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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자퇴 증가, 내신 리셋 때문?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지난해 자퇴한 일반계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 원인을 두고 추측이 분분하다. 일부 사교육 현장에서는 내신 5등급제 도입에 따라 대입에서 내신 성적 영향력이 커진 것을 주된 이유로 꼽는다. 더 좋은 내신을 받기 위해 자퇴와 재입학을 거쳐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니는 이른바 '내신 리셋’의 영향이라고 진단한다. 반면 교육당국은 내신 5등급제 때문에 자퇴가 증가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엇갈린 반응이다.
■ 자퇴 원인은 내신 리셋?
전국 일반계 고교 1학년 자퇴생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교육정보시스템(NEIS) 학적변동 통계 등에 따르면 2021년 6112명, 2022년 7880명, 2023년 9373명, 2024년 9346명을 기록했다가 지난해엔 1만 6명을 기록했다. 이 현상을 두고 일부 사교육 현장에서는 내신 리셋의 영향이 크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고교 내신 등급제는 2025학년도부터 기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전환됐다. 2028년도 대입부터 5등급제를 적용한다. 9등급제는 1등급 상위 4%, 2등급 누적 11%, 3등급 누적 23%, 4등급 누적 40% 등으로 나뉜다. 5등급제는 1등급 10%, 2등급 24%, 3등급 32%, 4등급 24%, 5등급 10%로 나뉜다. 1등급 비율이 4%에서 10%로 늘었지만 2등급 이하로 떨어지면 서울권 대학 진학이나 의대 진학을 할 수 없을 우려가 커졌다는 게 일부 입시학원 등의 입장이다. 9등급제 체제에서는 내신 2등급대도 서울 중하위권 대학을 노려볼 수 있었으나 5등급제 전환으로 합격 가능성이 훨씬 낮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3학년 1학기까지의 고교 성적을 반영하는 대입 내신의 경우 고1 내신을 망칠 경우 치명적이다. 남은 3학기 동안 내신을 만족할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학년 내신을 망쳤을 경우엔 불안감 때문에 내신 리셋 결정을 내리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치열한 성적 경쟁 폐단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도입한 5등급제가 다시 다른 폐단을 낳는 악순환을 초래한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 자퇴 부추기는 ‘사교육 불안 마케팅’?
교육당국은 내신 5등급제가 도입된 2025학년도 고교 자퇴생 수가 유의미할 정도로 급증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2025학년도에 학업을 중단한 학생이 2026학년도에 다시 입학하거나 재·편입학 규모도 전년과 유사하다고 짚었다. 재입학 이유도 질병 치료와 가정 사정 등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신 리셋을 위한 재입학이 증가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고 한다. 또 전 과목 1등급을 받지 않으면 서울권 대학 진학이 어렵다는 주장은 사교육 현장의 불안 마케팅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특히 2025학년도 고교 1학년 1·2학기 전 과목에서 모두 1등급을 받은 학생 수는 4659명(1.08%)으로 1학기 대비 38% 감소했다. 3년 동안 모두 1등급을 받는 학생 수는 갈수록 더 줄어드는 구조라는 것. 따라서 전 과목 1등급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큰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2025년 고교 1학년 자퇴생들의 평균 등급은 5등급제 기준 3.7등급, 9등급제로 환산하면 6.7등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1학년 자퇴생 중 내신 하위 등급 학생이 많은 것으로 확인된 것도 내신 리셋으로 인한 자퇴 증가의 반박 증거로 제시된다.
■ 증가하는 학교 밖 청소년
고교생 학업중단엔 대인관계 및 심리·정서적 요인에 의한 학교생활의 어려움, 해외 출국, 질병 등 복합적 요인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자퇴, 퇴학, 무단 결석 등 학업중단을 부른 사유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부족하다. 현재로서는 원인을 특정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내신 리셋을 위한 자퇴와 재입학, 검정고시 응시를 위한 자퇴 등 다양한 원인이 중첩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일반계 고교뿐만 아니라 특성화고 등의 학업중단 사유도 한층 정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계속 증가한다는 것이다. 학령기 학교 밖 청소년(6~17세)은 2024년 기준 17만 3800명으로 추산됐다. 학업중단 학생 통계는 있지만 학교 밖 청소년 규모에 대한 정확한 자료조차 없는 상황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고립과 은둔에 빠지기도 한다. 정부와 광역지자체 교육청 등의 정확한 실태조사와 맞춤형 지원책 마련이 절실하다. 청소년 자퇴를 자발적 학업 중단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개선되어야 한다. 자퇴 증가는 우리 사회의 입시 중심 교육제도 등이 초래한 비자발적 선택의 증가로 봐야 한다. 1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일반계 고교 1학년이 학교를 떠났다는 절망적 통계 앞에서 그 원인이 내신 리셋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학업을 중단한 그들의 상당수가 학교 밖 청소년으로 방치될 우려가 높아진 현실 자체가 이미 너무도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과 보완정책 마련이 절실한 시점이라는 공감대 확산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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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해수부 청사 북항 시대, 해양수도권 이끌 구심점 돼야
작은 어촌 마을 항구로 출발해 150년간 역사의 격랑 속에 오늘의 한국을 일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국제무역항이 부산 북항이다. 20년 전부터 항만 기능을 하나둘 부산 신항으로 넘기고,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는 거점 공간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항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해양 관문이다. 해양수산부가 바로 이곳, 북항에 신청사를 짓겠다고 6일 발표했다. 당연한 귀결이며, 밝은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판단이다. 해수부가 동해와 남해가 만나고 대양을 오가는 절묘한 지점에 자리해 ‘남부 해양수도권’을 주도하고, 부산 미래 거점 공간에서 ‘해양수도 부산’을 이뤄나가길 바라마지 않는다.
해수부는 올해 시설 규모를 확정하고 2030년까지 신청사 건립을 완료하기로 했다. 철저한 준비와 신속한 추진으로 해양수도 부산을 상징하는 멋진 건물이 들어서길 기대한다. 당장 이번 결정으로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북항 1단계 재개발 사업이 한층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신청사 입지는 북항 1단계 구역 핵심 부지인 복합항만지구(부산 동구 초량동 1270번지 일원)다. 현재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주차장 자리로 쓰이고 있어 제약도 적다. 여기에 랜드마크 부지 등 1단계 구역의 미 확정 부지들 활용 방안도 빠르게 나오길 바란다. 1단계가 잘 마무리 돼야 2·3단계 개발로 이어져 북항이 제 모습을 갖출 수 있다.
