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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지역엔 이자 낮게 하겠다", 현장 기업들 체감 닿아야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지난 22일 부산 남구 BNK부산은행 본점에서 열린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지방 우대 금융 간담회’에서 ‘지방 우대 금융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현재 40%가량인 정책금융의 지역 공급 비중을 2028년까지 45%로 늘리는 것이 골자다. 내년부터 산업은행, 기업은행,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등 4개 정책금융기관에 ‘지방 금융 공급 확대 목표제’를 신설해 연간 정책금융 자금을 125조 원까지 확대한다는 것이다. 또 지역에 이자를 더 낮추고 한도는 높이는 지방 전용 대출·보증 상품을 만든다고 한다. 금융 자원의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한다는 점에선 바람직하다.
실제로 수도권 집중에 따른 자본의 쏠림 현상은 심각하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금융권의 수도권 대출 비중은 2020년 61.4%, 2021년 61.8%, 2022년 62.3%, 2023년 62.6%, 2024년 63%로 매년 확대되고 있다. 지방에 대한 전체 기업 대출(36.6%), 벤처 투자(24.7%), 정책금융기관의 자금 공급(40.0%) 비중은 지방의 인구(49.4%)나 지역내총생산(GRDP·47.6%)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금융이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미래 산업 육성이라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수도권 쏠림에 일조했다고 여겨질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지역 기업들을 지원하겠다고 늘 말하지만, 현장에선 이를 쉽사리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은 23일 기재위 국정감사에서 한국은행 부산본부장에게 부산 중소기업 자금 지원의 실효성 제고 방안을 질의했다. 국감에 따르면 한은 부산본부는 7579억 원 규모의 중소기업 지원 자금을 운용하고 있지만, 2014년 이후 한 차례도 한도를 올리지 않았다. 부산 지역 금융·경제 규모가 지난 10년간 급격히 커졌고,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하면 중기 지원 자금의 지역경제 지원 효과가 낮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은 부산본부는 지역경제에 기여도가 높은 산업과 성장 잠재력이 높은 중소기업에 자금을 적극적으로 공급해야 할 것이다. 중소기업 지원 자금의 효율적 운영과 한도 조정 등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
지역 기업들은 글로벌 통상 전쟁에 따른 공급망 불안정, 원자재 단가 상승, 수출 가격 경쟁력 약화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정책금융 기관들은 지역 기업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기업들이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서 살아남고 경쟁력을 키울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기업들이 뿌리를 내린 지역의 경제가 탄탄해야 기업 이전은 물론 지역균형발전도 활성화된다. 지역에 대규모 기업 투자유치를 촉진하기 위해 세제 감면, 규제 특례, 재정 지원, 정주 여건 개선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지원하는 ‘기회발전특구’의 취지도 금융이 함께 어우러져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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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우라늄 재처리 권한 확보해야
한국의 우라늄 농축과 고준위 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제한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한미 간의 논의가 급진전되고 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23일 “한국이 아주 강력하게 요청했고, 그게 받아들여졌다”면서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이 곧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이 협정은 핵확산 방지를 이유로 한국이 핵물질을 처리하려면 미국의 사전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원전 26곳에서 배출되는 폐연료는 재활용되지 못한 채 쌓이고 있다. 원전 20기 이상을 운영하는 프랑스, 중국 등은 재처리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국은 ‘원전 강국’을 자부했지만, 핵물질 처리에 족쇄가 채워진 대목은 무참한 노릇이다.
한국은 원전 연료로 사용되는 저농축 우라늄을 전량 수입하고 있다. 우라늄 농축이 금지되어 있고, 폐연료를 재처리해서 연료로 재활용하는 길도 막혀 있는 탓이다. 이는 핵연료주기 기술 개발의 걸림돌이었다. 반면 일본은 1988년 미국의 동의를 얻어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한 결과, 45t 이상의 플루토늄을 분리했다. 따라서 이번 원자력협정 개정으로 재처리 빗장이 해제되면 연료 확보와 재처리 부문에 있어 기술적, 경제적 파급 효과가 작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에너지 자립과 재처리 이후 사용후핵연료 부피 저감, 신형 원자로 기술 개발 등 비경제적 가치와 장기적 전략에 미칠 영향도 크다. K원전의 전환점이라는 의미다.
글로벌 원전 경쟁력을 가진 한국이 ‘우라늄 주권’을 회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장차 환경과 기술력, 경제성뿐만 아니라 국제 외교까지 얽히고설킨 난제들이 수두룩하다. 폐연료 재처리 때 배출되는 고위험 방사성 물질은 환경 오염을 초래한다. 고도의 기술력과 위험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 업체에 재처리를 위탁하고 있다. 같은 이유로 미국은 재처리하지 않고 처분을 선택했다. 또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과 NPT(핵확산금지조약) 준수 등 안보 우려를 해소할 책임도 막중하다.
핵무장 직전의 플루토늄을 확보한 일본은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들어서면서 ‘강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 국방비를 늘리고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을 보인다. 북한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담을 앞두고 극초음속 미사일을 발사하며 도발을 계속한다. 동북아의 핵 안보는 비대칭적 위기 상태다. 이 대목에서 한국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예컨대 부산과 경남에서 개발 중인 소형모듈원전(SMR)은 일반 원전보다 고농축 우라늄을 원료로 쓴다. 한국형 SMR에 적합한 원전 원료를 국산화하면 명실상부한 원전 선진국으로 우뚝 설 수 있다. 핵연료주기 역량 확보는 원전 수출에 있어 주요 신뢰 자산이 된다. 원자력협정 개정은 에너지 안보의 분수령이다. 지나친 낙관과 성급한 결론 대신 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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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철의 사리 분별] 퇴행의 시대, 가장 강력한 의무에 대하여
인류는 법과 관습, 규칙 등 다양한 규율에 근거해 삶을 이어간다. 규율은 지적 체계에 기반한 공동체 가치관을 통해 힘을 얻는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치관은 먼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류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켜온 것들이다.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누리는 자유, 평화, 민주주의, 평등, 다양성, 인도주의, 인권 등은 치열한 노력으로 일궈낸 귀중한 유산인 셈이다. 공동체 가치관의 좋고 나쁨은 그 뿌리를 이루는 지적 체계의 질과 공고함에 비례한다. 지성이 빛을 잃고 무지와 야만에 굴복할 때, 즉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등 병적인 공동체 가치관으로 무장한 개인들이 장악한 집단과 국가가 힘을 얻을 때마다 세계대전 등 인류를 퇴행시키는 암흑의 시대가 어김없이 도래했다.
