 요구할 수 없다.
정부와 여당은 지금이라도 사법부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최우선에 두고 대법원장에 대한 압박이나 강성 발언을 자제해야 한다. 오직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판단해야 할 법관의 직무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것은 법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국힘 등 야권과 사법부 내부에서조차 대통령실의 사퇴 압박은 이재명 대통령의 범죄 재판을 막으려는 시도, 중대한 헌법 위반이자 탄핵 사유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우려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방증한다. 법관들이 외부 압력 없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적 불신을 해소하고 진정한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길임을 정부와 여당은 명심해야 한다.
-
[데스크 칼럼] 내란 세력 척결이라는 '절대 반지'
12·3 비상계엄은 무모한 도박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자신과 측근들의 안위 뿐만 아니라 당시 집권당인 국민의힘의 명운까지 게임판 위에 ‘올인’했다. 도박은 실패했고, 위태로웠던 여야 간 힘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계엄 역풍을 등에 업은 다수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결국 입법에 이어 행정 권력까지 차지했다. 여기에 내란 종식이라는 명분까지 손에 쥐었다. ‘내란 세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엄청난 위압감 앞에서 야당의 어떤 저항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민주당으로서는 그야말로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 반지’가 수중에 떨어진 셈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듯, 막강한 권력을 절제력 있게 행사하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때로는 정권을 떠받치는 핵심 지지층과 충돌을 불사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양립 불가능 지경인 여야 사이에 합의 정치에 대한 희망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국회 시절에 누구보다 강성이었던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초반 통합과 협치를 강조할 때는 상당한 기대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개혁 속도전을 벌이는 최근 여권의 행태를 보면 절대 반지의 위력에 흠뻑 취한 듯하다. 반대는커녕 ‘좀 과하다’는 지적조차 수용할 뜻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개혁 저항 세력으로 찍어 누르려는 고압적인 기류가 팽배하다. 사법부 개혁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법원장들의 주문은 “자업자득”으로 몰아세우고, 왜 바꾸는지 설명이 부족한 정부 조직 개편을 비판하는 공무원에는 “불만이면 퇴사하라”는 날 선 목소리가 날아든다.
내란특별재판부든, 내란전담재판부든 결국 여권이 원하는 판결을 할 수 있는 판사로 바꾸기 위함이라는 본질은 같다. 정치 권력이 판사를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하려는 행위 자체가 사법권 독립 침해이며,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은 상식적이다. 여당 지도부는 이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상고심 선고에서 ‘정치 판결’을 내린 사법부가 독립을 외칠 자격이 있느냐고 비판하지만, 집권당이라면 그런 감정적인 대응이 우리 사법 시스템에 두고두고 미칠 해악을 더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방송통신위원회를 해체하고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를 새로 설치하는 법안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다. 현 이진숙 위원장 ‘찍어내기’ 의도라는 걸 민주당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이 위원장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특정인을 배제하기 위해 정부 조직의 근간을 흔들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내란 척결이라는 깃발 아래서 수단의 적절성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검사의 힘을 남김없이 빼는 게 요체인 검찰 개혁안 또한 복수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진보 성향의 법조인들조차 검찰의 보완수사권마저 사라질 경우 부실 기소와 사건 지체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지만 ‘검찰 없으면 나라가 망하냐’는 냉소적 반응만 넘쳐난다. 1% 정치 검사의 힘을 빼려고 99% 검사를 희생시키고, 사법 서비스의 질을 하락 시킨다면 이걸 개혁이라고 할 수 있나.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검찰에게 빼앗은 대부분의 권한을 넘겨 받는 경찰이 향후 ‘정치 경찰’이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느냐는 것이다.
