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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부산시장 후보들 곁에 문화전략가는 있는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시가 부산오페라하우스의 개관 공연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오텔로를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시는 오텔로의 3회 공연에 105억 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다. 시 정책이니, 이는 박형준 부산시장이 추진해 온 문화정책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세계적 문화기관과 콘텐츠를 적극 유치해 부산의 도시 브랜드와 문화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부산시장 후보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퐁피두센터 부산분관 건립과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 예산을 ‘혈세 낭비’로 규정하며 관련 사업의 집행을 중단한 뒤 이른바 ‘부산 민생 100일 비상조치’에 재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부산의 문화정책을 둘러싼 최근 논란은 6·3 지방선거와 맞물리며 단순한 예산 공방을 넘어서는 양상이다. 특히 세계적 문화 프로젝트를 통한 도시 도약이냐, 민생 중심의 재정 재편이냐를 둘러싼 논쟁은 부산이 어떤 문화적 미래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 부산오페라하우스 정체성 고민을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의 문화정책 방향은 뚜렷하다. 세계적 문화기관과 콘텐츠를 적극 유치해 도시 브랜드와 문화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추진, 해외 유명 건축가를 활용한 특별건축구역 사업, 그리고 라 스칼라 극장의 오텔로 개관 공연 추진까지, 그 흐름은 하나로 이어진다. 외부의 성공 모델과 세계적 브랜드를 부산으로 가져오면 도시 경쟁력도 함께 높아질 것이라는 인식이다. 물론 이런 접근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기는 어렵다. 문화는 때로 외부 자극과 교류를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공연과 기관 유치는 도시 인지도를 높이고 관광 산업에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국제도시를 지향하는 부산이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 구축에 나서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전략이다. 실제 세계 주요 문화도시들도 국제 교류와 협업 속에서 성장해 왔다.
문제는 지금 부산시의 정책이 교류보다는 외부 의존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라 스칼라 프로젝트는 그 상징성이 크다. 부산시는 개관 시즌에 약 105억 원을 투입해 오텔로 3회 공연을 추진할 계획이다. 지역 문화계에서는 “부산 예술인 지원 예산보다 더 많은 돈이 단 세 차례 외국 공연에 투입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예산은 부산문화회관 7개 극장의 연간 기획사업비의 수배에 이르고, 시립예술단 전체 사업비를 크게 웃도는 규모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액수 자체보다 그 막대한 비용이 부산의 문화 생태계에 무엇을 남기느냐에 있다.
개관 공연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부산오페라하우스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시민에게 처음 선언하는 상징적 무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왜 지금 부산에서 이 작품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혹자는 이야기할 것이다. 오텔로가 부산과 전혀 무관한 작품이 아니라고. 바다와 항구, 폭풍 등 요소는 해양도시 부산과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징만으로 부산의 문화적 정체성을 충분히 담아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번 개관 공연은 부산이 자체 제작한 콘텐츠가 아니라 라 스칼라의 완성된 작품을 들여오는 방식이다. 개관작은 오랫동안 부산오페라하우스의 정체성을 규정할 상징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더욱 신중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만약 지역 예술가와 기술진이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개관 시즌 전체를 부산의 해양성과 연결하는 기획으로 확장하고, 공연 이후 지역 레퍼토리와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구조까지 그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세계적 극장 초청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지역 생태계 성장과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없었다. 한 발짝 양보해 개관 창작 오페라로 논의되었던 ‘새야 새야’가 오텔로와 동등한 상징성을 가지고 함께 추진됐다면 논란은 덜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점에서 박 후보는 뼈아픈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부산오페라하우스는 과연 부산만의 콘텐츠를 축적할 준비를 해 왔는가”, “수년간의 준비 기간 지역 창작 오페라와 제작 시스템, 인재 양성 시스템을 얼마나 구축했는가?”