병든 공동체 가치관이 촉발한 퇴행적 사건들의 부작용은 너무도 치명적이다. 대규모 살육과 문명 기반 파괴 등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더욱이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규모 전쟁 등 인류사적 퇴행은 누적된 퇴행들의 종합적인 귀결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소중한 정신적 유산들이 무너지고 반지성적 행태들이 난립하는 바로 그 순간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더욱이 지적 체계와 공동체 가치관 등의 유산은 보기보다 약하고 작은 충격에도 쉽게 바스러지는 속성을 갖고 있다. 미리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 거대한 퇴행의 물결에 휩쓸려 그동안 이뤄온 소중한 유산을 모두 잃고 야만의 시대를 장기간 감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가. 현재 지구촌이 무척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다는 경고가 도처에서 이어진다.
크고 작은 퇴행의 증거는 너무도 많다. 우선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을 들여다보자.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다시 선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기존 세계질서와 공동체 가치관을 스스럼없이 훼손하고 있다. 인류가 어렵게 구축한 상호주의를 무시하는 일방적 관세 부과, 각종 차별적 발언, 자발적 재산 공개 거부, 기후 위기 조롱 등 민주 사회에서 상상키 어려운 반지성적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남북전쟁 등을 통해 힘들게 구축한 공동체 가치관과도 상반된다. 트럼프 대통령을 거듭 지지한 과반수 미국 국민들은 더 많은 경제 이익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중국 등 후발 경쟁국에 대한 분노적 감정에 굴복한 것인가. 최소한 그들이 타협과 협력을 중시하는 진일보한 지적 공동체를 염원치 않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의 퇴행은 미국이라는 공동체 전반에 걸친 가치관 퇴행의 방증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상호주의에 기반한 ‘탈식민 세계화’라는 인류사적 흐름은 이미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힘에 의한 자국 이익 추구 경향이 노골화하면서 짧은 평화의 시기가 끝났다는 탄식이 이어진다. 영국은 이미 2020년 유럽연합에서 정식 탈퇴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3년째 참혹한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가자지구 갈등은 일상이 되었고, 중국은 대만 침공을 공공연한 목표로 삼고 있다. 북한과 중국, 이란, 러시아 등 이른바 반미축과 미국과 일본 등의 신냉전 갈등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핵무장 경쟁은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대전의 뼈아픈 교훈은 온데간데없다. 한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격한 토론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하더라도 한국 정치권에서는 숙의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조롱과 상대 악마화 등이 판치고 있다. 정치 실종이 일상화하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집단과 개인 이기주의, 편가르기가 심화되는 등 공동체 가치관에 심각한 퇴행이 발생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인류의 불행한 역사가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지적이 거세다. 물론 인류 역사는 짧은 평화와 기나긴 암흑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무지와 야만이 판치는 퇴행이 초래한 참담한 과거와 불행한 삶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인류는 사회적 진화를 거듭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를 사는 인류는 과거에서 전승한 정신적 유산들을 다듬고 발전시켜 미래로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삶이 세대에서 세대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물론 한 세대의 잘못된 선택이 미래 많은 세대의 삶까지 망칠 수 있다는 단순한 섭리부터 깨달아야 한다. 시간이 현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확산될 때 현재의 각종 퇴행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짧은 성장통에 그칠 수 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가치를 지키고 보전하는 것은 물론 희망의 씨앗을 많이 뿌려 후인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욕망에 사로잡힌 불행한 현재를 미래 세대에 떠넘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모든 개인들에 부여된 가장 강력한 의무라는 것을 서둘러 자각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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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쌀, 최고의 가성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조사한 쌀 20kg 소매가격은 10월 22일 기준으로 6만 5756원이다. 이 가격은 대형마트와 전통시장에서 판매하는 가격을 평균한 것이다. 한 가마니 80kg으로 하면 26만 3024원이다.
1년 전과 비교하면 25% 올랐다. 5년 평균가격에 비해선 19% 상승했다. 그런데 10년 전인 2015년 10월 쌀값은 20kg당 4만 3782원이었고 20년 전 쌀값은 오히려 더 높은 4만 5717원이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재화나 상품의 가격은 매년 조금씩 오른다. 경제가 성장기에 있다면 물가상승률이 연 2% 정도 되는 것이 정상적이다.
다만, 쌀값에 대한 생각은 고정돼 있는 것 같다. 20kg짜리 쌀값이 아주 오랜 기간 4만~5만 원 정도에 머무르다보니 ‘쌀은 항상 이 정도 돈을 주고 사먹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언론에서 ‘쌀값 폭등’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서운 속도로 올랐다고 말한다. 식당에서 공깃밥 2000원이 3000원으로 오를 것이라는 예측도 한다.
통상적으로 공깃밥 한 그릇 무게는 200~300g이다. 20kg 쌀로 200~300g짜리 밥공기를 만들면 180~200그릇까지 나온다. 쌀 무게에 물 무게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6만 5000원을 주고 쌀을 사면 200공기는 먹는다는 것이다. 쌀은 필수재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최상의 가성비 식품이 아닐 수 없다. 통상적으로 쌀값이 25% 정도 올랐다고 해도 가계에 부담을 주게 되는 수준은 아니다.
손세희 한돈자조금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농식품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쌀 가격이 올랐다고 뉴스가 많이 되는데 다른 상품의 가격 상승 정도를 보면 별로 오른 것도 아니고, 수확기가 되면 또 내려간다”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년 전 자장면 가격은 평균 4636원이었는데 지금은 7577원이다.