해수부 신청사 입지 결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부산 지자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칠 만큼 높은 기대를 걸었던 이면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속뜻이 있다. 북항을 비롯한 부산에 국가 해양 기능을 집적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해양·항만 유관 기관, 부산해사국제상사법원 등이 빠르게 자리 잡도록 추동하는 동시에 동삼혁신지구 해양수산 연구개발 기관들, 해양진흥공사 등 기존 기관들이 잘 작동할 수 있는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 해양 산업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HMM 등 해운 기업에 더해 수산 대기업도 부산 이전이 가능한지 적극 검토해 주길 바란다.
부산·울산·경남은 ‘남부 해양수도권’이라는 틀로 미래를 열어가기로 방향이 정해졌다. 글로벌 물류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국가 간 경쟁도 심화하고 있는 가운데 부울경의 강점들을 살려 대응하자는 전략이다. 하지만 기존 산업들을 독려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기술까지 더하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다. 우리 실력을 키워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또 다른 기회인 북극항로 개척도 경쟁국들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어, 기술 개발, 인력 양성, 국제 협력 등 여러 문제를 동시에 풀어가야 한다. 해수부가 망설임 없이 ‘북항 시대’를 연 것이 남부 해양수도권 구심점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해수부가 중심에 서고, 부울경과 한 몸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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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지방 국립대 전면 무상 교육, 지역 혁신의 씨앗 되길
정부가 내년에 지방 국립대에 입학하는 학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급해 사실상 무상 교육을 추진한다. 교육부가 5일 대통령에 보고한 하반기 업무 계획에 따르면 기존 국가장학금을 확대해 등록금을 면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경우 소요되는 2000억 원의 추가 재원을 내년 예산에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지방 사립대 우수 학생에 대한 지역균형장학금 확대도 함께 검토된다. 이는 국가균형발전의 큰 틀에서 볼 때 시의적절한 조치다. 지역 인재의 수도권 유출을 막지 못하면 지역 대학이 무너지고 산업과 지역 공동체도 동반 쇠락한다. 장학금 확대는 악순환을 끊는 출발점이자 지역 재생의 전기가 돼야 한다.
대학을 혁신의 중심축으로 세우려는 시도는 역대 정부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다. 노무현 정부의 지방대학 혁신역량 강화(NURI) 사업이 대표적이다. 대학이 지역 산업의 연구개발을 이끌고, 인재를 양성하며, 지자체와 기업을 연결하는 플랫폼이 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이 접근법은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로 이어졌다. 하지만 수도권이 기업과 일자리, 문화와 교육 자원을 흡수하는 블랙홀 현상은 심화했고 우수 학생의 ‘인서울’ 행렬은 이어졌다. 학생과 인재 유출을 막지 못한 지역에는 결국 소멸의 경고장이 날아들었다. 문제는 대학 중심 지역 혁신을 뒷받침할 산업·일자리·정주 여건이 함께 갖춰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방 국립대 등록금 면제로 수도권 집중이 저절로 완화되지는 않는다. 지방대 졸업생이 지역에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정책의 효과가 지속된다. 정부가 추진하는 5극 3특 전략과 3대 메가 프로젝트,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그런 점에서 중요한 기회다. 대학 혁신과 권역별 산업 전략은 긴밀하게 맞물려야 한다. 부산·울산·경남은 해양수산과 항만물류, 조선·기계, 원전과 에너지, 금융, 디지털 산업, 가덕신공항과 북항 재개발 등 지역 성장동력을 대학 교육과 연구에 접목해야 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대학이 신속하게 길러내고, 졸업생이 지역 기업과 공공기관에 정착하는 선순환 구조의 안착이 관건이다.
대학 무상 교육은 파격적인 정책이다. 지역의 혁신 생태계 형성을 촉진하는 불씨 역할이 요구된다는 측면에서 ‘반값 등록금’ 같은 복지 정책과 결이 다르다. 따라서 퍼주기식으로 흘러 정원 유지 수단에 그치면 실패다. 지역 산업 기여도와 취업·정착 성과, 산학 협력과 교육 혁신 수준 등 지원 요건을 강화해 긴장감을 높일 필요가 있다. 역내 협업 체제도 성패를 좌우한다. 대학 혁신과 기업 유치, 산업 육성, 일자리, 정주 여건 개선을 묶은 패키지 추진에 지역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 대학을 지역 혁신의 구심점으로 삼자는 구호는 반복됐지만 추세 반전은 역부족이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통렬한 각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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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세상톡톡] 호남 차별론과 소외론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때는 그것이 대충이라도 해치우고 보자는 식의 부실과 연결되는 부정적 이미지로 소비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칼같이 납기를 맞춘다는 식의 의미로 변화해 방위산업 수출 등에서 긍정적 이미지로 변화하는 중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근대화에 뒤처진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을 보자면 ‘빨리빨리’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국민의 DNA에 박힌 듯한 속도전의 흔적은 올 들어 더욱 가속화하는 모양새다. 건국 이래 이런 수준의 속도전이 펼쳐진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 속도전의 주인공은 바로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 6월 갑자기 호남권 800조 원 규모 투자를 골자로 한 반도체 메가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 프로젝트를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전공정 공장 설립 추진 계획이 나온 지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아 정부는 광주 군공항을 반도체 공장 부지로 확정했다. 건국 이래 최대 규모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는 이 사업은 그 추진 속도만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수준이라 할 것이다.
수도권에 투자를 몰아왔던 과거와 비교해 보면 비수도권에 국운이 걸린 초대형 사업 유치를 적극 추진하려는 이재명 정부의 의지는 분명 돋보인다. 비수도권에도 수백조 원 수준의 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젖힌 것만으로도 큰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거기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속도까지 더해졌으니 추진력에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굳은 의지와 돋보이는 속도전으로 이목을 끌던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은 이재명 대통령의 한마디로 인해 ‘정치적’이라는 평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6월 30일 광주를 방문해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 비전 국민보고회’를 가진 자리에서 호남 반도체 산단을 “차별의 고통과 설움을 견뎌내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만들고 지켜온 호남에 대한 역사적, 국민적 보상”이라고 규정했다. 반도체 산단 입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전력과 용수 문제에 대해서도 이 대통령은 호남 지역이 장기간 개발에서 소외되면서 기존 수도권 인프라 한계를 극복할 대안이 됐다고 말했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의 필연적 이유를 앞세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차별론’을 부각시킨 이 대통령의 발언은 당장 ‘소외론’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호남지역인 전북에서까지 전북 소외론이 불거질 정도였으니 타 지역에선 더욱 거센 소외론이 등장했다. 야당에서는 정치적 지역 갈라치기라는 날선 비판까지 쏟아졌다.