■ 문화 투자 자체 위축 불러올 수도
그렇다고 전재수 후보의 접근 역시 결코 건강해 보이진 않는다. 어쩌면 더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전 후보는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과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 예산의 집행을 중단한 뒤 이를 민생 예산으로 돌리겠다고 했다. 확보한 재원을 통해 영세 화물차주 지원, 공공요금 부담 완화, 전통시장·소상공인 에너지 바우처 지급, 동백전 캐시백 확대 등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시민 생활 안정을 위한 정책은 정말 필요한 정책이다. 이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문화 예산을 사실상 ‘불요불급한 비용’, 즉 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예산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문화정책을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접근이다. 문화 투자를 도시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자로 보기보다 경기 상황이 어려우면 언제든 삭감할 수 있는 비용 정도로 인식한다는 얘기다. 이런 시각이 확산될 경우 문화 투자 자체가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는 ‘기업 하나 유치하는 것이 미술관이나 박물관 하나 세우는 것보다 낫다’라는 식의 단순 경제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도시 경쟁력은 기업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문화적 자산을 갖고 있으며, 시민들이 어떤 문화적 경험을 누릴 수 있는가가 도시의 품격과 미래 가치를 좌우하는 시대다. 이런 측면에서 두 사업을 모두 중단하고 관련 예산을 민생 예산으로 돌리겠다는 구상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문화 예산을 줄여 단기 민생 예산으로 돌리는 방식은 정치적으로 즉각적인 호응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도시의 장기적 성장 기반을 잠식할 위험도 크다. 더 심각한 것은 전 후보의 발언 어디에서도 “그렇다면 부산 문화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못된 사업을 비판하는 것과 문화 투자 자체를 위축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문화정책 예산 안에서의 수평 이동이나 세부 항목 조정, 사업 방식에 대한 구체적 대안 없이 막연히 ‘민생 예산’을 언급하는 것은 결국 표 계산에만 치우친 접근처럼 비친다. 이는 지역 문화예술계에 대한 무성의 일 분 아니라, 그동안 퐁피두 사업을 비판해 온 이들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태도로 읽힌다. 적어도 부산시장 후보라면 단순한 찬반 구도에 갇혀서는 안 된다. 문화는 도시의 사치품이 아니다. 도시 경쟁력을 구성하는 핵심 자산이다. 이점을 전 후보가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문화 관점서 도시 고민해 줄 사람 필요
박 후보는 세계적 문화기관과 외부 브랜드 유치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고, 전 후보는 문화 예산을 우선순위에서 밀려도 되는 비용처럼 접근하고 있다. 문화정책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두 후보 모두 균형 잡힌 문화정책이라고 할 순 없다. 외부 문화 자원과 지역 문화 생태계 육성은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할 상호 보완 전략에 가깝다. 부산에 필요한 것도 ‘라 스칼라를 부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단순한 찬반 논쟁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공연 이후 부산에 무엇이 남느냐다. 지역 제작 인력은 성장하는가, 시민들의 문화 경험은 확장되는가, 부산만의 콘텐츠는 축적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사례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대구는 해외 유명 공연 초청에 그치지 않고 지역 성악가와 제작 인력을 육성하며 창작 오페라를 꾸준히 축적해 왔다. 화려한 건물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움직이는 운영 시스템이며, 일회성 이벤트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 문화 생태계라는 점을 보여준다.
부산은 오랜 시간 다양한 문화가 교차해 온 항구 도시였다. 이제는 외부의 명성과 브랜드를 빌려오는 데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축적하는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더욱이 지금은 K컬처가 세계 문화시장을 움직이는 시대가 아닌가.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얼마나 탄탄한 서사와 콘텐츠를 만들어 내느냐다. 서구의 오페라라 하더라도 부산만의 해석과 지역의 문화적 역량이 더해진다면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작품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상상력이 들어갈 틈이 없다는 점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가 추진된 지난 수년간 부산은 과연 어떤 콘텐츠와 문화 생태계를 축적해 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부산의 두 시장 후보를 보고 있노라면 정작 그 전략을 설계할 문화전략가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공방은 요란하지만, 정작 부산의 문화적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부산시장 후보들 곁에는 과연 이 도시의 문화적 미래를 함께 고민할 사람이 있는가?”라고. 지금 문화는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핵심 전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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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세계해양포럼 유엔 공식 프로젝트, 글로벌 플랫폼 도약
세계해양포럼(WOF)이 국제적인 해양 협력 플랫폼으로 도약할 계기를 맞았다. 유엔의 해양 분야 핵심 글로벌 이니셔티브인 ‘유엔 Ocean Decade’의 공식 프로젝트로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부산지역 대표적 컨벤션 행사일 뿐만 아니라 국내 최장수 최대 규모 해양전문 컨벤션 행사로 자리잡은 WOF은 올해 제20회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사람으로 치면 스무살 성인이 될 시기에 질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할 계기를 맞은 셈이 됐다. 지역에서는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 이후 부산이 실질적 해양수도가 되기 위한 조건이 하나 더 충족됐다며 이번 유엔 승인이 부산의 도약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유엔은 이달 초 WOF을 글로벌 협력 프로그램인 유엔 Ocean Decade의 공식 프로젝트로 승인했다. 유엔 Ocean Decade는 유엔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해양과학 10년’을 주제로 2021년부터 2030년까지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유네스코 산하 정부간해양학위원회가 주도하는 이 프로그램은 해양 지식 발굴과 활용을 위한 전 세계 해양 거버넌스와 정책 연계 강화를 목표로 한다. 지식의 생산이 아니라 구체적 활용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WOF이 이 프로그램의 공식 프로젝트로 승인을 받았다는 것은 연구와 논의 중심이 아닌 산업 적용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2007년 부산에서 제1회 행사가 열리기 시작한 WOF은 글로벌 해양 의제를 지속적으로 다루면서 해양과학과 정책, 산업을 연결하는 국제적 해양 지식 포럼으로 성장해 왔다. 