사람들이 쌀값 상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쌀에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직불금과 같은 농민들에 대한 정부 지원, 외국산 쌀 수입 금지, 정부의 쌀 수매 정책 등 때문이다. ‘쌀에 이처럼 많은 지원을 하는데 왜 쌀값이 올라가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쌀도 시장의 수급에 따라 가격이 움직인다. 쌀값에 대해 좀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김덕준 세종취재부장 casiop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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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그림자 노동자'를 위한 생명권
바야흐로 예술의 계절이다. 국정감사의 계절이기도 하다. ‘감사’란 감독하고 조사하는 일, 국가 전반의 잘못을 돌아보고 고치겠다는 반성의 시간이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는 ‘안전’이 핵심 의제로 다뤄지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의지를 밝히면서 정부 각 기관은 물론 기업들까지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그 논의의 지도에는 아직도 비어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공연예술계다. 무대 위의 사고는 계속되는데, 무대 아래의 제도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 뒤편에는 수많은 예술노동자가 낡은 규정 속에서 오늘도 위태롭게 일하고 있다.
지난 8월, 한 공공 공연장에서 무용수 두 명이 리허설 중 무대 앞 오케스트라 피트 아래로 추락했다. 그중 한 명은 뇌출혈과 장기 손상으로 네 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2023년 3월에는 수도권 대형 공연장에서 오페라 리허설 중 400킬로그램이 넘는 무대장치가 성악가를 덮쳤다. 척수신경을 다쳐 사지가 마비된 채 투병을 이어가던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지난 21일 유명을 달리했다. 2018년에는 지방의 한 문화예술회관에서 무대 리프트가 추락해, 스물세 살의 젊은 예술인이 목숨을 잃었다. 시기와 장소는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안전을 비용으로만 여기고, 무대 뒤의 노동과 위험을 ‘외주화’한 구조적 현실 때문이다.
기계가 작동되는 무대 위는 위험한 작업 현장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일어나는 사고는 단순한 부주의가 아니라 익숙함이 만든 무감각의 결과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무용계의 문제를 파악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일은 특정 장르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공연 장르 현장에서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고 있다. 무대 뒤의 안전은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이다.
우리가 참고할 만한 사례는 분명히 있다. 영국은 공연장에서 일어난 사고에도 ‘기업 과실치사법’을 적용한다. 조직적 과실에 대해 법인 자체의 형사 책임을 묻는 제도로, 안전을 ‘관리’가 아닌 ‘책임’의 영역으로 규정한다. 독일은 ‘모범 집회장소 규정’을 통해 공연장 안전을 관리한다. 조명 설치부터 비상구 문 너비까지 ‘산업표준’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무대 장비의 안전성까지 꼼꼼히 규정한다. 공연장은 예술의 공간인 동시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있다.
반면 우리의 현실은 다르다. 예술 현장의 위험을 예술노동자의 운으로 감당하게 한다. 예술 활동을 여전히 개인의 열정에 따른 비경제적 행위로 여기며, 현장 안전을 예산의 여백쯤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 제도를 그대로 옮겨오자는 뜻은 아니다. 우리 실정에 맞게 공연장 시설은 물론, 사각지대에 방치된 예술노동자를 보호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안전 규정이 마련되어야 한다. 공연 계약서에 명시된 보험 가입 의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을 열악한 환경에 놓인 모든 노동자에게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 나아가 제도 밖 현장에 대한 실질적 보완과 지원, 그리고 발주처의 책임 또한 마땅히 중대재해처벌법에 포함되어야 한다.
현재 프리랜서 예술인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의무가입 대상이 아니다. 2022년 기준 예술인 산재보험 신청률은 7.3%에 그쳤다. 저임금 구조 속에서 스스로 보험료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탓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전국 공연장에서 신고된 산재는 모두 48건이었다. 그러나 산재보험 미가입자가 많아 통계에조차 제대로 포함되지 않는다. 2018년 사망사고를 계기로 2022년에 공연법이 일부 개정되었지만, 이는 사고 발생 후 ‘보고 의무’를 강화한 수준에 머물렀다. 법의 취지와 현장의 거리가 이렇게 먼 나라에서, K콘텐츠 산업이 과연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무대 안전은 규제의 영역이 아니라, 이 나라에 사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비정규직이거나 프리랜서 예술인도 우리나라 사람이다. 공연장은 문화시설이자 공공자산이지만, 관리 주체는 부처마다 다르고 감독 권한도 모호하다. 각 기관이 책임을 나누는 사이, 정작 현장 예술가의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보고서마다 반복되는 행정 언어는 ‘말씀 구체화 방안’이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곧 정책이 되고, 장관의 의지가 곧 법이 된다. 그러나 말씀은 구체화되지만, 책임은 구체화되지 않는다.
몸을 지탱하는 힘은 겉으로 드러나는 근육에서 나오지 않는다. 뼈대가 약하면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진다. 예술 현장의 감동 또한 다르지 않다. 안전이라는 견고한 토대 위에서만 온전히 꽃피울 수 있다. 박수는 공연이 끝난 뒤에 울리지만, 안전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울려야 하는 리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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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자연에서 사회로… 도시 공공재로서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노르웨이 오슬로 오페라하우스가 위치한 곳은 과거 항만이었던 비요르비카 지역이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쇠락했던 항구는 2000년대에 이르러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새로운 문화 및 도시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최근 뭉크미술관이 개관했으며, 현대적인 디자인의 다이히만 도서관도 이곳에 있다.
하지만 단연 중심이 되는 건물은 2008년 개관한 오슬로 오페라하우스이다. 설계를 맡은 건축사무소 스노헤타(Snøhetta)는 공연 예술을 위한 공간을 넘어 시민의 일상 속으로 예술을 끌어들이려는 목표를 가지고 디자인했다. 그 결과 건물은 빙하에서 녹은 얼음 조각처럼 흰색 대리석 지붕이 완만한 경사로 뻗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 위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 오페라하우스의 지붕이 도시의 공공 광장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공연을 보지 않아도 시민들은 워터프론트의 연장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해질녘 노을을 즐길 수 있다. 건축이 도시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맞닿게 된 것이다.