이 대통령의 차별론이 정치적 지역 갈라치기라는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에 대한 차별은 없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혹시 차별이 있었더라도 그 차별이 호남의 민주주의 수호론처럼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야 할 터이다. 만약 다른 지역에서 차별이 발견이 되고 그로 인한 결과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각을 잠시 동남권으로 돌려 보면 지난해 기준 부산·울산 경계 지역에는 가동중인 원전 9기에다 건설중인 원전 1기를 보태 모두 10기의 원전이 밀집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처럼 좁은 지역에 원전이 10기나 밀집해 있는 경우는 없다. 고리 원전만 해도 반경 30km 안에 무려 380만 명이 산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후쿠시마 원전 주변 인구의 22배 규모다. 한때 “수도권은 인구 밀집 지역이어서 원전 건립에 적절치 않다”는 원전 최고위 관계자의 말이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었다. 그 말에 비춰 보면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역 인근의 부산을 비롯한 동남권 국민들은 원전 건립 부적절의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핵 폐기물까지 둘 곳이 없어 원전에 가득 쌓아두고 있는 현실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를 차별이 아니라 하긴 어려울 듯하다.
여기에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는 산야에 끝도 없이 박힌 송전탑을 타고 전기 최대 사용처인 수도권으로 공급된다. 수도권이 대한민국 발전의 중추 역할을 맡아 왔다면 그 배후엔 전력 공급처인 동남권의 희생과 기여가 지대했다고 봐야 한다. 동남권 차별로 인한 결과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 않은가.
지역 균형발전을 이끌 초대형 투자의 이유를 차별론에서 찾는 것은 이 같은 함정에 빠질 위험이 매우 크다. 당장 동남권에도 차별과 기여를 이유로 천문학적 투자를 유도할 것이 아니라면 대통령은 그냥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의 합당한 이유만 설명하는 게 옳았다. 너도나도 차별을 이유로 투자를 요구할 빌미를 대통령이 앞장 서서 제공한 건 두고두고 아쉬울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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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물소 떼 전략'의 함정
유튜브 채널 시사평론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한 이재명 정부를 상징하는 긍정적 키워드로 ‘효능감’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5000피’를 훌쩍 뛰어넘어 9000 고지를 밟은 코스피 지수, 높은 국정 지지도, 생중계로 진행되는 국무회의 및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6·3 지방선거 및 임기 1년을 분기점으로, 임기 2년 차에 접어든 이재명 정부는 개혁 드라이브와 맞물려 ‘물소 떼 전략’이 눈여겨볼 키워드로 부각되고 있다. ‘물소 떼 전략’은 아프리카물소가 악어와 같은 포식자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떼를 지어 강을 건너는 데서 유래한 말로, ‘주요 개혁 과제와 인사, 정책을 동시다발적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이다.
이재명 정부 2년 차와 맞물려 국무위원 인사 뿐만 아니라 공공기관 통폐합, 2차 공공기관 이전, 시도 행정통합, ‘5극3특’ 메가특구 조성 등 주요 국정과제 및 개혁 과제들이 숨 돌릴 틈 없이 전방위적으로 추진되는 모습을 두고 이재명 정부 특유의 ‘전격전’ 내지 ‘물소 떼 전략’의 확장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공공기관 통폐합과 관련해서는 △육·해·공군 사관학교 통폐합 △발전 5사 통폐합 △KTX(코레일)·SRT(SR) 통합 △4개 항만공사 통폐합 △공항공사·공단 통폐합 등이 현재진행형이다.
임기 초반 높은 국정 동력을 기반으로 ‘에너지(발전사)·물류(항만)·교통(철도·공항)·지방이전·행정구역 통합’이라는 메가톤급 개혁 과제들을 한꺼번에 속도전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정쟁 및 이해 당사자의 저항 화력을 분산시키고, 빠르게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국정 성과를 조기에 도출하겠다는 복안으로 보인다. 이재명 정부의 ‘물소 떼 전략’식 개혁 드라이브는 여러 부처·조직·부서에 흩어진 정책 결정과 집행 권한을 하나의 체계로 모아 조정·실행력을 높이는 이른바 ‘거버넌스 일원화’와 ‘중복·비효율 줄이기’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국가 근간을 뒤바꿀 이재명식 개혁 드라이브를 두고 비판과 우려의 시각도 적지 않다. 숙의 민주주의 부재와 절차적 정당성 시비, 졸속 추진에 따른 반발, 개혁 피로감, 입법 리스크 등이 그것이다. 야당과의 협치나 국회 설득 과정이 생략된 채 개혁 드라이브만 걸 경우 입법 병목 현상에 가로막히거나 정치적 대립이 극심해져 민생경제가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
송현수 선임기자 son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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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지금-여기-나'를 잡아서 가는 길
며칠 전 집에서 버스를 타고 서너 코스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간 적이 있다. 이사 오고 1년 정도 지났지만 처음 들른 도서관이었다. 요즘 부산시와 교육청 산하 도서관이 예전에 비해 많이 생겨 주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내부 시설도 쾌적하고 맞춤형 학습과 도서 이용 코너가 효율적이고 기능적으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인문·종교 서적 서가들이 입체적으로 놓여 있는 사이에 독서를 위한 소파형·테이블형 공간이 마련되어 자리를 잡아 들고 온 책을 읽었다. 방학 기간이라 그런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중장년층들도 많이 보였다. 10대부터 70대까지 아우르는 생활 문화공간으로서 도서관이 차지하는 기능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매 순간 삶 모여 과거·현재 만들지만
현존하는 나에 대한 새삼스러운 자각
존재 만족 높이고 정신적 풍요 전해
숨소리조차 죽여가며 각자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풍경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독서문화’란 말이 고풍스럽게 느껴질 만큼 요즘엔 그런 말조차 들리지 않는다. 책 읽는 습관이 문화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교양’과 사람 사이의 괴리가 컸는지 생각한다. ‘책’이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문자 해독 능력을 갖춘 사람이 거의 없었을 때만 하더라도 책은 마치 보석이나 되는 것처럼 아무나 들춰볼 수 없었다. 지식인들은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사고와 가치관을 점검하고 정리하였다. 책과 거리가 멀었던 대부분은 어렵사리 구한 책을 돌려가며 세상의 이치와 지혜를 엿보곤 했다. 첨단 기술이 만연한 오늘날에는 종이책뿐만 아니라 전자책으로도 널리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이 넘쳐흘러 이제는 사실과 거짓의 경계마저 구분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유익함은 단지 책을 읽게 하는 기능을 넘어선다. 책을 읽는 시간과, 이 시간을 부여해 주는 공간이 어우러져 책 속의 세계를 온전히 자신의 마음속으로 낚아채는 곳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다양한 방면의 지식과 지혜가 종이에 글자로 기록되어 있는 도서관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소요, 오지 않은 미래가 현재 속으로 꿈틀거리며 손을 내미는 공간이다. 여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나’가 있다. 비단 책을 읽을 때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흐름을 타고 ‘미래’를 향하여 항해하는 항해사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다시 붙잡아 둘 수 없는 시간(과거)과 아직 찾아오지 않은 시간(미래)을 걱정하거나 앞질러 고민하지 않아도 ‘여기’와 ‘지금 이 순간’과 ‘나’가 자명하게 현존한다는 자각만으로도 충분히 존재 만족을 누리는 길이 됨을 알 필요가 있어 보인다.