유엔의 공식 프로젝트 승인 이전부터 다양한 국가와 기관이 참여하는 협력 구조를 구축해 온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번 승인은 그 구조를 넘어 유엔이 지닌 글로벌 네트워크와 직접 연결됨으로써 해양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간 실행 시스템 구축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향후 국제 공동 프로젝트와 해양 정책 협력을 주도하고 해양 산업 적용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글로벌 해양 실행 플랫폼으로서 WOF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WOF은 지난 19년 동안 기후변화 대응과 블루이코노미, 해양과학 등 어디서도 접할 수 없었던 다양한 해양 의제가 논의되는 핵심 글로벌 플랫폼으로서 지위를 확보했다. 오는 11월 3일 부산에서 제20회 행사 개최를 앞둔 WOF은 이제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유엔의 공식 프로젝트 승인으로 전문가 중심 회의를 넘어 글로벌 해양 거버넌스 구축의 최일선에 설 것을 요청받은 것이다. 이는 개최도시인 부산의 역할 확장과도 곧바로 연결된다. WOF을 기반으로 해양 산업과 정책, 연구를 결합한 실행력을 갖춘 도시로의 성장이 그것이다. 성인이 된 WOF의 도약이 해양수도를 향한 부산의 도약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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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주가 폭등에도 지역 경제는 유가·공급망·금융 삼중 압박
코스피가 7일 장중 7500선을 처음 넘기는 등 주가가 폭등했지만, 그 온기가 부산 지역 중소기업까지 확산하지 않고 있다. 중동 사태로 촉발된 유가 급등, 공급망 교란,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복합충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은 중소·영세 제조업체와 울산의 석유화학, 경남의 철강·기계 산업 등 동남권 제조업을 지탱하는 2·3차 협력업체의 비중이 크다. 예를 들어 울산 석유화학단지가 고유가 충격을 받으면 그 하중이 납품 사슬을 타고 부산의 영세 하청업체들로 전이되는 구조다. 한국은행 부산본부가 이날 발표한 ‘중동 사태가 부산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시사점’ 보고서는 지역 산업 생태계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중동 전쟁 전 배럴당 60달러대의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던 국제 유가는 중동의 원유 생산과 운송 차질로 인해 급등했다. 미국과 이란의 휴전 합의 이후 다소 하락했지만, 여전히 100달러 안팎의 고유가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나프타, LPG 등 석유제품 가격 급등에 따른 고무, 플라스틱 분야 지역 중소 석유화학 제조업체들과 울산·경남 산업과 연계된 2·3차 협력업체들의 생산 차질 가능성이 크다. 유가 상승은 물가 상승과 소비 위축을 불러온다. 외식·숙박·여가 등 선택적 지출을 줄여 관광을 비롯한 지역 서비스업까지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유가 급등에 따른 지역 산업 위축의 파장이 예상보다 큰 것이다.
공급망 충격도 지역 경제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중동 사태로 LNG, 알루미늄 등 주요 에너지·산업용 원자재 공급망이 타격을 받은 상황이다. 정부가 전기·가스요금 동결 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향후 요금 인상이 가시화되면 철강, 석유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 제조업의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따른 중동 지역 해상 운송 차질은 주력 산업인 해운·물류업의 연료비와 보험료 상승을 유발한다. 금융 시장에서 환율 상승은 철강, 섬유 등 수입의존도가 높은 업종의 비용 압력을 증폭시킨다. 중동발 금리 인상 압박은 미분양 누적 등 영향을 받는 건설·부동산 업종에 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지역 경제는 중동 사태로 인해 ‘유가·공급망·금융’이란 삼중 압박을 받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지역 기업들은 대부분 영세해 충격의 파급 영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호황인 자본시장과 침체된 실물 경제의 괴리가 큰 만큼 정부는 취약한 지역 기업의 현실을 세밀하게 살펴서 선제적·맞춤형 지원에 나서야 한다. 지역 산업계도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삼아 조선·방산·해운 등 해양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한은 보고서가 지적한 것처럼 부산은 울산, 경남 등 동남권 광역 협력을 통해 지역 제조업의 신성장 동력과 구조적 대응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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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의 뷰파인더] 보이지 않는 감옥, 에코 체임버 탈출하기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 놀러 갔다가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교장선생님이 서시던 단상에 어깨띠를 두른 아저씨들이 차례로 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관중 일부가 다 같이 이름을 외치니, 박수 소리와 야유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른바 ‘운동장 유세’ 현장이었다.
그 시절 유권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미어캣처럼 눈과 귀를 기울였다. 후보들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무슨 말을 해도 놓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가 없던 시절, 신문이나 TV 뉴스 이외에는 후보들의 언행을 직접 보고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운동장은 밝기만 한 곳이 아니긴 했다. 사람들을 동원해 인지도를 왜곡하거나 싸움을 하고, 돈봉투를 주고 표를 사는 매표 행위가 횡행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연스럽게 후보가 어떤 공약으로 어떻게 일하겠다고 하는지, 말과 행동을 어느 정도 종합하고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90년대 민주화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공직선거법은 투명한 선거를 치르도록 진화했다. 거리 유세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최근 선거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공간을 더욱 파고든다. 수많은 유권자들이 다양한 정보가 넘쳐나는 SNS나 영상 플랫폼에 모여 갑론을박을 벌이고, 거기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여기서 큰 문제가 생겼다. 이전에 비해 손쉽게 후보들을 만나고 정보를 파악하는 장점의 이면에 눈과 귀를 가리는 편 가르기 현상이 심화하고 있어서다. 이것이 알고리즘 추천 온라인 뉴스와 영상의 미로 속에 스스로 갇히는 ‘에코 체임버’다. 내 말과 소리가 세상에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갇힌 공간이라는 의미다. 유권자들이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종이 신문이나 방송 뉴스를 점점 외면하고, ‘네 생각이 옳다’고 맞장구치는 커뮤니티나 유튜브 콘텐츠에 점점 매몰되는 현상을 표현한다.