오페라하우스 내부는 외관과 대조적으로 따뜻한 목재가 방문객을 맞는다. 하얀 외피와 달리, 내부는 노르웨이산 참나무로 마감되어 있다. 차가운 바다 위의 얼음 같은 외관 속에, 따뜻한 북유럽 스타일의 목조주택이 숨어 있는 셈이다. 특히 천공 벽 패널은 올라프 엘리아슨이 디자인해서 화제가 되었다. 외부와 내부의 이 대비는, 스노헤타가 지향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건물의 외피는 대리석과 유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덕분에 남쪽 입면은 내부의 활동이 바깥에서도 보인다. 공연 준비를 하는 무대 뒤의 모습, 리허설 중인 오케스트라의 모습까지 보이는 것이다. 덕분에 관객과 예술가, 무대와 도시의 경계가 흐려진다. 건물은 공연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예술이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는 공연 티켓을 가진 소수의 관객을 위한 건물이 아니라 도시의 공공재로서 ‘모두의 건축’을 지향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는 공공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높이 솟은 기념비 같은 랜드마크가 아니라 모두가 함게 오를 수 있는 언덕으로 시민의 삶과 문화를 담는 도시의 풍경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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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HMM 등 해운 기업 부산 이전, 연내 구체적 계획 나와야
HMM 본사를 비롯한 해운 대기업의 부산 이전 현실화를 위해 민관이 머리를 맞대는 장이 마련됐다. 부산시, 상공계, 학계, 연구·출연기관, 항만 관련 협회 등으로 구성한 ‘해운기업 이전 추진위’가 지난 21일 첫 회의를 가진 것이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양재생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 추진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은 지난 15일 국감에서 연내 해운 대기업 이전 로드맵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부산시는 선제적으로 이전 대책과 지원 방향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추진위를 구성했다고 한다. 정부의 로드맵 공개 전에 이전 기업을 대상으로 지역에서 지원 대책 논의에 나선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회의에서는 해운 대기업의 이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현실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세제·재정 지원, 규제 특례, 정주 여건 개선 등을 제공하는 기회발전특구 지정을 통해 대기업에게 현실적인 혜택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사들 운영비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선박 연료 비용 지원과 대통령 공약인 해운 대기업 이전에 대한 국비 투입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시는 도출된 의견을 토대로 구체적인 이전 로드맵과 이전 대상 기업 직원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시는 해양수산부와의 정책협의회 등을 통해 해운기업 이전 관련 정책·입지·정주 여건 지원 등 핵심 현안을 면밀하게 조율하길 바란다.
그동안 지역에서는 상공계를 중심으로 HMM의 신속한 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다. 부산상의가 지난달 개최한 전재수 장관 초청 간담회에서도 “HMM은 정부 지분이 70% 이상인, 국가대표 국적선사인 만큼 정부의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이전 절차를 추진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다. 부산상의는 7월 HMM 유치를 위한 제도적 지원 기반이 될 ‘글로벌 해운도시 조성 및 발전에 관한 특별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역의 요구와 노력은 타당하다. 입지적 강점을 지닌 부산에 정부의 지원이 주어진다면, HMM 등 해운 기업들이 이전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수부 부산 이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해양산업 생태계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HMM 본사 부산 이전은 해양산업 거점 완성과 국내 대형 해운선사의 부산 집적화를 위한 전환점이 된다. 부산이 명실상부한 해운 물류 중심지로 거듭나고 해양산업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해양수도를 견인하는 구체적 사례로 HMM 본사 부산 이전을 제시한 바 있다. 정부는 HMM을 비롯한 해운 기업의 부산 이전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연내 신속하게 내놓아야 한다. 부산시 등 지역에서도 해운 기업의 수용 태세를 치밀하게 점검해, 해운 기업 집적과 산업적 파급 효과 극대화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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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정부 고위 관료들의 내로남불 부동산 정책 불신만 키운다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이 시행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정책 설계자들의 부동산 보유 실태가 드러나면서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23일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부동산 정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 차관을 비롯해 대통령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의 정부 고위 인사들이 서울 강남의 고가 아파트를 보유하거나 전세·대출을 끼고 갭투자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빚내서 집 사지 말라”고 훈계하던 이들이 정작 자신들은 지렛대를 활용해 시세차익을 챙긴 셈이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정부 고위직의 도덕성 결여보다도 정책의 진정성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점이다. 국민이 느끼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국민을 더 분노케 하는 것은 부동산 정책 주역들이 정작 금지한 수법을 그대로 썼다는 점이다. 이상경 국토교통부 1차관은 “집값이 떨어지면 그때 사면 된다”며 서민들에게 “기다리라”고 했지만, 정작 본인은 부인의 이름으로 판교 아파트를 전세를 끼고 매입해 6억 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얻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서초구 재건축 아파트 입주권으로 수십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었고, 구윤철 부총리와 이억원 금융위원장 역시 강남권 아파트 매입과 재건축 투자를 통해 이익을 챙겼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도 강남 아파트 두 채를 보유하고 있다. 정부 정책 책임자들의 이런 ‘내로남불’ 행태 앞에서 국민이 어떻게 정책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더 뼈아픈 것은 이런 위선이 수도권 중심의 부동산 구조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을 비롯한 지방 부동산 시장은 거래 절벽과 미분양 누적으로 이미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정부 대책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설계된다. 강남 과열을 잡겠다며 규제와 대출 제한을 쏟아붓는 사이, 지방 시장은 고사 위기에 몰렸다. 이런 가운데 정책 설계자들이 강남 아파트로 수억 원의 시세차익을 챙겼다는 사실은 지방민에게 ‘배부른 자들의 자기 놀음’으로 비칠 뿐이다. 수도권 중심의 규제와 세제 정책이 지방의 회복력마저 짓누르는 현실 속에서 이른바 고위 관료들의 이율배반적 움직임은 지역민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준다.