모처럼 고요한 산사의 명상처럼 책장 넘기는 서걱거림만이 비규칙적으로 들리는 종합열람실을 다시 둘러본다. 제각각 들여다보는 책들이 테이블 위에 드문드문 놓여 있다. 이용자들이 지나다니거나 앉아서 책장을 넘기는 풍경이 사뭇 낯설게 보인다. 그리고 나를 돌이켜 본다. 내가 있는 2층과 연결된 별관에 들러 시원한 커피를 사들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태양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7월 말의 산 중턱에 순간을 붙잡는 자명한 존재들이 모여 있다. 집중해서 읽는 글자들이 어떤 때는 기지개를 켜듯 선과 곡선이 꿈틀거리기도 한다. 혹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자음과 모음을 걸치거나 사이사이로 생겨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글자가 내미는 의미와 맥락을 정리하면서 시원하게 만들어 내는 진실들이 오늘 하루를 맞이하는 내게 일말의 소식을 전한다. 이 소식은 잊지 않고 늘 때때로 챙겨야 하는 정신의 알약이 될 것이다.
도서관을 나와 시내 방향으로 조금 걸어 내려오다 같은 성당을 다니며 평신도 모임에서 함께 활동했던 분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렀다. 대여섯 평 남짓한 조그만 식당이지만 주메뉴인 시래깃국이 별미라 고정 단골이 여럿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인은 지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민 얼굴이라 정신없이 인사를 주고받고 자리에 앉으니 고등어찌개가 맛있게 되었다며 권한다. 평신도 모임을 열렬하게 다니면서 신앙심을 키웠던 주인은 지금은 교회에 다닌다고 했다. 그러고는 어쨌거나 믿는 존재는 한 분이니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였다. 나도 마땅히 주인의 의견에 동참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지금 순간’에 들어오는 명확한 사실만이 중요하다. 종교를 ‘갈아탄’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를 믿고 의지하든 명쾌하게 바로 이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지금-여기-나’를 온전히 느끼면서 명백하게 현존을 실감하는 자리다. 책을 읽든,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판단을 내리든 그러한 진실 하나쯤은 무더위를 이겨낼 시원한 부채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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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라 왈리, 카탈라니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
“카탈라니는 가장 풍부한 영감의 소유자였다. 푸치니마저도 그를 질투했다. 그가 그려내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거장 토스카니니는 작곡가 카탈라니를 이렇게 평가했다. 알프레도 카탈라니(Alfredo Catalani, 1854~1893)는 푸치니와 같은 이탈리아 루카에서 태어났다. 카탈라니가 푸치니보다 네 살 먼저 태어났고, 대중에게 먼저 이름을 알린 사람도 카탈라니였다.
그는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뒤 스물여섯 살이던 1880년 두 번째 오페라 ‘엘다’를 초연하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계를 좌우하던 출판사이자 흥행사인 리코르디가 푸치니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카탈라니는 늘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1892년 회심의 역작 ‘라 왈리’를 초연했으나 끝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이듬해인 1893년 8월 7일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9세였다. 훗날 토스카니니는 그를 기리기 위해 자신의 딸 완다의 애칭을 ‘왈리’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딸 완다는 훗날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결혼했다.
오페라 ‘라 왈리’는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을 배경으로 한 비극적인 로맨틱 드라마다. 아버지는 딸의 연인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다른 남자와 결혼하든지 집을 떠나라고 강요한다. ‘그러면 멀리 떠날게요(Ebben, Ne andrò lontana)’는 왈리가 집을 떠나며 부르는 아리아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연인과 다시 만나지만, 갑작스러운 눈사태가 연인을 삼켜 버리고, 절망한 왈리 역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러면 멀리 떠날게요. 마치 멀어지는 종소리처럼, 하얀 눈밭 사이로, 황금빛 구름 사이로. 희망도 있지만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고통도 있죠. 오, 내가 태어난 집이여. 나는 이제 아주 멀리 떠나요.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다시는 당신들을 보지 못할 거예요. 홀로 멀리 떠납니다. 마치 멀어지는 종소리처럼, 하얀 눈밭 사이로, 황금빛 구름 사이로.”