그나마 과거 ‘운동장’을 경험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청년 세대는 처음부터 전체를 보기 힘들게 됐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사회생활을 하기 전부터 온라인 공간에서 비슷한 무리의 생각에 갇히기 쉽다. 알고리즘이 그들의 생각이 전체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끝없이 유도한다. 그래야 영상과 광고를 더 많이 시청해 매출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최근 20대 남성과 여성의 생각과 가치관이 양극단에 위치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절대다수가 이용하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플랫폼은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한다. 공익이나 견제와 균형, 저널리즘 따위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광고를 보게 할 것인가’가 AI 알고리즘의 유일한 목표다. 그렇게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또래가 많이 본 영상을 지속적으로 추천하는 ‘입소문 시스템’을 강화한다. 절대 ‘필터 버블’ 소우주 밖 은하계를 노출하지 않는다. 그것이 확증 편향인 줄도 모르고, 시야가 점점 좁아져 극단적으로 가짜 정보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제는 미로를 스스로 탈출할 때가 됐다. 경주마의 눈가리개를 치우고 넓게 보려고 안간힘을 써야 한다. 항상 가동되는 내 안의 ‘레드 팀’이 필요하다. 단순한 노력으로 불가능하다. 습관 자체를 바꿔야 한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추천 피드에 의존하지 말고 검색과 시청 기록을 주기적으로 초기화하는 것이다. 자동재생 기능도 꺼야 한다. 알고리즘에만 맡길 게 아니라 내가 주도해 반대 의견을 검색한 뒤 한 건 이상은 읽고 시청하는 습관을 들이자. 유튜브나 네이버 등 한 플랫폼에만 머물지 말고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는 공간과 채널, 커뮤니티를 찾아다녀야 한다. 다른 목소리를 듣는 새로운 계정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강한 콘텐츠를 잘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어떤 정보든 의심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감정적으로 공감되는 그럴 듯한 주장이지만, 출처와 1차 자료를 가지고 교차 검증을 해보면 근거 없는 경우가 많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콘텐츠는 공유하지 않는 게 낫다. 부산일보TV 등 공신력 있는 영상 콘텐츠를 의도를 가지고 무단으로 재가공해 돈벌이를 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유튜버들도 난무하는 상황이다. 그런 이들이 만든 짧은 영상들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심리적 지배를 당하게 된다.
세상 모든 시스템에는 장점과 단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날로그 운동장 유세와 온라인 공간의 장점만 남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영화 맨인블랙의 끝도 없이 확장하는 우주처럼, 나만의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태도가 절실하다. 견디기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어느 쪽이든 무슨 근거로 주장하는지 들어는 보고 판단할 일이다.
6·3 지방선거가 달아오르니 온갖 주장이 난무한다. 고귀한 나의 한 표를 쉽고 편하게 던져 버리고 말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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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부산의 꿈, 피레우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첫 장면에는 주인공이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자유로운 영혼 알렉시스 조르바를 운명적으로 만나는 장소, 피레우스(Piraeus)가 등장한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는 이곳은 고대 아테네가 해상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전략 요충지였다.
피레우스는 수심이 깊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고 있었고, 이런 가치를 알아본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가 군사 항구로 개발했다. 아테네 도심과 피레우스 항구를 잇는 거대하고 긴 성벽을 쌓아, 육로가 차단돼도 바다를 통해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는데, 덕분에 2000년 넘게 아테네 경제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긴 역사를 품은 항구도시 피레우스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여객 항구 중 하나다. 아시아에서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배들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기항하는 항구로, 그리스의 수많은 섬들을 연결하는 허브이며, 지중해 크루즈 여행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람만 오가는 곳이 아니다. 세계 최대 해운 강국인 그리스의 심장부답게 전 세계 선박들이 모이는 핵심 물류 항만이며, 세계 최대 선박박람회 중 하나인 ‘포시도니아’(Posidonia)가 2년마다 열리는 해양 비즈니스의 중심지다.
무엇보다 피레우스는 부산에게 있어 해양 클러스터 ‘선배 도시’임에 틀림 없다. 그리스 정부는 1954년 해양도서정책부를 피레우스로 완전 이전하고, 이후 1967년 관련 특별법을 제정해 해양 클러스터 구축의 근간을 만들었다. 59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는 974개의 해운기업과 2056개의 해양산업 지원서비스 업체, 47개의 정부 산하기관, 54개의 해양수산업계 단체 및 협회가 모여 있다. 해양 관련 금융기관과 학계, 연구기관도 수십 개씩 집적돼 있다. 명실상부 그리스의 해양수도인 셈이다.