부동산 정책의 진정성은 구호가 아니라 행동으로 입증돼야 한다. 정책 책임자들의 행보 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겨야 한다는 뜻이다. 집값 안정과 서민 주거 안정을 외치면서 자신은 예외로 남겠다는 태도는 정책 신뢰를 무너뜨릴 뿐이다. 정책의 진정성은 내로남불 구조를 깨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 균형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전국을 직시해야 한다. 수도권 과열에만 정책 무게추가 쏠리면 지방은 끝없는 침체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지방 부동산 냉기는 외면하면서 자신들만 이익을 챙긴다면 정책 불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신뢰가 회복되지 않으면 어떤 대책도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정부와 정책 설계자는 이 사실을 똑똑히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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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나는 내가 영포티인 줄 몰랐다
얼마 전 30대 후배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그들의 대화에서 ‘영포티’라는 말이 오갔다. 많이 들어봤지만 정확한 의미를 몰라, 뜻을 물었다. “자기 관리를 해서 젊게 사는 40대인데…”라는 설명까지 듣고, 말을 잘랐다. “그럼 난데”라는 충격적인 발언에 그들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크게 웃었다.
물론 40대 후반으로 기울고 있는 선배의 농담이었다. 그럼에도 내심 ‘약간은 젊게 사는 40대에 가깝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후배의 설명은 이어졌다. 후배는 “처음에 그런 좋은 뜻이었지만, 요즘엔 다르다. 젊게 산다는 자신감이 과해, 20대와 30대에게 뭘 계속 가르치려는 꼰대를 비꼬는 말이다”고 마저 설명했다.
그러니까 영포티는 좋은 뜻이 아니라, ‘진화한 꼰대’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꼰대는 나이와 계급으로 아랫사람을 누르는 스타일이라면, 영포티는 옛날 꼰대와는 다르게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에 심취해 자신이 꼰대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다. 어쨌든 20대와 30대에게 이들은 비호감이다.
영포티라는 말이 워낙에 퍼지다 보니, 관련된 기사도 제법 나왔다. 경제적 계급 차이가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쉽게 표현하면, 20대와 30대들이 경제적 부담으로 구매하기 힘든 패션 브랜드를 영포티들은 쉽게 사 몸을 치장할 수 있다는 거다. 여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반감을 부른다는 얘기다.
일리가 있는 분석인 듯 보이지만, 영포티에 대한 반감을 오롯이 박탈감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영포티이든 올드포티이든 젊은 층은 40대 이상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기 쉽다. 가장 큰 불만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 사람들과 대화하기 보다 가르치려 한다는 지점이다.
대다수 조직에서 40세 전후의 구성원은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하는 조직 내 허리다. 경력이 붙어 일을 제법 잘 하면서, 아직 완전한 관리자 직위에 오르지 못해 일도 많이 하는 시기다. 10여 년 이상 한 분야에서 있었다면 일 처리에 요령이 생겼을 것이다. “일 좀 한다”는 칭찬을 종종 받게 된다.
그때가 위험하다. 작은 인정이라도 자주 받다 보면, 자신감이 많이 붙을 수 있다. 굳이 칭찬이 없더라도, 스스로 봐도 예전보다 일을 잘하니 자신감이 과해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후배를 비롯해 주변 사람의 업무 태도 등에 불만이 생길 수 있다. 좋은 뜻에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잔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된다.
결국 영포티이든, 50대 꼰대이든, 젊은 사람이 피하고 싶은 어른은 대화하기 힘든 사람일 것 같다. 윗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랫사람은 일방적인 훈계인 경우가 많다. 회의를 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면 그냥 결국 장시간에 걸친 업무지시라고 느낀 적이 있지 않은가.
조직 안에서는 권위와 계급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차이 앞에서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기 어렵다. 윗사람이 입을 닫고 들으려 할 때 조금씩 진짜 속내가 나올 것이다. 권위적인 윗사람이 “아이디어를 내라”, “생각을 말해보라”고 강조해도 아랫사람은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회의 뒤 윗사람은 소통했다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이다.
꼰대 문화로 놀림 받는 권위적인 문화가 21세기엔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창의력이 중요한 경쟁 구도가 됐는데, 아직도 옛 군사 문화 분위기에 젖어 있다면 회의 결과는 시대에 뒤처진 결론에 이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선 윗사람 혼자만의 판단보다는 여러 조직원들의 의견이 취합된 결과가 정답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미국이나 유럽의 IT기업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질적인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회사가 더 나은 결과물을 쥐게 될 것이다.
비단 기업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자체장도 혼자만의 생각을 강요하면 도시가 엇나갈 수도 있다. 대통령이 자기 말만 하고 듣는 것을 싫어하면, 국정이 엉망이 될 수 있다.
요즘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여러 회의를 국민이 직접 시청하는 시대다. 회의에서 결정되는 내용만큼이나 회의 진행 방식도 중요하다. 효율적이면서도 충분한 소통이 이뤄지는 회의라면 좋겠다. 딱딱한 기업 의사결정 구조를 합리적으로 바꿀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대통령을 포함해 모든 40대 이상이 ‘꼰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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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무라야마 전 총리와 부산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가 지난 17일 향년 101세로 별세했다. 1924년 일본 규슈 오이타현에서 태어난 무라야마 전 총리는 1972년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로 당선돼 중앙 정계에 진출한 뒤 1994년 제81대 총리에 올랐다. 총리로 재임 중이던 199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주변국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명시한 ‘무라야마 담화’를 내놨다.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과거 식민지 지배를 ‘침략’이라고 언급하며 기존보다 진일보한 사과와 역사 인식을 내비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부산과도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고인은 2008년 11월 11일 부산을 처음으로 찾았다. ‘이수현 의인’을 기리기 위해 해운대 누리마루APEC하우스에서 열린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부산에 거주하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수현 의인은 2001년 1월 26일 도쿄 신주쿠 신오쿠보역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의로운 죽음은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무라야마 전 총리는 이수현 의인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힘을 보탰다.