열정과 복수심, 연민 등 낭만주의 오페라의 요소를 두루 갖춘 왈리라는 인물도 매력적이고, 거듭 반전되는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음악 또한 뛰어나다. 그럼에도 작곡가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고, 무엇보다 푸치니라는 거대한 존재의 그늘에 가려 이 오페라는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아리아만큼은 많은 소프라노가 꾸준히 무대에서 불렀다. 1981년 장 자크 베넥스 감독의 영화 ‘디바’에 삽입되면서 다시 한번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프랑스 영화감독들이 클래식 음악을 극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다. 뤽 베송이 ‘제5원소’에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레오 카락스가 ‘퐁뇌프의 연인’에서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인상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베넥스 역시 이 아리아를 통해 왈리에게 닥쳐올 비극적인 운명을 미리 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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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서면1번가 '복붙 용역'으로 상권 활성화 되겠나
부산 부산진구 서면1번가 자율상권구역은 지난 4월 중소벤처기업부와 부산시가 주관한 ‘2027년 상권 활성화 사업’ 공모에 최종 선정됐다. 이 구역은 서면로68번길과 신천대로62번길 일원으로 직선거리 약 730m 규모의 전형적인 중심 상업지역이다. 부산진구는 이번 사업 공모를 통해 총 70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했으며, 내년부터 2031년까지 최대 5년간 상권 특성에 맞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빛거리 및 특화거리 조성, 빈 점포 활용 사업, 축제 개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포함된다. 하지만 서면1번가 활성화를 위한 용역 결과와 사업 선정 근거가 부실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
부산진구는 지난해 8월 ‘자율상권구역 지정 및 상권 활성화 종합계획 수립 용역’에 착수해 올해 3월 마무리했다. 부산진구의회는 사업 의견 청취를 통해 이 용역이 같은 업체가 금정구에서 수행했던 용역 결과 보고서 내용과 틀을 그대로 가져와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연구 개요, 사례 분석 등 금정구 상권 활성화 종합계획 수립 연구와 중복되거나 일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부산진구의 행정 현황을 설명하는 단원에는 금정구의 새 ‘까치’가 버젓이 나온다. 보고서 일부에는 ‘부산진구’ 대신 ‘금정구’라는 표현이 나와 ‘복붙 용역’ 논란도 인다. 부산진구가 용역 보고서 내용도 제대로 검수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서면1번가 일원이 상권 활성화 사업대상지에 선정된 데 대한 타당성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용역이 시작된 지난해 8월 당시 서면1번가 자율상권구역은 미지정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 상인, 임대인, 토지주 등으로부터 자율상권구역 지정 동의 접수를 받았고, 용역이 종료된 올 3월 자율상권구역 지정 승인을 받았다. 전포카페거리, 서면 만취길 등 부산진구 타 상권과 객관적 비교·분석 없이 초기 단계부터 서면1번가를 사업대상지로 사전 지정했다는 것이다. 상권 쇠퇴 근거로 제시한 사업체 감소 현황도 서면1번가 통계가 아니라 부전2동 전체여서 자료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니 용역 타당성과 사업 선정 근거에 대한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침체한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예산을 지원하는 ‘상권 활성화 사업’은 2024년 시작됐다. 부산에선 동구와 남구가 2024년 선정됐고, 지난해에는 금정구, 사하구, 기장군이 뽑혔다. 부산진구가 올해 선정되면서 젊음의 거리, 전포카페거리 등 인근 상권에 비해 유동인구가 감소해 침체한 서면1번가 상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용역 보고서에 대한 부실한 감수와 사업대상지 추진 절차의 행정적 하자 등 논란으로 사업의 부실이 우려된다. 부산진구는 사업 추진의 밑그림이 될 용역을 제대로 검수하고 행정적 절차에 대한 타당성을 입증해 이를 해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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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범천기지창 현실성 없는 용역, 지역에는 기회비용
부산 숙원 사업 중 하나인 부산진구 범천동 철도차량정비단 이전 개발 사업(이하 범천기지창 사업)이 언제 다시 본궤도로 돌아올지 모르는 위기에 놓였다. 코레일이 해당 사업 계획 재검토 용역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2020년 6월 예비타당성 조사에 통과한 이 사업이 기존 조사 기한 경과로 계획을 다시 짜야 할 상황이다. 6년 넘도록 사업 진척 없이 희망고문만 한 꼴이다. 앞으로 사업 재검토, 예타 등에 18개월이 더 필요하다. 기간 내 개발 방향이 잡힌다고 해도 사업자 공모 등도 다시 진행해야 한다. 두 기관은 사업 가능성을 높인다는 이유를 내밀지만, 애초에 계획을 잘 세웠다면 맞딱뜨리지 않았을 상황이다.
범천기지창 이전은 시민의 힘으로 얻어낸 결과다. 1904년 현 위치에 들어선 범천기지창은 도시가 발달하면서 부산 중심부 동서 단절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급기야 2007년 부산진구가 국토부에 이전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일이 100만 국민서명운동 등 범시민운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정부 호응을 이끌어냈다. 부산시 등도 기회 있을 때마다 ‘부산형 판교’ ‘4차 산업 공간’ 등 홍보에 열을 올렸다. 실상은 달랐다. 땅값 등 초기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하는 사업 구조 탓에 나서는 사업자가 없었고 사업 계획도 바뀌었다. 처음에 전체 부지 중 9%선이던 주거 비율이 나중에 30%로 뛰었다. 최근엔 40%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부산 숙원 사업 지연 사례들이 번번이 중앙부처 공공기관이 관여한 사업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화가 치밀 지경이다. 행정력 낭비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부산 도시 경쟁력마저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부산항만공사(BPA)가 주도하는 북항 랜드마크 부지 개발도 범천기지창 사업과 데칼코마니다. BPA는 수십억 원을 들여 수차례 연구용역을 진행하고도 실행 가능한 개발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다. 민간 사업자 찾기에 잇따라 실패하고는 또다시 10억 원이 넘는 타당성 검토 용역을 추진하기로 했다. 코레일과 BPA 모두 구체적 사업 계획을 제시하지 못한 채 검토와 분석으로 시간만 보내고 있다. 시민보다 기관 이해와 책임 모면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 아니겠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부산 숙원 사업의 거듭된 차질이 부산 미래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방 시대를 선언한 정부가 ‘5극3특’ 전략, 2차 공공기관 이전 등 지방을 살리기 위한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지방엔 다시 없을 기회이고, 지방정부마다 경쟁에 이길 묘안을 짜느라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도 광주 군 공항 부지가 있어 800조 원대 메가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었다. 부산은 도심에 가용한 부지를 때 맞춰 조성만 했더라도 엄청나게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었다. 부산의 50년, 100년 도시 경쟁력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하나둘 지워질 판이어서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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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디언식 기우제'라도 지내라고?
부울경은 현재 용광로다. 오죽하면 슈퍼급 태풍을 고대할까. 우리나라 122년 기상 관측 사상 하루 최고 기온이 3회나 갱신됐다. 양산시 상황이다. 양산시 일 최고기온은 지난달 31일 41.4도로 122년 만에 일 최고기온 기록을 세운 뒤, 지난 1일에는 41.6도로 그 기록을 갈아치웠고, 다음날인 2일은 42.5도로 신기록을 세웠다. 전국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면 ‘자랑’이란 단어가 먼저 떠올라야 정상이다. 하지만, 양산시는 울상이다.
기상청과 양산시는 혹시나 자동기상관측장비(AWS)가 고장났을까 봐 긴급 점검을 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양산시에서 관측된 역대 최고기온 기록이 신뢰할 만한 기록인지 확인하고, 관측자료의 정확성과 장비의 정상 작동 여부를 최근 확인한 것이다. 아쉽게도 기계는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었다.