내란 척결을 앞세워 지방선거 지형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시도도 노골화되고 있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국민의힘 소속 지자체장을 겨냥한 감찰에 나선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수다. 당일 행안부 지시 전 청사 폐쇄를 미리 해 계엄에 동조했다는 것인데, 일단 진위 여부가 명확하지 않고 그 날의 상황과도 맞지 않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계엄 당일 밤에 “계엄에 반대한다. 계엄은 철회돼야 한다”는 입장문을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먼저 발표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박 시장은 사석에서 계엄을 강하게 비판한 기자의 칼럼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물론 여권의 내란 공세가 힘을 받는 건 야당인 국민의힘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계엄 직후 윤 전 대통령과 절연하고, 반성과 쇄신에 나섰다면 내란 척결이 지금처럼 야당을 향한 전가의 보도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탄핵 트라우마’만 되뇌던 국민의힘은 정반대 방향으로 역주행 했고, 지금도 ‘윤 어게인’ 세력과 기묘한 동거를 하면서 내란 동조 정당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매여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절대 반지는 종래에 그 파괴적인 힘을 주체하지 못해 주인을 스스로 자멸케 한다. 첫 탄핵 이후 탄생한 문재인 정부도 임기 초반 80%가 넘는 지지율을 보였지만, 부동산 정책, ‘조국 사태’ 등에서 여론을 무시한 독선적 행태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절대 반지의 어두운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 영화 주인공처럼 스스로 반지의 유혹을 떨쳐내는 길 밖에 없다.
-
[밀물썰물] 네팔의 봄
2010년 12월 17일 20대 튀니지 노점상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중부 소도시 ‘시디 부지드’의 지방정부 청사 앞에서 분신했다. 그의 극단적 선택은 경찰의 모욕적인 단속, 청과물과 노점 설비를 모두 빼앗겨 생계가 막막해진 데에 대한 항의였다. 그가 분신한 뒤 튀니지에서는 높은 실업률, 빈부 격차 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정권퇴진 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튀니지 대통령 일가의 불법적인 재산 축적, 정부 관리들의 부패상을 담은 외교문서도 공개돼 국민 불만이 가득 찼다. 튀니지 대통령이 거센 민중봉기에 2011년 1월 물러나면서 23년 철권통치가 막을 내렸다.
튀니지에서 불붙은 민주화 시위는 이집트, 리비아, 예멘 등으로 확산했고, 수십 년간 군림한 독재자들이 차례로 쫓겨났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불린 민주화 시위는 독재 정치, 경제적 궁핍에 대한 불만, 기득권층의 부패 등 복합적 요인에서 비롯됐다.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아랍권 민중들을 뭉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젊은이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활용해 거리로 모였고, 정보를 빠르게 공유하면서 시위 규모를 키웠다. 이 때문에 아랍의 봄은 ‘SNS 혁명’으로도 불린다.
지난 8일 네팔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해 최소 70여 명이 사망했다. 정부의 SNS 접속 차단 조치로 촉발됐지만, 누적된 경제난과 고위층의 부정부패도 원인이었다. 특히 상류층 자녀들이 SNS에 호화 생활을 과시하면서 또래 세대의 반감이 극에 달했다. Z세대인 네팔의 10, 20대 청년들이 시위를 주도한 이유다. 아시아 최빈국인 네팔의 15~24세 실업률은 20%를 넘는다. 네팔인 220만 명 이상이 해외로 나가 보내오는 돈이 GDP(국내총생산)의 3분의 1에 달한다. 외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SNS로 가족과 소통하고, 상당수 청년이 SNS를 수익 창출 수단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네팔 정부가 지난 5일 SNS를 ‘거짓 정보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차단하자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다행히 네팔의 반정부 시위가 막을 내렸다. 지난 13일 시위대가 지지했던 네팔 최초 여성 대법원장 출신이 임시 총리로 지명됐기 때문이다. 네팔은 의회를 해산하고 내년 3월 조기 총선을 치르기로 했다. 시위는 일단락됐지만, 혼란 수습이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진정한 ‘네팔의 봄’은 올 것인가. ‘아랍의 봄’은 다시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등 혼란을 겪으며 짧게 끝나고 말았다. 네팔은 그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란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
[노트북 단상] '세 개의 벽'에 막힌 부산 블록체인