대한민국 대표 선사이자 글로벌 8위 해운기업 HMM의 본사 부산 이전 소식이 날아들었다. 본사의 핵심 인력까지 부산으로 내려오는 실질적 이전을 이끌어내는 과제가 남아 있긴 해도, 지역은 환영과 기대로 가득 찼다. 정부의 의지대로 해양수도 구축을 위한 작업이 흔들림 없이 추진된다면, 수십년 뒤 해양수산 분야 민관산학연이 부산 북항과 영도 동삼동에 빽빽하게 자리잡을 것이다. 갈 길이 멀지만 대한민국 해양수도이자 관문이면서 성장 엔진이 될 부산에 진정한 기회의 시간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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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세계적'이라는 주문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중략)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의 시 ‘오월’이다. 계절의 여왕 오월에는 어김없이 가족이 가운데 자리한다. 가정의 달의 거창한 형식보다 “사랑합니다” 한마디가 더 묵직한 계절.그러나 오월, 부산에서는 그 온기를 비집고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든다.
부산시청 집무실 어딘가에는 아마도 이런 지도가 걸려 있을 것이다. 오페라하우스, 퐁피두 분관, 라 스칼라 공연. 점점이 찍힌 세계 지도 위에서 부산은 이미 뉴욕과 밀라노와 파리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형준 시장에게 문화는 브랜드다. ‘세계적’이라는 형용사는 그의 통치 언어에서 가장 자주 소환되는 주문(呪文)이고, 그 주문이 통할 때마다 시민 혈세는 대서양 너머로 흘러간다. 지금 부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문화 행정의 성취가 아니다. 문화 이해의 빈곤을 드러내는 연속극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오텔로’를 세 차례 올리기 위한 업무협약 동의안을 부산시의회가 심의 중이다. 1778년 개관해 2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라 스칼라. 그 이름만으로도 개관 첫날의 포스터는 완성된다. 부산시장 입장에서 이보다 완벽한 홍보 그림도 없을 것이다.
화려한 그림의 이면을 보라. 이 공연 하나를 위해 라 스칼라 측에 지불해야 할 금액은 105억 원으로 추산된다. 반면 올해 부산소극장오페라축제와 창작오페라 지원사업에 대한 시비 지원은 2억 2000만 원에 불과하다. 세계 정상급 오페라단 초청에는 100억 원을 쾌척하면서, 그 무대의 씨앗이 될 지역 예술 생태계에는 2억 원을 쥐여준다. 이것이 이 행정의 민낯이다.
오텔로는 공연되고, 객석은 환호하고, 국제 언론은 짧게 보도할 것이다. 그리고 밀라노의 예술단은 유유히 돌아가고, 부산에는 105억 원의 공백과 여전히 무대를 갖지 못한 지역 오페라 가수들만 남는다. 이것은 개관이 아니다. 전시(展示)다.
오페라하우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유치는 민선 8기 핵심 공약이다. 부산시는 총 1099억 원을 투입해 남구 이기대 예술공원 일대에 미술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연간 예상 수입은 약 50억 원, 총지출은 약 125억 원이다. 매년 75억 원의 적자를 시민 세금으로 고스란히 메워야 한다. 그것도 사업비와 일반 운영비의 ‘전시’ 항목에 브랜드 사용료만 연간 65억 원이 들어갈 것으로 확인됐다. 요컨대, 부산 시민은 매년 65억 원을 내고 ‘퐁피두’라는 프랑스 미술관의 이름을 임차하는 셈이다. 도시의 문화적 자존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외국 브랜드의 하청 문화 기지가 되겠다는 선언 아닌가! 절차적 문제도 심각하다. 시민단체는 지방재정법상 투자 심사와 타당성 조사 의무를 어겼다며 감사원에 공익 감사를 청구했다. 업무협약(MOU)은 비공개다. 시민의 돈으로 시민이 알 수 없는 계약을 밀실에서 맺는다. 이것이 민주적 문화 행정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선의 문법, ‘세계적’이라는 면죄부! 작금의 문화 행정에는 일관된 문법이 있다. 세계 최고 브랜드를 유치하면 나머지 논란은 자동으로 봉합된다는 논리다. 라 스칼라가 오면 오페라하우스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퐁피두가 들어서면 부산은 문화도시가 된다는 식이다. 이 논리 안에서 지역 예술인의 소외, 시민 의견 수렴 부재, 천문학적 적자는 모두 ‘보완할 과제’로 가볍게 축소된다.
문화는 수입(輸入)되지 않는다. 비스마르크가 군함을 사들였다고 독일 해군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은 것처럼, 라 스칼라가 북항을 한 번 다녀간다고 부산에 오페라 문화가 뿌리내리지 않는다. 진짜 문화도시는 외부에서 브랜드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예술가를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에 전략적으로 투자해 동북아시아 특화 미술관을 만드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선택받지 못했다. 화려한 외국 간판이 그 길을 가렸다.