기자는 당시 포럼 행사에 앞서 무라야마 전 총리를 서면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길게 기른 흰 눈썹과 백발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고인은 옅은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밝혔다. “이수현 의인의 행동은 수많은 일본 국민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비록 일본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많은 과제를 갖고 있지만 이수현 의인이 가교 역할을 한다면 앞으로 더욱 발전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의 소탈하면서도 밝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인은 2000년 정계를 은퇴한 뒤 종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해 설립된 민간 재단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이사장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고향으로 내려와 매일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직접 타고 다니는 등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다. 지난해 100세를 넘긴 장수 비결로 ‘욕심 없이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라고 밝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08년 부산 인터뷰는 고인의 점심 일정을 뒤로 미루는 방식으로 겨우 성사됐다. 당시 약속한 시간을 넘길까 봐 조급해진 기자를 되레 세심하게 배려하던 무라야마 전 총리의 따뜻한 눈빛과 격려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인의 평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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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블록체인 특구, 교육으로 저변 확대를
지난 9월부터 시작된 ‘부산 디지털금융·블록체인 아카데미’는 급변하는 금융 환경과 디지털 산업의 핵심 이슈를 다루는 교육 과정으로 부산일보를 중심으로 개설됐다. 이 아카데미에는 금융권 종사자를 비롯해 부산경남권 기업인, 스타트업 창업가, 전문직 종사자, 일반 직장인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참가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총 12회 과정 중 5회차를 맞이한 이 아카데미는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는 참가자들의 높은 열의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부산이 디지털금융의 거점 도시로 도약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산은 이미 중앙정부로부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있고, 수년간 다양한 실증 사업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번 아카데미가 이제야 1기라는 점에서 블록체인이나 디지털금융에 대한 기술의 문제는 떠나 ‘교육 접근성’과 ‘정보 격차’의 문제가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수도권이나 해외에서는 대학, 연구소, 기업, 스타트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최신 블록체인 트렌드와 비즈니스 모델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여전히 관련 교육이나 네트워킹 기회가 제한적이고, 산업 생태계도 충분히 촘촘하지 않다.
‘블록체인 아카데미’ 반응 뜨거워
하지만 부산 정보 격차 등 문제
교육 제한적, 산업 생태계도 열악
해커톤·세미나 등 참여 채널 절실
사람 중심의 생태계 구축 꼭 필요
독자적인 금융혁신 모델 만들어야
서울에서는 매주 블록체인 포럼이나 Web3 세미나가 열리고, 세계적인 블록체인 기업이나 프로젝트팀이 직접 한국을 찾아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반면 부산에서는 특구 지정 이후 여러 정책적 지원이 있었지만, 지역 주민이나 청년층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교육 채널은 많지 않았다. 포럼이나 세미나를 주최하고자 하는 기관이나 단체도 찾기 힘들어 보인다. 부울경 지역에서 블록체인이나 디지털금융에 관심 있는 대학생 등 개발자들이 서로 실력을 겨뤄볼 만한 해커톤도 열리지 못했다. 물론, 일반적인 해커톤이 부산에서도 종종 열리기는 하지만, 블록체인에 특화된 해커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부산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일전에 진행했던 해커톤이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어 계획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부산에 정말 필요했던 것은 블록체인 특구나 허브 도시와 같은 거창한 담론보다는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대해 시민들이 교육받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확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은 일부 전문가만 다루는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익히고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금융 언어다. 이 언어를 부울경 지역에서도 자연스럽게 접하고 습득할 수 있도록 보다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학습과 참여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필자가 속한 비댁스는 부산시와 부산일보의 후원을 받아 오는 26일 ‘1-Day 아이디어톤(Ideathon)’을 개최한다. 이번 행사에는 우리금융그룹, 부산 소재 디지털자산거래소인 비단거래소, 글로벌 레이어1 프로젝트인 아발란체(Avalanche), 폴리메쉬(Polymesh)가 파트너로 참여한다. 비록 짧은 하루지만, 지역 내 청년·개발자·기획자들이 팀을 이뤄 디지털 자산을 활용한 아이디어를 직접 구상하고 발표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기술적 완성도보다 중요한 것은 참여 경험 자체다. 이런 작은 시도와 경험이 쌓여야만, 부산이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금융 도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의 블록체인 산업은 지금 ‘두 번째 단계’에 서 있다. 첫 단계가 제도적 기반과 특구 지정이었다면, 두 번째 단계는 사람 중심의 생태계 구축이다. 중앙정부의 규제 샌드박스만으로는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현장에서 문제를 느끼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참여가 있어야 비로소 산업이 자생력을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부산은 매우 잠재력이 크다. 항만·물류 등 실물 인프라, KRX 거래소를 비롯한 국책 금융기관들, 그리고 지역 대학과 연구기관이 존재한다. 여기에 다양한 세대의 지적 호기심이 결합한다면, 부산은 ‘서울의 대체재’가 아니라 ‘독자적인 금융혁신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디지털 자산과 블록체인은 기술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혁신이다. 지역의 금융, 산업, 행정이 소위 ‘돈 버는 사업’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고 본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교육과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교육청이나 대학 등 교육기관과 손잡고 이해를 넓히고 저변을 확산하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새로운 금융 언어를 익히고 이를 자신들의 언어로 재해석할 때, 부산의 블록체인 특구는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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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리는 왜 싸움을 멈출 수 없는가?