부산은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6년째 달려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부산은 블록체인 기술을 마음껏 실험할 수 있는 거대한 ‘테스트베드’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동안 부산의 물류·금융·공공안전·관광 등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실증 사업이 진행돼 왔다. 블록체인기술혁신지원센터 설립을 통해 기업 인프라 지원·네트워킹·맞춤형 컨설팅 등을 제공하며 지역·외부 기업의 성장과 기술혁신을 견인한 성과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최근 본보 기획시리즈 ‘블록체인 DNA 심는 첨병들’ 취재차 만난 여러 기업 관계자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던 이유다. 이들은 하나같이 제도적 한계와 인력난, 투자유치의 장벽을 기자에게 토로했다.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부산의 블록체인 산업을 키우기 위해 마련된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가 지역 기업의 확장을 가로막는 경우였다. 특구 내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을 운영 중인 한 회사가 이 점을 지적했다. 특구 사업이 부산에만 묶여 있다 보니 전국 단위의 사업 확장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특구 사업을 2년 실증하고 3년 임시허가까지 연장했지만 ‘부산 한정’ 조건 때문에 다른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보다 불리한 여건에서 경쟁한다”며 “부산에서는 상업용 건물 공실률이 40%를 넘는 상황에서 좋은 물건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이 모든 문제의 뿌리는 제도 미비에 있다. 국회는 토큰증권발행(STO) 법안을 곧 통과시킬 듯 말만 반복하며 업계에 ‘희망고문’만 안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력난은 또 다른 벽이다. 블록체인과 AI, 데이터 전문 인력은 대부분 수도권으로 흡수되고 지방 기업들은 구인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개발과 기획, 영업을 CEO 1인이 챙길 수밖에 없다. 인력 부족은 기술 개발 속도를 늦추고 결국 사업의 성장 잠재력마저 떨어뜨린다.
항만·물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한 업체 관계자는 “인력 확보가 가장 큰 과제다. 부산은 수도권보다 중간급 인력이 훨씬 부족해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가 어렵다”며 “투자 없이 매출만으로 회사를 키우고 있어 인력 확충 속도도 느릴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술을 확보하고도 시장 확장을 위한 자본 유치도 지역 업체들이 넘어야할 허들이다. 사업 초기에는 정부 과제나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버텼지만, 민간 투자로 이어지지 않아 성장 속도가 더디다. “지역에서 기업설명회(IR)를 100번이나 했어도 투자받지 못했다”는 한 CEO의 절규가 이를 잘 보여준다. 결국 기업들은 자체 매출과 제한된 공공 투자에 의존하며 운영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걱정만 할 때는 아니다. 정부와 국회, 지자체가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정책과 지원에 반영할 때 비로소 부산은 성공적인 블록체인 도시로 성장할 수 있다. 이들 벽을 넘어선다면 부산의 블록체인 산업은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잠재력을 충분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
[2030 칼럼] 프랜차이즈에 대한 단상
지난해 밀리언셀러에 등극한 부자가 되는 방법을 다룬 자기계발서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엉뚱하게도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장사와 사업의 차이였다. 세이노의 분석에 따르면, 장사는 지리적 장소를 중심으로 근거리 원내의 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반면 사업은 지리적 장소의 한계를 뛰어넘어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장사는 지리적 장소가 곧 고객과 만나고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영업장소이기 때문에 위치가 중요한 반면 사업은 지리적 장소를 벗어날 수 있다. 요식업을 떠올려보면 프랜차이즈는 ‘사업’이고 동네 음식점은 ‘장사’다. 물론 지리적 장소에 구속되지 않는 프랜차이즈 본사만 사업이고 실질적으로 지리적 장소를 가지고 운영하는 가맹점들은 사업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프랜차이즈 본사 인테리어는 관심 대상이 아니지만 가맹점 매장의 인테리어는 비극적 갈등이 빚어질 만큼 장소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현대국가 정치, 헌법 통해 표준화
비슷한 규범 약속 '가맹 체제' 닮아
미국 ‘갑질’ 민주주의 자체에 위기
본사·직영점 이익 우선시하는 듯
만연한 표준화·규격화·비인간화
자비·용서 없는 무한경쟁만 조장
그의 분석에서 핵심은 물리적 공간성(지리적 장소)의 여부다. 흥미로웠던 이유는 물리적 공간성의 차이가 종교와 정치의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가맹점이 본사 기준에 따라 동일한 품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약속한다는 것이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외국에서도 한국에서 먹는 것처럼 균질한 맛이다. 반면 장사는 편차가 존재한다. 만약 우리 동네에 엄청난 맛집이 있다면 덕분에 근거리 원내 사람들의 복지는 올라갈 것이지만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장사는 탁월성과 유연성을 기대할 수 있지만 위생 불량과 같은 자의적인 횡포도 우려할 수 있는 반면 프랜차이즈는 표준화된 규격의 세계다. 따라서 프랜차이즈가 주는 신뢰는 대단한 맛집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을 보장한다는 안정감이다.