독선은 나쁜 의도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 옳다는 확신에서 가장 두꺼운 독선이 자란다. 라 스칼라와 퐁피두를 동시에 향해 달려가는 부산시장의 모습은 웅장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달음박질 속에서 정작 부산의 문화 토양은 짓밟히고 있지 않은지, 이 물음을 시민이 제기할 때가 되었다. 그 시점이 지금이다. 세계적인 것을 꿈꾸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간판을 사들이는 것과 세계적인 문화를 일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임을 모르는가! 하나는 돈의 문제고, 하나는 철학의 문제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혹은 알면서도 무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독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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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책과 빛, 사유의 시간을 담은 엑서터 도서관
미국 뉴햄프셔주의 작은 도시 엑서터(Exeter). 보스턴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이 작은 마을에는 현대 건축사를 대표하는 도서관 가운데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이 설계한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Phillips Exeter Academy Library)이다. 흔히 ‘엑서터 도서관’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단순한 학교 시설을 넘어, “인간은 어디에서 가장 깊이 사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건축적으로 풀어낸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1972년 완공된 이 도서관은 미국의 명문 기숙학교인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를 위해 지어졌다. 당시 루이스 칸은 이미 솔크 연구소와 킴벨 미술관 등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건축을 단지 기능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바라본 건축가였다. 엑서터 도서관 역시 화려한 형태나 과장된 조형보다는 공간의 본질에 집중한다.
건물 외관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정육면체 형태다. 장식은 거의 없지만, 창문의 비례와 벽돌의 리듬은 묵직한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멀리서 바라보면 오래된 수도원이나 고전 건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루이스 칸은 현대 건축 안에서도 시간의 깊이와 영속성을 담아내고자 했다.
이 건물의 진정한 공간 경험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중앙에는 4층 높이의 거대한 아트리움이 뚫려 있고, 천창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이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특히 중앙부의 거대한 원형 개구부는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사람들은 이 공간을 흔히 ‘사유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내부에 들어서면 단순한 도서관이라기보다 조용히 머물며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공간에 가깝다.
루이스 칸 건축의 핵심은 ‘빛’에 있다. 그는 “태양은 벽에 닿기 전까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자연광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엑서터 도서관에서도 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공간을 완성하는 재료처럼 사용된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흐름은 공간에 깊이를 더하고, 이용자들은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집중과 사유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외곽 벽면을 따라 배치된 창가 열람석은 이 건물의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다. 작은 창가 좌석은 개인 서재처럼 구성되어 있어 학생 한 명이 조용히 책을 읽고 생각에 잠길 수 있다. 거대한 중앙 공간이 공동체의 지식을 상징한다면, 가장자리의 작은 자리들은 개인의 고독과 사유를 상징하는 셈이다. 루이스 칸은 공동성과 개인성을 하나의 건물 안에서 균형 있게 풀어냈다.
디지털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도서관을 찾는다. 단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용히 머물며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 그리고 깊은 사유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을 원하기 때문이다. 엑서터 도서관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를 건축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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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코스피 7300P 돌파, 물가 상승·실물 괴리 우려도 커져
코스피가 6000P 고지에 오른 지 2개월여 만에 꿈의 7000P를 돌파했다. 6일 코스피는 7384.56P로 장을 마감하며 한국 자본시장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급등세가 지수 상승을 견인한 덕분이다. 하지만 경이적인 신기록 이면에서 울리고 있는 경고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증시 랠리가 곧바로 실물 경제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가가 꿈틀대고, 금리는 상승 압박을 받고 있다. 수출 대기업 중심의 증시 호황이 국민 다수의 체감 경기와 괴리가 반복되고 있다. 코스피 7000P 돌파를 기뻐하되 경제의 기초 체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행이 공개적으로 금리 인상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한은은 당초 성장 둔화를 걱정했지만 1분기 성장률이 예상치를 크게 웃도는 1.7%를 기록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호황과 수출 회복이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있지만 동시에 물가 자극 요인도 커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국제 유가 불안까지 겹치면서 인플레이션 방어 수단이 필요한 상황에 이르렀다. 정부와 지자체의 고유가 지원금도 시중에 풀려 우려를 키운다. 증시 과열과 빚투 확산이 동반되고, 유동성이 위험 자산에 몰려 자산시장 거품과 가계부채 부담을 키울 가능성을 제때 차단하는 정책 수단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6%로 1년 9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점도 유의할 대목이다. 호르무즈 사태로 석유류 가격이 20% 넘게 급등한 탓이다.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가 없었다면 상승률은 3% 후반까지 치솟았을 수 있다. 