점검 결과 장비의 설치 기준인 지면에서 1.2~2m 높이를 잘 지키고 있었고, 운영 기준도 준수해 관측자료의 신뢰성은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도로의 열기를 식히기 위한 살수차가 동원됐다. 양산시가 도로 살수를 시작하자, 인근 밀양시 주민들도 마음이 급했다. “우리도 더운데, 왜 없냐”란 주민들의 원성에 밀양시도 살수차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사실 경남 무더위의 대명사는 밀양이었다. 영화 ‘밀양’으로 전국에 알려진 밀양은 한때 경남에서도 기온이 높기로 소문이 나 한자어 그대로 ‘볕이 빽빽한 고장’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 더위의 대명사를 이번에 ‘양프리카’(양산이 덥다고 아프리카에 빗댄 표현)에 뺏긴 밀양의 마음이 시원할지 섭섭할지 궁금하다.
더위가 특정 고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울경 대부분이 폭염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18개 시군 가운데 14개 시군이 폭염중대경보가 발령될 정도로 뜨겁다. 폭염중대경보는 하필 올해부터 기상청이 도입한 폭염특보의 최상위 경고 단계이다. 기상청은 기후변화에 따른 극한 폭염에 대응하여 국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6월부터 이 제도를 적용했다. 기존 폭염경보가 내려진 상태에서 일 체감온도가 38도 이상이거나, 일 최고기온이 39도 이상이 되는 조건 중 하나라도 하루 이상 예상될 때 폭염중대경보가 내려진다.
폭염경보는 일 체감온도가 35도 이상이 이틀 이상 지속할 때 발령하는데 그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폭염중대경보에 밀양도 예외는 아니어서 연일 어르신들의 외출 자제를 당부하는 동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 시골집 오래된 에어컨이 고장 났다. 찬 바람이 나왔다 안 나왔다 하는 상태라고 했다. 노모는 혹 실외기가 폭염에 뜨거워서 그런지 모르겠다며 마대로 그늘까지 만들어 주었으나 상태는 영 시원찮았다. 이대로 여름을 나겠다고 교체를 마다했지만, 신형 에어컨을 잽싸게 온라인 구매했다. 이틀 만에 설치된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는데 설치가 하루 미뤄졌다. 처음엔 이대로 여름을 지내겠다고 고집했지만, 배송이 하루 늦어지자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 완전 이해됐다.
폭염의 지속에는 가뭄이 한몫하고 있다. 대지의 열기는 비로 식혀야 하는데 비가 도무지 오지 않는 것이다. 가물어도 너무 가물다. 통계도 가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올해 경남의 누적 강수량은 최근 6개월 동안 556mm였다. 최근 5년간 같은 기간 평년 강수량은 853.8mm여서 평년의 65.1% 수준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옛사람의 방식이라도 따라야 했던 모양이다. 지자체 곳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시작은 창녕군에서 했다. 지난달 28일 창녕사직단에서 성낙인 창녕군수가 초헌관, 창녕군의회 박재홍 의장이 아헌관으로 하늘에 비를 구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폭염 대명사가 된 양산시도 이에 질세라 지난달 30일 가야진사에서 나동연 양산시장이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 이후 양산은 단 10분간이지만, 비가 왔다고 한다. 조금만 더 주시지. 지난 3일 차석호 함안군수도 함안 충의공원 당산유적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그래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라도 지내자 ‘인디언식 기우제’는 비가 내릴 때까지 지낸다고 하니.
다행인 것은 경남의 상수도 상황은 아직은 건재하다. 낙동강이라는 천혜의 자원이 있고, 도서 지방도 수차례의 가뭄에 대비가 잘 돼 있기 때문이다. 산간 지방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물차가 출동하고, 연일 폭염과 가뭄 대책 회의가 진행되지만, 하늘은 좀체 비를 내려 주지 않는다. 오존경보, 녹조경보도 일상화 됐다. 전 세계적인 기후위기 현상이다. 지난 지방선거 기간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은 다양한 기후공약을 제안했지만, 지차제장 후보의 기후공약 제시 비율은 30%에 불과했다. 낙제점이다. 탄소다배출 지역인 경남의 획기적인 기후 대응 정책은 토건성 개발 공약에 밀렸다. 하늘은 이 사실을 다 안다. 폭염에 따른 이 고통은 그래서 우리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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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AI 글라스 커닝
지난달 중국 광둥성의 대학에서 한 학생이 스마트 기능을 갖춘 AI(인공지능) 글라스를 끼고 시험을 치다가 감독관에게 적발됐다. 이 글라스는 착용자가 내장된 초소형 렌즈를 이용해 AI에게 질문하고 답을 전해 받는 기능을 갖고 있다. 착용자가 안경테를 건드려 시험지 사진을 찍으면 AI가 시험 문제를 분석해 검색한 추천 정답을 안경에 프롬프터처럼 띄워주는 방식이다. AI 글라스 커닝 사태가 발생한 이 대학은 감독관들이 휴대용 금속 탐지기로 검사키로 한 데 이어 안경 종류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등 시험장 보안을 대폭 강화한 상태다.
기존 AI 커닝 방지책은 학생들이 각종 제출 과제를 직접 작성하지 않고 생성형 AI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이제는 정교한 기능을 갖춘 AI 글라스 등 최첨단 스마트 기기들이 속속 출시되면서 고사장에서 직접 실시간으로 커닝하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5~6월 토익 시험에서 AI 글라스를 이용한 부정행위 시도가 있었고, 산업기사 컴퓨터기반시험에서도 수험생들이 적발되는 일이 발생했다. 특히 이동통신 3사는 최근 메타의 AI 글라스 ‘레이밴 메타’와 ‘오클리 메타’ 국내 판매를 시작했다. 이전에도 해외 직구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제품을 구할 수 있었다. 이들 제품은 사진·영상 촬영과 통화, 음악 재생, 음성 AI 등의 서비스를 스마트폰을 꺼내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다.