현대사회의 정치는 종교와 같이 민주주의와 헌법을 통해 표준화되었고 이 프랜차이즈는 지리적 장소, 곧 국가에 관계없이 비슷한 법적 규범을 약속하고 임의성을 면한다는 가치를 가진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사업을 주도해온 프랜차이즈 본사 격인 미국이 가맹점들을 상대로 갑질을 하면서 본사와 자신의 직영점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탓에 가맹국들이 부담해야 하는 로열티 지불이 상당히 높아졌다. 또한 갈수록 첨예해지는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은 가맹점의 존속에 위협으로 등장하고 있다. 한편 가맹국들은 프랜차이즈를 재생산하며 자국 내 불평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마치 수도에 본사와 직영점을 두고 지방에 가맹점을 두려 하는 시스템이다.
표준화된 규격의 세계가 위기를 겪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을 다르게 바꿔본다면 물리적 공간성의 배제가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지리적 장소가 필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숨 쉬고 먹고 자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우리 몸이 위치할 공간을 필요로 한다. 정신만을 가지고 사업하는 프랜차이즈 본사와는 다른 것이다. 삶의 직접적인 수행 공간에서 세계는 고정된 규정적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 장소는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사람은 언제나 동일한 값을 산출할 수 없고 표준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기계와 다르다. 프랜차이즈는 기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외를 두지 않고 균일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프랜차이즈 모델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압도적인 기계적 효율성을 통해 사회를 빠르게 발전시키고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어쩌면 장사와 사업의 스케일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공간, 즉 휴먼스케일을 넘어선 규모는 이제 기계의 논리 아래서 사람을 소외시키고 인간의 비인간화를 지향한다. 지리적 한계 너머에 원거리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적 시야는 초고층 빌딩에 올라서 지상을 조망하며 행인들을 점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극단적인 사례는 전쟁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대 첨단화된 전쟁은 원거리에서 버튼만 누르면 미사일이 날아가 적이라고 명명된 아무 일면식이 없는 타인을 공격하고 드론을 띄워 무차별로 폭격한다. 상대는 타격할 점으로 존재할 뿐이며 마주치지 않은 채 살인한다. 물리적 장소의 소거는 인간성이 놓일 공간을 제거한다. 이제 전쟁에는 자비도 연민도 용서도 자리하지 않는다. 기계는 아픔을 모르고 프랜차이즈의 대리인이 된 인간은 주어진 명령 외엔 양심을 가질 수 없는 로봇이 된다. 한 동네에서 카페 바로 옆에 카페를 열고 그 옆에 카페를 또 여는 프랜차이즈의 무한 경쟁 상도덕은 추상적인 자유시장 경쟁뿐 아니라 무한히 희생당하는 산업의 노동 현장과 전쟁의 폭력적 참상에도 놓여있다. 피 흘리는 것은 언제나 서로의 취약한 생명과 삶을 안고 싸우는 인간들이지 프랜차이즈 본사는 아니다.