우리는 언제쯤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까.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는 대신, 우리가 ‘왜’ 계속 싸우는지 근원적인 이유를 묻는다. 영화 제목이 암시하듯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가 이어지는 반복의 서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사회적 분열의 고리를 장엄한 은유로 담아낸다. 이 단순한 문장은 분열된 현대 사회 특히 미국 내부의 첨예한 갈등과 분노가 일상화된 세계의 초상처럼 보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폭발과 추격, 총격전이 이어지는 블록버스터의 외형을 띠지만 이면에는 이념과 인종, 계급의 갈등으로 무너진 사회의 심층이 새겨져 있다. 물리적인 ‘전투’는 오락적 장치가 아니다. 불신과 증오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이념 간의 충돌, 증오가 낳은 사회적 폭력의 일상화를 상징한다. 이때 감독은 스펙터클을 통해 현실의 폭력성을 가리기보다 오히려 이면을 들춰낸다. 그로 인해 스크린 위의 끝없는 폭력은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이는 영화가 가상의 미국이 배경임을 밝히지만, 동시대 미국 내부의 갈등 양상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정치적 작품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영화는 반체제 단체 ‘프렌치 75’ 소속의 급진 활동가였던 ‘팻’(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이 혁명의 실패와 조직의 와해 이후, 술에 찌들어 은둔하는 ‘밥’으로 살아가는 현재를 조명한다. 과거 자유를 위해 폭탄을 만들었던 그는 이제 16살 딸 ‘윌라’의 안전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그에게 16년 전 인물이 찾아오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과거 이념적인 투쟁이 이제는 부성애라는 사적인 감정으로 치환된다. 밥의 싸움은 신념과 공포, 사랑과 책임이 뒤엉킨 내면의 투쟁이며,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려는 몸부림이다. 사실 밥에게 자유란 거창한 정치적 구호가 아닌,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감독은 밥을 통해 혁명가로서의 정당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는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헌신적인 사랑은 동시에 고립을 낳는 역설을 품고 있다. 밥은 외부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고자, 세상과 딸을 분리하며 숨어 살았다. 하지만 그가 구축한 안전망은 사실상 외부와 단절된 감옥이다. 그는 자신이 딸을 위해 싸운다고 믿지만 그 방식이야말로 폭력의 논리일 뿐이다. 밥 또한 폭력은 폭력을 낳고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부르는 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권력에 눈이 먼 인물들은 지난한 관계를 후대로까지 이어가며 싸움을 만드는데, 이는 혁명의 완결은 없다는 감독의 시각을 대변한다.
결국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아버지 세대의 싸움이 지닌 폭력적 한계와 그 절망적인 계승을 고백하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 희망의 열쇠는 다음 세대인 ‘윌라’에게 있다. 윌라는 아버지 세대가 물리적 전투를 통해 지키려 했던 ‘자유’를 물려받지만, 그 방식을 답습하지 않는다. 윌라는 배타적인 고립 대신 연대와 공존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가는 새로운 방식의 투쟁을 선택한다. 감독은 이 과정을 마지막 장면에서 절제된 방식으로 제시한다. 윌라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밥은 과거의 폭력이나 은둔 대신 오직 ‘조심하라’는 당부를 건넬 뿐이다. 이 고요한 순간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소음을 넘어 우리가 해내야 할 싸움의 본질을 암시한다.
결국 영화는 폭력과 갈등이 만연한 세계를 비관적이면서도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그려내지만, 그 핵심에는 ‘우리가 왜 싸우는지’ 근원을 파악하게 하는 통찰을 담는다. 혁명에는 완결이 없지만,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강렬하면서도 희망적인 메시지가 오래도록 남는 영화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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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2025 제1회 부마미술제 '기억하는 산'
부산민예총 시각위원회는 지난 9월 6일부터 10월 10일까지 부산민주공원 기획실에서 2025 제1회 부마미술제 ‘기억하는 산’을 전시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정권의 18년 장기 집권과 유신독재에 저항해서 일어난 시민항쟁이자 민중항쟁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은 이후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종식의 시발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부마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이정표이다.
‘기억하는 산’은 부마민주항쟁을 주제로 처음 이루어진 전시였다. 부산민예총 시각위원회가 주최한 이번 기획전의 목적은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 방향을 함께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부산·경남에서는 부마민주항쟁을 주제로 한 독립적인 미술 전시가 없었다. 주최 측은 ‘부마미술제’가 광주의 ‘오월미술제’나 제주의 ‘4·3미술제’처럼 부산·경남 지역 진보 미술의 상징적인 전시로 자리 잡고, 나아가 한국 진보 미술운동의 지형을 완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1명의 참여 작가는 작품을 통해 ‘유신 철폐, 독재 타도’의 구호로 부산과 마산의 거리를 뒤덮은 1979년 당시의 함성이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을 거쳐, 2016년의 촛불 항쟁, 그리고 작년의 12·3 불법 비상계엄 사태를 종식한 ‘빛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의 가치임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고자 한다. 또한 그 속에서 사회 변화를 촉발하는 강력한 매개체로서 예술의 역할을 웅변하고자 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곽영화의 ‘부마민주항쟁부활도’이다. 이것은 천막 천에 아크릴로 그린 걸개그림으로, 작가가 전체 밑그림을 그리고, 시민 180명이 제작에 참여한 그림이다. 부마항쟁의 여러 장면을, 실사를 바탕으로 상상으로 재구성했다. 선언문을 든 학생들, 김경숙 열사로 대표되는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 시위 군중, 경찰·군대, 도시 풍경, 신발·동백꽃 등 지역 상징물의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사진이나 조각을 물리적으로 붙여 넣는 재료적 콜라주는 아니다. 오히려 이질적 이미지를 병치·조합해 하나의 집합적 서사를 만드는 방식을 취한 회화적 콜라주, 또는 내러티브 콜라주라 부를 수 있다. 더 나아가 실제 역사 사진, 현장 자료에 기반한 이미지를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콜라주’라는 표현도 가능하다. 이 그림을 통해 작가는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장면과 지역 상징을 집단적 회화로 재구성했으며, 민주주의 투쟁의 기억을 시민의 참여 속에 되살리고 있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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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거꾸로 간다] 노인 연령에 대한 오해
이번 추석 연휴에 75세 ‘가왕’ 조용필 공연을 TV에서 봤다. 노래도 감동이었지만, 실험과 도전, 교감의 ‘조용필 정신’을 추구하는 그는 여전히 열혈 청년이었다. 2025년 기대 수명이 84.5세로 세계 3위인 우리나라에서 연령적 신체에 구속되지 않은 젊은 고령층이 어디 조용필뿐이겠는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고속철에 올라탄 우리나라여서 그런지 노인 연령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다. 첫째, 노인 연령이 65세로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 법에서는 단일의 노인 연령 기준을 정하고 있지 않으며, 노인 대표법인 노인복지법에서도 시설 입소·이용, 서비스 등 필요 사항별로 65세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둘째, 노인 연령을 일률적으로 상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국 노인법을 보면 대개의 정책이 60세 이상이며, 우리와 달리 급식·정보·상담·보건·봉사연계 프로그램 등 많은 사업과 사회 서비스 적용을 60세 이상으로 정하고 있다. 주거 지원은 62세이고, 메디케어(Medicare) 등 보건 관련 영역에서는 65세로 하고 있으나, 경우에 따라 55세 이상도 대상이다. 장기 요양이나 지역 통합돌봄 서비스는 55세 이상으로 정하고 있다. 고용 영역에서 연령 차별 금지는 40세 이상이 적용 대상이다. OECD 회원국 중 최고의 노인 빈곤율 국가이며, 노령연금 등 공적 소득 보장 취약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빈약한 노인 서비스의 출입문을 더 좁게 만드는 시도는 문제가 있다.