유가 상승은 항공료와 외식비, 생활서비스 가격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증시는 뜨겁지만, 서민들의 장바구니는 무거워지고 있다. 게다가 내수 침체는 길어지고 자영업 폐업은 늘고 있다. 청년층 취업난과 가계부채 부담도 해소되지 않았다. 체감 경기는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증시만 치솟아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약할 수 없다. 시장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실물 경제 정상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호와 낙관이 아니라 냉정과 균형감이다. 코스피 7000P 돌파로 한국 경제가 새로운 심리적·상징적 고지에 올라선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은 공급망 불확실성, 고물가, 고환율 등의 불안 요인이 적지 않다. 반도체 호황이라는 강한 상승 동력을 얻었지만 동시에 극복해야 할 구조적 과제도 분명해졌다. 실물 기반 없는 자산 가격 급등은 큰 부작용을 동반한 조정 국면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자본시장 과열을 경계하면서 물가 안정과 실물 경제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 국민 다수가 체감하는 경기 회복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코스피 7000P 시대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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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선거 쟁점된 '공소 취소 특검' 지역 이슈 집어삼킨다
‘공소 취소 특검’을 둘러싼 논란이 6·3 지방선거판을 집어삼킬 기세다.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를 비롯한 국민의힘 영남권 5개 시도지사 후보들은 6일 울산시청에서 이른바 공소 취소 특검법안을 일제히 규탄했다. 이 법안에는 대장동·위례신도시 개발 비리 등 이재명 대통령 관련 8개 사건이 수사 대상에 포함돼 있다. 또 당선 이후 중단된 재판의 공소를 취소할 권한이 담겼다. 후보들은 이를 사법 쿠데타라는 강도 높은 표현까지 동원하며 비판했다. 특히 박 후보는 “대통령이 자신의 죄를 삭제하는 삭죄 특검법”이라며 비판 수위를 높였다. 지방 행정을 책임질 후보들이 지역 현안이 아닌 사법 이슈로 공동 대응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이날 김두겸 울산시장 후보는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이 대통령 재판을 취소하는 것은 삼권분립 위반”이라고 비판했고, 이철우 경북도지사 후보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반드시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힘 후보들은 해당 특검법을 헌법 질서 훼손이자 권력의 사법 개입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다. 국힘에선 앞서 서울시장 후보를 비롯해 9명 후보가 ‘공소 취소 특검’ 대열에 합류한 바 있다.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여야는 ‘범죄 수사’와 ‘대통령 무죄 세탁’이라는 표현을 주고받으며 충돌했다. 특검법 공방이 지선과 정치권 전반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법조계의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대한법학교수회는 이날 성명에서 “특검에 공소 취소권을 부여하는 것은 법치주의와 권력분립을 훼손하는 독소 조항”이라고 밝혔다. 특히 진행 중인 재판을 중단시키는 것은 사법권을 침해하고 법원의 최종 판단 권한을 박탈하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정치권 공방이 헌법 질서 논쟁으로 번지는 양상이라 하겠다. 주목할 대목은 특검 이슈가 지선을 앞두고 정치 연대로 확장되는 흐름이다. 국힘은 물론 개혁신당 인사들까지 비판에 가세하며 보수 야권의 공동 대응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부산에서는 개혁신당 후보가 공세에 동참하며 국힘과 연대를 제안할 정도다. 특검법이 지역 선거 구도 재편의 변수로까지 작용하는 셈이다.
결국 이번 특검 논란은 지선의 본질을 흐리고 선거 성격까지 바꾸고 있다. 지역 경제와 민생 정책 경쟁은 밀려나고 특검과 중앙 정치가 선거판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울산 공동 기자회견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향후 특검법 논쟁은 국회 입법 과정과 대통령의 대응, 선거 결과와 맞물려 더 큰 파장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지선은 본래 지역의 삶과 정책을 겨루는 자리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중앙 정치와 사법 리스크가 전면에 부상하며 의미가 훼손되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명확하다. 논란을 촉발하고 선거판을 흔든 책임은 여당에 더 있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선거를 특검 논쟁으로 덮은 책임을 무겁게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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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은쪽이 남매
후배들을 보며 기자 초년병 때를 떠올린다. 몸도 마음도 혹독하게 담금질했던 시절. 가장 힘들었던 건 이른 새벽 출근도, 비리 사건 취재도, 어려운 기사 쓰기도 아니었다. 바로 ‘땟거리’라 부르는 기삿거리 찾기였다. 걱정을 덜어준 건 ‘현장’이다. 동행취재 혹은 현장르포 형식을 빌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직접 체험하며 기사로 풀어냈다. 2009년 봄, 택시 기본요금 인상으로 수입이 반토막 난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조수석에 동승해 기사님과 손님들 얘기를 들었다. 장마철에는 아파트 수해 현장을 찾아 진흙투성이 지하주차장 복구 작업에 동참했다. 그해 여름 끝자락엔 119구조대의 24시를 동행취재한 기획기사도 기억에 남는다. 주변에서 “고생했다”며 칭찬을 건넸지만, 고백건대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다. 기회만 된다면 ‘현장체험 전문기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장은 흥미진진했고, 보람도 컸다.
기자라면 현장 취재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변명, 아니 해명하자면 요즘 후배들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 현장을 찾지 못한다. 하루를 오전 오후로 쪼개, 여러 건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에게 현장 취재는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다. 경찰과 소방의 보고서를 참고해 전화로 추가 취재를 하다 보면 기사 마감이 코앞이다. 방송 기자는 정반대 고충이 있다. ‘그림’을 확보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는 반면, 모자란 취재는 타 언론사 기사를 참고하곤 한다. 신문쟁이로서 방송계를 언급할 수 있는 건 방송뉴스를 제작해 본 경험이 있어서다. 종편채널에 부산지역 뉴스를 공급하는 역할을 1년 동안 맡아, 여느 방송 기자처럼 다양한 사건사고 현장을 다녔다. 변사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시신 부패 흔적, 북극곰 축제를 취재하며 겨울 바다에 뛰어들었던 경험 등은 현장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우는 기억으로 각인돼 있다.