-
[사설] 미 '투자 수익 90% 내놓으라' 압박, 총력 다해 국익 지켜야
한국과 미국의 관세 후속 협상이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 뉴욕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만나 한국의 대미 투자 방식을 조율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미국 측이 투자처를 정하고, 한국은 ‘현찰’을 납입하는 일방적인 방식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장관은 14일 귀국하면서 “양자 간 협의가 진행 중인 상황”이라며 말을 아꼈지만 협상이 공전을 거듭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미국의 백지 수표식 압박은 한국의 외환 보유고와 경제 규모로 볼 때 수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익이 걸린 문제다. 성급한 타결은 금물이다. ‘윈윈’할 수 있는 방안 도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미 통상 협상에서 미국은 직접 투자 비중을 확대하고, 투자할 곳도 스스로 결정하며, 수익의 최대 90%를 가져가는 일본식 모델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에 ‘백기 투항’한다는 자국 내 비판을 무릅쓰고 5500억 달러(약 765조 원) 투자 협정에 서명했다. 한국은 지난 7월 관세를 25%에서 15%로 인하하고, 3500억 달러(약 485조 원) 대미 투자를 묶어서 합의했다. 이때 한국은 보증을 통한 간접 투자와, 사업성 평가에 기반한 민간 중심 투자 방식을 후속 협상에서 논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국 측이 ‘일본식 수용, 아니면 관세 25%’라는 양자택일을 압박하고 나서면서 협상은 미궁 속에 빠져들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사업을 지정하면 한국은 바로 돈을 내고, 투자금 회수 뒤에는 미국이 이익의 90%를 취하는 방식은 합리성·상호성 결여도 문제지만, 한국이 재정 위기에 빠질 가능성 때문에 수긍하기 어렵다. 3500억 달러는 한국 외환 보유액의 84%, 내년 국가 예산의 72%에 해당한다. 일본처럼 기축 통화국도 아닌 한국이 자칫 외환 위기를 부를 만한 거액을 통제 장치 없이 역외에 내보낼 수는 없다. 이는 보수·진보 정권을 떠나 마찬가지다. 미국은 ‘관세 25%’ 복귀를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 어쩌면 ‘관세 25%’가 바닥이 아닐 수 있다는 각오가 필요한 대목이다.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치밀한 대안을 만들어야 할 때다.
한국은 미국의 몰락한 제조업 부흥을 도울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국가다. 미국은 마스가(MASGA) 프로젝트나 원자력, 반도체, 자동차 분야에서 한국의 도움이 절실하다. 유럽연합(EU), 일본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익 최우선’ 원칙을 천명했다. 그러려면 양국의 국익이 교차하는 균형점을 찾아야지 어느 한쪽이 불리한 관계는 상호 이익에 반한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미 제조업 협력을 카드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국내 기업의 참여 보장과 투자 구조의 다양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통상 주권은 국익 수호의 보루이자, 국가의 신뢰 기반이기도 하다. 국가의 미래 전략을 위해 긴 호흡의 전략적 대응이 절실하다.
-
[사설] 해수부 이전 힘 실은 국힘 대표, 해양수도 의기투합 계기로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와 지도부가 14~15일 1박 2일 일정으로 부산 방문에 나섰다. 장 대표와 김도읍 정책위의장, 정희용 사무총장 등 당 지도부는 14일 가덕신공항 현장을 둘러본 뒤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참배하고, 부산 청년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15일에는 취임 후 첫 현장 최고위원회를 주재하고 해양수산부 임시 청사를 방문한다. 국힘이 지역 최초로 부산에서 현장 최고위를 개최하는 것은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흔들리는 부산·울산·경남(PK) 민심을 다지려는 의도로 보인다. 장 대표가 해수부 이전 등 지역 핵심 현안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지역 민심을 잡고, 보수층 결집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PK 지역을 핵심 지지 기반으로 삼아왔지만, 최근 민심 변화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부산일보〉가 지난 7~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거주 지역의 구청장, 군수가 내년 지방선거에서 다시 선출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에 ‘교체’ 응답이 46.3%, ‘재선출’ 응답은 35.3%에 그쳤다. 부산 16개 구·군 지자체장이 모두 국힘 소속인데 지지자들 사이에 불만이 감지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 대표가 해수부 부산 이전에 힘을 실으며 전략적 행보에 나선 것이다. 장 대표는 처음에는 해수부 이전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이후 “졸속 이전에는 반대하지만, 해수부를 유관기관과 함께 이전해 해양수도를 구축해야 한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해수부 이전은 이재명 정부의 대표 공약이자 내년 지방선거에서 부산 표심을 좌우할 최대 현안으로 꼽힌다. 민주당은 연말까지 해수부 이전을 완료하겠다며 ‘속도전’을 강조하고 있고, 국힘은 해수부 특별법에 해수부 기능과 위상, 해양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까지 담아야 한다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연말까지 해수부 청사만 옮겨온다고 해서 이전이 완전히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입법화를 비롯해 해수부 기능 강화, 국내 최대 해운선사 HMM 이전, 동남권투자공사 설립, 해사법원 설립 등 처리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 모든 과제가 성공적으로 달성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해양수도 부산이 완성된다.