셋째, 정년을 늦추면 청년 일자리가 빼앗긴다는 오해이다. 이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단순하게 보면 몇몇 영역에서 고령층 고용이 청년층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지만, 저임금 일자리의 경우는 서로 분리된 특성을 갖고 있다. 또 청년 고용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임금체계 개편, 점진적 정년 연장, 세대 상생형 일자리 모델과 세대 통합형 고용 전략의 확산으로 해소할 수 있는 문제다. 1889년 비스마르크가 연금 개시 연령으로 정한 65세 노인 기준이 21세기에도 적용되고 있어, 특히 일자리와 공적 연금 영역에서 노인 연령의 동반 상향화 등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잠재성장률, 생산연령인구 규모·비율 등 주요 지표에서 2020년을 정점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혹시 피크 코리아(Peak Korea) 현상이 시작된 것인지 염려스럽다. 정년과 연금 개시 연령 간 차이로 인한 소득 절벽을 해소하고, 고속 발전을 견인한 거대한 베이비부머 집단 중 2차 베이비부머라도 노동 시장에서 더 오래 머물도록 하는 것이 부담은 줄이고 소득은 높이는 이 시대의 필수 해법이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라는 조용필의 노랫말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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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의인 이수현 기념관’ 제의
2001년 1월 26일 일본 신오쿠보역에서 한국인 유학생 고 이수현 씨가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그 숭고한 희생은 그 당시 경색되었던 한일 관계를 넘어서 국경을 초월한 인간애와 용기의 상징이 되었고, 양국 국민에게 깊은 감동과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에 대한 인식이 크게 개선되었고, 한일 민간 교류가 활성화되는 긍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의인 이수현 씨의 어머님은 아들의 뜻을 이어받아 이수현 기념 장학회를 설립했고, 양국의 젊은이들에게 진정한 한일 우호의 가교 역할을 했다. 고 이수현 씨의 의로운 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그 숭고한 희생이 지닌 인류애적 가치를 미래세대에 교육하며, 나아가 한일 우호 증진의 거점 구실을 하는 ‘의인 이수현 기념관’을 그의 고향인 부산에 건립할 것을 제의한다. 부산은 한일 교류의 관문이자 6·25전쟁 당시 피란민에게 인류애를 보여준 역사적인 장소로서 고 이수현 씨의 의인 정신을 기념하기 좋은 도시이기도 하다. 20여 년이 지난 그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의 이미지가 차츰 잊혀 가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기념관 설립의 목적에는 여러 가지 다중적인 목적을 추구한다. 기억과 교육 그리고 미래를 향한 연결이다.
첫째, 의인 이수현 씨의 숭고한 정신을 영구보존하고 계승해야 한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타인을 구한 의로운 행동을 영원히 기억하고 추모하며, 그 희생이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를 지속해서 되새기는 것이다. 둘째,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인간애, 용기, 희생의 확산 거점을 마련해야 한다.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를 알리고, 그 가치들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교육과 영감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 한일 우호 증진 및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의인 이수현 씨의 희생이 양 국민 간에 준 감동을 바탕으로 상호 이해와 협력을 증진하고, 미래세대에게 과거의 갈등을 넘어선 공존과 화합의 중요성을 교육하여 건강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 여기에 부산이 가진 한일 교류의 역사적 지리적 중요성을 활용한다.
넷째, 시민의 안전의식 및 공동체 의식을 함양해야 한다. 위기 상황에서의 시민 의식, 타인에 관한 관심, 그리고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실질적인 교육 효과를 도모하여 안전하고 상호 배려하는 공동체 문화 조성에 이바지해야 한다. 다섯째, 글로벌 시민 의식 함양 및 국제적 협력의 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고 이수현 씨의 희생이 전 세계에 던진 메시지를 기억해야 한다. 국경과 문화를 넘어 인류애를 실천하는 의인 정신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여, 세계인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국제사회의 인류애적 협력을 촉진한다.
따라서 고 이수현 의인의 희생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와 용기의 위대한 증거이다. 그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갈등과 분열 속에서 화합과 연대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 이수현 의인의 고향인 부산에 그의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그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그가 보여준 인류애와 용기가 미래 세대에 지속해서 영감을 줄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또 기념관의 설립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 세계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화합과 이해의 상징이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는 중요한 공간이 될 것이다. 이는 부산을 한일 관계의 긍정적인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심지로 나아가 인류 보편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할 것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부산광역시와 한국 정부 그리고 일본 관계 기관과 시민 여러분의 깊은 이해와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한다. 의인 이수현 기념관은 의인의 삶과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인류애의 가치를 체험하며 한일 교류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반드시 부산에 의인 고 이수현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