AI 글라스를 사용한 커닝 등 시험 부정행위 우려가 높아지면서 대학 등 교육 당국에도 비상이 걸렸다. 교육부는 AI 글라스를 반입 금지 물품에 포함하고, 수험생들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주의 깊게 살피라는 공문을 시도 교육청에 보냈다. 인사혁신처도 안경 착용 수험생 전원을 대상으로 AI 글라스 여부를 확인토록 하는 절차를 도입했다. 법무부도 내년 변호사시험부터 AI 글라스 소지 여부를 확인할 예정이다. 하지만 AI 글라스 최신 모델은 일반 안경과 거의 흡사해 육안만으로 구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AI 글라스에 이어 스마트 콘택트렌즈 등 초소형 AI 기기도 개발 단계에 있는 만큼 시험 부정행위 감시 방식에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시험장 녹화는 물론 탐지기 상시 도입 등으로 향후 끊임없이 등장할 새로운 최첨단 커닝 수법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 발전이 초래한 다양한 AI 커닝 소식이 씁쓸하기만 하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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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관광데이터의 나아갈 길
연일 최고기온 기록이 갱신되고 있다. 사람들은 무더위를 피해 바다를 찾고, 야간 관광지를 찾으며, 시원한 실내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되는 것일까. 답은 데이터에 있다. 스마트폰을 누르는 손가락 하나, 검색창에 입력하는 단어 하나, 길을 걷는 발걸음 하나까지 모두 데이터가 된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매일 데이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관광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관광 데이터는 관광객 수, 숙박객 수, 관광지 방문객 수처럼 관광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숫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데이터는 관광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지만, 관광객이 왜 그 장소를 선택했고 어떻게 이동했으며 무엇을 경험했는지는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필자는 이러한 데이터를 ‘평면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관광객 수로 나타난 평면 데이터
다른 정보 조합되면 입체 데이터
무연결 정보 남발 데이터 카오스
새로운 데이터의 중심 축은 시간
미래 세대가 복원할 관광 위해선
시점에 충실한 정보 연결이 중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위치정보와 소비기록, 검색기록, SNS, 사진과 영상, 교통정보, 날씨, 이동경로 등이 서로 연결되면서 한 명의 관광객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각각의 데이터는 작은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는 순간 하나의 관광 경험이 완성된다. 이 같은 데이터는 더 이상 숫자의 집합이 아니라 사람과 공간, 행동과 경험을 함께 설명하는 ‘입체 데이터’로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입체 데이터는 단순히 데이터의 양이 많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로 다른 성격의 데이터가 시간과 공간, 사람과 경험이라는 공통된 맥락 안에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관광객이 언제 어디를 방문했고, 무엇을 소비했으며, 어떤 감정을 남겼는지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데이터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관광의 맥락을 설명할 수 있는 자산이 된다. 데이터의 미래는 누가 더 많은 양을 모았는지보다 누가 더 깊게 연결할 수 있느냐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나 입체 데이터의 시대가 곧바로 이상적인 미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너무 많은 데이터가 생성되면서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데이터가 넘쳐날수록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서로 다른 데이터들이 연결되지 못한 채 흩어지는 ‘데이터 카오스’의 시대가 올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미래에는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는 것이 경쟁력이 아니라,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연결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데이터 카오스를 무엇이 정리하게 될까. 필자는 그 중심축이 ‘시간(Time)’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데이터는 주로 공간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어디를 방문했고, 어디에서 소비했으며, 어디에서 사진을 찍었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시간축을 따라 데이터가 연결되기 시작할 것이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시점에 사람들은 어떻게 움직였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했는지가 하나의 이야기로 복원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 순간 관광은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한다. 우리는 더 이상 현재의 공간만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도 경험하게 될지 모른다. 물론 물리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한 데이터가 축적되고 이를 시간축을 따라 재구성할 수 있다면 미래의 사람들은 2026년 부산의 거리와 시장, 바다와 축제, 사람들의 일상까지 실제처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 속 타임머신은 아니지만 관광의 관점에서는 시간여행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 될 수 있다.
관광은 원래 시간을 소비하는 산업이었다. 그러나 미래의 관광은 시간을 소비하는 산업을 넘어 시간을 복원하는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를 기록하는 수준을 넘어 특정 시점의 과거를 다시 체험하게 만드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 출발점에는 결국 데이터가 있다.
그렇다면 부산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이제 중요한 것은 관광객 숫자를 하나 더 세는 일이 아니다. 미래 세대가 오늘의 부산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오늘의 부산을 얼마나 충실하게 기록하고 연결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데이터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미래 관광을 위한 시간의 자산이 될 수도 있다.
부산의 관광데이터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필자의 답은 분명하다. 평면 데이터를 넘어 입체 데이터로, 입체 데이터를 넘어 시간축으로 연결되는 데이터로 나아가야 한다. 미래 관광의 경쟁력은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때 비로소 부산의 관광은 공간을 넘어 시간을 여행하는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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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티어] 래디컬한 미래를 상상하기
한때, 근사한 디자인을 하고 차별적인 네이밍을 하면 브랜딩이 될 줄 알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브랜드는 겉모습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와 지역, 문화라는 맥락 속에서 낡고 멋없고 비루하다고 여겼던 과거로부터 그저 무작정 도망치지만은 않는 채, 그 오래된 연결의 무게 앞에 책임감 있게 열려 있으려고 하는 것. 어쩌면 브랜딩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생존과 매출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더 넓은 그 어떤 세계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과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브랜드가 될 수 있을까.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나는 보고 싶다. 누군가 진정성을 가지고 도전하는 모습을. 쉬운 길보다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하고, 때로는 실패하고 흔들리면서도 끈질기게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나도 팬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 마음의 한 자락을 기꺼이 쏟을 수 있는 그런 브랜드를 언제나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리고 나도 역시 그런 브랜드를 향한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다.
부산 브랜딩 향한 담대한 꿈
그 출발은 바다일 수밖에 없어
바다는 섞임과 교류,
다양성과 개방성의 공간
경계를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곳
해양도시 진취적 자극 통해
부산만의 바다 정신 발견하기를
부산도 그러하다. 부산은 바다와 함께 만들어진 도시다. 한반도에서 해양 세력에게 열려졌던 유일한 곳, 해양 세력과의 불온한 사이의 공간이자 섞임의 장소, 분단 이후 남쪽 한반도의 가장 큰 항구, 임시수도, 해양수산 산업의 메카. 바다와 관련된 기억은 이 도시에 헤아릴 수 없는 무게로 겹겹이 쌓여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돈도 되지 않는 해양수산을 왜 붙들고 있느냐고. 하지만 과거와의 단절을 너무 쉽게 말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생존을 위해 앞으로 달려가더라도, 마음 한편에는 후회와 반성의 흐름을 진지하게 품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무엇을 다시 이어야 하는지, 더 나은 삶과 도시와 문명은 어떤 모습인지 계속 묻고 또 시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에 ‘미래부’가 필요하다. 당장의 성과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질문을 붙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연구하는 조직. 아주 래디컬하게 말이다.
부산에서 그 질문은 바다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지금 바다의 가장 큰 문제는 지속가능성이다. 이렇게까지 훼손 되어가는 자연을 단순한 보전을 넘어, 어떻게 회복해 낼 것인가, 이를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며 의사소통하는 가버넌스 또는 커먼즈를 활성화하는 형태로 말이다. 이런 래디컬한 질문 앞에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야심 찬 아이디어들과 시도들이 도출되고 또 전개되어 가고 있다.