부산이 해양수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여야 정치권이 힘을 모아야 한다. 3대 특검법 합의 파기 여파로 여야 대치 국면이 우려되지만, 해수부 이전에 대해서는 결코 불협화음을 내서는 안 된다. 전재수 해수부 장관도 지난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새 정부 출범 100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올해는 해수부 부산 이전과 안착에 중점을 두겠다”며 “해수부 기능 강화와 역할 확대는 관계 부처 간 협의를 통해 조정해 나가겠다”고 했다. 여기에 장동혁 대표 등 국힘 지도부의 해수부 이전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지지가 이어져 시너지 효과를 낸다면, 해양수도 부산은 멀지 않아 이뤄질 것이다. 여야가 부디 의기투합의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
[편집국에서] 가을, 맥주,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
롯데 자이언츠의 올 시즌 가을야구를 의심하지 않았던 6월 어느 날, 8년 전 부산일보 지면에 보도된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기사를 찾아봤다. 정규리그 막바지 4위 롯데 자이언츠와 3위 NC 다이노스의 순위 다툼이 한창이었다. 팬들은 와일드카드전 대신 3위로 준플레이오프전을 치르기 바랐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롯데는 당시 정규 리그를 3위로 마쳐 준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그해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전에서 NC 다이노스와 5경기를 치르며 2승 3패로 아쉽게 탈락했다.
8년 전 신문을 찾아보며 올해는 잘하면 한국시리즈 진출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올 시즌 전반기 롯데는 예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전반기 롯데는 47승 39패 3무, 승률 0.528로, 정규리그 3위에 올라 중위권 경쟁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전반기 롯데의 팀 타율은 0.280으로, 리그 1위를 찍으며 ‘공포의 소총부대’로 불렸다.
주장 전준우의 타율은 4월 0.284에서 6월 0.322까지 상승하며 팀 공격을 이끌었고, 빅터 레이예스는 리그 최다 안타로 팀 득점에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다.
마운드에서는 김원중이 안정적으로 뒷문을 책임졌으며 복귀한 최준용은 필승조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알렉 감보아는 6월에만 5승 무패, 평균자책점 1.72로 KBO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며 선발진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무엇보다 황성빈, 윤동희 등 주전 선수들의 부상 공백을 신예들이 든든하게 채웠다. 장두성, 김동혁, 한승현, 이호준 등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팬들은 ‘마트료시카 야구’라는 애칭까지 붙여줬다. 롯데의 취약점이자 강팀의 조건인 선수층 뎁스가 강화됐다는 평가마저 나왔다.
팀이 지고 있더라도 끝까지 따라붙어 기어이 경기를 뒤집는 폭발력, 몸에 공을 맞고도 박수를 치고 진루하는 젊은 선수들의 패기, 펜스에 몸이 부딪히는 것을 겁내지 않고 공을 쫓는 집요함…. 롯데는 지난 시즌과 완전히 다른 팀이었다.
하지만 외국인 투수 터커 데이비슨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승리를 챙긴 8월 6일 이후, 롯데는 악몽같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10승 투수를 시즌 후반 교체하는 승부수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후반기 투수 교체는 롯데의 목표가 ‘가을야구를 넘어 한국시리즈’라는 것을 공표한 것이었다.
비장한 목표가 선수들에게 부담으로 느껴졌을까? 이후 롯데는 충격의 12연패 늪에 빠졌다. ‘타격 좋은 팀은 투수 좋은 팀보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롯데 타선이 얼어붙어 급기야 8월에는 1할대까지 떨어졌고, 팀 순위도 6위로 추락했다.
여기에 롯데가 야심 차게 영입한 벨라스케즈는 6경기 24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10.50, 1승 4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내고 있다. 13일 선발 경기서 5실점 후 1이닝도 못 채우고 내려갔을 때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나올 정도다. 토종 에이스 박세웅은 불안하고, 홍민기와 이민석 등 전반기 활약했던 투수들도 부진에 시달렸으며 안정적인 클로저 김원중마저도 종종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어이없는 수비 실책이 더해지며 한때 가을야구 희망은 고사하고 하위권 추락을 걱정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롯데는 올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을까? 요즘은 매 경기마다 일희일비하게 된다. 최근 5연패를 가까스로 탈출한 롯데는 13일 오랜만에 살아난 타격으로 SSG를 12-11로 이기면서 5위로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끝까지 가슴을 졸이며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불안과 희망, 둘 다 놓을 수 없는 팬들의 심정은 역설적으로 사직야구장의 만원 기록을 낳고 있다. 올 시즌 롯데 사직구장에는 144만 명이 넘는 이들이 찾아 구단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으며, 최근 홈 경기는 연일 관중이 가득하다. 연애 고수의 ‘밀당’처럼 롯데의 들쑥날쑥한 경기력이 팬들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올 시즌 롯데 경기 중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많다. 펜스 위쪽으로 날아가는 공을 끝까지 쫓아가며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김동혁의 의지가 만든 슈퍼캐치, 4시간 13분의 혈투 끝에 연장 11회 말에 나온 이호준의 짜릿한 끝내기 안타, 견제구에 맞아 피를 토하면서도 2루를 향해 몸을 던진 장두성, 시속 157km를 찍은 좌완 알렉 감보아의 역대급 강속구, 6점차로 패색이 짙었던 경기를 12대 7로 뒤집으며 대역전극을 펼쳤던 6월 12일 kt위즈전….
올 시즌 최종 성적이 어떻게 마감되든지, 그 순간의 짜릿함과 뭉클함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고,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을 주문 걸듯 되뇌며, 남은 롯데 경기를 지켜볼 것이다. 가을야구 희망을 안고, 혹시나 모를 울화병 진정을 위해 맥주와 함께.
-
[밀물썰물] 지하댐의 힘
안정적인 물 공급은 도시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물이 부족하거나 오염되면 주민들은 생활용수 부족에 허덕인다. 공장은 시설 가동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농사와 가축 사육도 타격을 받는다. 즉, 물 부족은 도시 기능 마비로 이어진다. 도시 이미지와 지역 경제 추락도 불가피하다. 특히 최근 극한 가뭄이 덮친 강원도 강릉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기한 제한 급수 등의 상황은 재난 상황에 대비, 도시 물 공급 방식을 다원화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강릉의 이번 물 부족 사태도 강수량 감소로 주 취수원인 오봉댐 저수량이 한계 상황에 도달했지만 이를 보완할 뾰족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촉발됐다.
하지만 강릉에 이웃한 속초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기후 여건은 비슷하지만 물 부족 현상을 전혀 겪지 않고 있다. 속초도 예전엔 만성적 물 부족 때문에 갈수기마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2021년 지하댐이 완공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속초 지하댐은 쌍천 지하 26m 지점에 높이 7.7m, 길이 1.1km의 지하 차수벽을 만드는 방식으로 건설됐다. 최대 60만t의 식수를 저장하면서 하루 최대 1만 2500t을 공급할 수 있다. 취수원이 지표수와 지하수로 이원화되면서 물 공급을 안정화했다는 평가다.
강릉 극한 가뭄 사태를 계기로 지하댐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지하댐이란 땅속에 물막이 벽을 만들어 지하수를 모은 뒤 생활용수 및 농업용수 등으로 사용한다. 지상댐에 익숙한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그러나 현재 사우디아라비아가 사막 지하에 댐을 만들어 도시에 용수를 공급하는 등 세계 50여 나라가 건설한 지하댐 형태의 저수시설은 1200여 개에 달한다. 지하댐은 증발로 인한 물 손실이 거의 없는 데다 해당 지역을 수몰시키지 않아 환경 파괴, 주민 이주 등의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다. 모래와 자갈층의 여과 작용으로 수질이 깨끗해 정수 비용이 적게 든다는 등의 장점도 있다. 반면 유지 관리비가 높고 지하수 오염 땐 정화도 어렵다는 점은 단점으로 꼽힌다.
현재 국내엔 1984년 농어촌공사가 경북 상주에 첫 지하댐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6개의 지하댐이 운영 중이다. 경남 통영 욕지도 등 10여 곳에 지하댐 설치가 추진되고 있다. 기후 위기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괴물 산불에 이어 극한 가뭄까지 우리를 위협한다. 예상치 못한 기후변화에 따른 물 부족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면 지하댐 등 수원 다원화 방안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