MSC(해양관리협의회)의 지속가능어업 방법론, 슬로피시 무브먼트와 필리핀 네그로스섬 사례, 전 세계 바다의 최소 30%를 효과적으로 보전하자는 30×30 목표, 그리고 전 세계 다양한 임팩트 재단과 펀드, UN과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남아공의 지속가능어업 소셜벤처 ABALOBI 등 이런 대안적 질서를 꿈꾸는 상상력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한 비즈니스모델과 과학기술의 접목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바다의 도시로서 부산은 이런 글로벌한 트렌드와 고민에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
바다는 본래 섞임과 교류, 다양성과 개방의 공간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경계를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곳이었다. 그레이버와 같은 인류학자는 바다 해적 사회의 다양성과 개방성이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를 만들어냈고, 이것이 유럽 계몽주의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진취성이 바다의 특징이라면, 그것은 바다의 도시 부산을 계속 자극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시민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커먼즈, 그 운영 원리로서의 직접민주주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섞이며 만들어가는 상호문화주의. 이렇게, 바다의 도시 부산 앞에는 새로운 문명을 발견할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다.
부산이 바다의 정신을 다시 발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포틀랜드’를 뛰어넘는 문화를 가진 도시가 되기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도시가 되기를. 이런 브랜딩의 꿈을 부산도 끈질기게 놓지 않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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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리터러시] 스마트폰과 학업 성적
올해 초 대학 입학 시기에 우리나라 부모들이 깜짝 놀랄 뉴스가 전해졌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아들이 서울대 경제학부에 합격한 소식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스마트폰과 게임을 완전히 끊고 공부에 몰입한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뉴스를 접하고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마 무릎을 치며 “역시 스마트폰을 끊어야 공부를 잘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학생들의 지속적인 주의력과 집중력을 방해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스마트폰과 SNS로 대변되는 오늘날 미디어 생태계는 중독 기술(Addictive Technology)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숏폼 콘텐츠와 끊임없는 실시간 알림은 학생들의 뇌 도파민 회로를 자극하여 스마트폰의 스크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분석에 따르면, 디지털 기기 사용과 수학 학업 성취도와는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데이터가 나왔다.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1시간 늘어날 때 수학 점수는 3점씩 하락했다. 반면, 수업 중에 SNS와 앱의 알림을 꺼 둔다는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27점 높은 성취를 보여줬다. 요컨대, 스마트폰 기기 자체가 학생들의 몰입도를 방해하여 학업 성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스마트 기기의 부작용은 IT 전문가들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스마트 미디어 환경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스티브 잡스는 가정 내에서 자녀들이 아이폰과 아이패드 사용하는 것을 철저히 제한했다. 빌 게이츠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녀의 스마트폰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으며, 14세가 될 때까지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하고 특히 가정 내 식탁에서는 금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쯤이면, 전 세계의 부모들은 잡스와 게이츠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그럼 우리 부모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자녀들이 경험하고 있는 스마트 미디어 환경을 이해하기 위한 ‘디지털 리터러시’ 공부를 스스로 해야 한다. 나아가 자녀들과 자기 주도적인 미디어 이용에 관한 대화를 시도하면서 가정 내에서 부모 스스로가 절제되고 선택적인 디지털 기기 단절을 위한 모범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준비기에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디지털 강국이라는 미명아래 전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학업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손에 쥐어준 채 자신의 의지력만으로 극복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가혹하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스마트폰 좀 그만해라’라고 윽박지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이라도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할 때 현관문 앞에서 스마트폰을 끄고 집으로 들어가는 작은 실천을 시도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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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들불의 시간, 밀양아리랑
‘밀양아리랑’은 들판과 강바람이 빚어낸 노래다. 정선아리랑이 첩첩한 산맥의 깊은 울림이라면, 밀양아리랑은 넓은 들녘과 사람 사는 마을의 숨결 속에서 태어난 노래에 가깝다. 빠르고 경쾌한 가락은 밀양강 물길처럼 힘차게 흐르고, 흥을 돋우는 장단 속에는 삶의 고단함마저 웃음으로 견뎌내려 했던 영남 사람들의 기질이 스며 있다. 그래서 밀양아리랑은 단순히 흥겨운 민요가 아니다. 웃음 속에서도 삶을 놓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생활 철학이 담긴 노래다.
필자 역시 밀양이라는 공간을 떠올리면 먼저 강과 들판의 풍경이 생각난다. 아침 안개가 밀양강 위로 천천히 번지고, 넓은 들녘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산골의 적막과는 다른, 사람의 온기가 살아 있는 풍경이었다. 장터로 향하는 발걸음과 논두렁 사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저녁 무렵 마을 어귀에서 들려오던 노랫가락은 삶이 힘겨워도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밀양의 삶은 오래전부터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이어져 왔다.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사람과 살림살이를 모이게 했고, 장터와 마을에는 늘 사람 사는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흥겨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난과 이별, 긴 노동의 시간 또한 이 땅 사람들의 삶 속에 함께 존재했다. 밀양아리랑은 바로 그런 현실 위에서 태어난 노래다. 힘겨운 삶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불렀고,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함께 가락을 이어갔다.
우리는 흔히 밀양아리랑을 흥의 노래로 기억한다. 실제로 “날 좀 보소”로 시작되는 익숙한 가락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쾌하고 정겨운 정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안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단순한 흥 이상의 감정이 스며 있다. 웃으며 노래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삶의 애환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담겨 있다. 흥은 슬픔의 반대가 아니라, 슬픔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특히 밀양아리랑은 혼자 부를 때보다 여럿이 함께 부를 때 더욱 살아난다. 장터와 마을 잔치, 들일과 놀이판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맞추며 가락을 이어갔다. 누군가 한 소절을 시작하면 다른 이들이 뒤따라 흥을 더하고, 개인의 외로움은 공동체의 웃음 속으로 스며든다. 함께 노래하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견디게 했고, 노래는 공동체를 이어주는 힘이 되었다. 밀양의 골목과 장터마다 아리랑이 오래도록 이어져 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밀양의 풍경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오래된 시장은 하나둘 사라지고, 사람 냄새 가득하던 골목과 마을의 정취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삶은 편리해졌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어울리던 공동체의 시간은 예전 같지 않다. 그럴수록 오래된 민요가 품고 있는 삶의 기억은 오히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밀양아리랑은 단순히 흥을 돋우는 노래가 아니다. 삶의 무게를 서로의 목소리로 견디게 만든 노래다. 밀양강 바람을 따라 오래도록 흘러온 그 익숙한 가락은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말하고 있다. 사람은 결국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함께 부르며 견뎌내는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