돌이켜 보면 현장에 대한 관심은 기자로 첫발을 내딛기 한참 전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 학창 시절 기사를 읽거나 방송뉴스를 볼 때면 현장감 있는 소식에 더 눈길이 갔다. 각종 보고서나 통계자료가 나열된 기사를 접하면, 숫자 너머 현장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AI 시대에 레거시 미디어, 신문·방송의 미래는 있을까. 있다면 기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끊임없는 자문 끝에 찾은 한가지 해답 역시 ‘현장’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 직접 얼굴을 맞대 묻고 답하며, 생생한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일만큼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 기자의 몫이다.
올 들어 유튜브 채널 운영을 다시 맡게 되면서 이 해답을 업무에 적용하고 있다. 〈부산일보TV〉를 눈여겨본 구독자라면 최근 변화를 눈치챘을 것이다. 생방송·생중계를 비롯해 현장르포 성격의 콘텐츠가 늘었다. 최근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심르포’라는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주요 전통시장을 찾아 상인들의 입을 통해 지역 민심을 들어보자는 취지다. 지방선거와 함께 국회의원 보궐선거까지 치르는 부산 북구 구포시장 일대는 전국구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시장 구석구석을 돌며 진행된 전재수 전 의원의 감사 인사와 하정우 전 AI수석의 첫 방문을 비롯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 박민식 전 장관이 마주친 구포초등학교 현장도 찾아 민심을 들었다. 관련 콘텐츠 조회수를 다 합하면 100만 회가 훌쩍 넘는다. 이에 더해 한 전 대표의 단독인터뷰는 일부러 만덕2동 전셋집이 있는 아파트단지에서 야외 생중계로 진행했다. 현장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역시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 같은 시도를 할 수 있는 건 사람 기자 덕분이다. 지난봄 TV방송국으로 발령 난 이은철·변은샘 두 기자가 일당백으로 뛰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똑같아, 금쪽이 못지않게 소중한 ‘은쪽이’라 여기고 있다. 기자실 책상과 전화 취재가 익숙했을 후배들이 요즘 현장의 중요성을 자주 입에 올린다. 의견을 반영해 애초 4부작으로 기획한 ‘민심르포’를 확대 편성했다. 부산시장 후보들의 선거운동 무대 뒤편도 궁금한 세계다. 가능하다면 전재수·박형준 후보의 하루 일정을 따라다니며 생생한 장면을 전해보려 한다. 얼마나 날것의 현장이 담길지는 ‘은쪽이 남매’의 활약에 달렸다.
민주주의 축제가 끝나고 나면 어디서 땟거리를 찾아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기자는 기록하는 사람이기에, 결국 ‘기승전현장’이라 믿는다. 부산과 부울경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이 되는 현안, 전국에 울림을 주는 지역 이슈를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닐 것이다. 지역민의 눈과 귀, 독자의 입과 손발이 되겠다는 다짐을 담은 〈부산일보TV〉를 한번 믿고 지켜봐 주시라. 그러니 부디... ‘좋댓구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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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어머니날? 어버이날!
1920년대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해 항일 무장투쟁 활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이가 있다. 조신성 애국지사가 그 주인공이다. 조 지사는 이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진명여학교에서 교장으로 민족교육에도 진력한다. 근우회와 여성실업장려회 활동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해방을 맞았다. 이후 1945년 북한에서 월남한 뒤 대한부인회 부총재를 역임했고 1953년 5월 부산에서 80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조 지사의 장례일은 5월 8일로 잡혔고 장례식에 모인 대한부인회 회원들은 조 지사를 기리며 그날을 어머니날로 정했다.
어버이날이 5월 8일이 된 것은 조신성 지사의 장례일이 어머니날이 되면서였다. 정부는 대한부인회가 어머니날로 부르던 날을 6·25전쟁 이후인 1956년 국가기념일로 정했고 그 17년 뒤에는 어버이날로 바꿨다.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뀐 것은 “왜 아버지날은 없느냐”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행 노인복지법 제6조에는 ‘부모에 대한 효 사상을 앙양하기 위하여 매년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한다’고 규정돼 있을 정도이니 어버이날이 기리는 대상은 부모를 넘어 조부모까지 확대됐다고나 할까.
이처럼 부모를 비롯해 조부모까지 함께 기념하는 대한민국 어버이날과는 달리 외국은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별도로 기념해 온 게 대세였다. 미국은 1910년대부터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6월 셋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정해 기념해 왔다. 7월 넷째 일요일을 어버이날로 부르고 있으나 최근에서야 생긴 기념일이다. 일본도 미국처럼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6월 셋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어버이날은 국가기념일이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어린이날이 공휴일인 만큼 부모와 조부모를 기리는 날도 공휴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0년대부터 본격화한 여론을 등에 업고 국회에서는 그동안 어버이날 공휴일 지정 관련 법안만 14회 이상 발의됐다. 하지만 공휴일 과다로 인한 각종 사회적 부담과 포퓰리즘 논란으로 법안은 흐지부지돼 왔다.
또 다시 어버이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어버이날이 공휴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이번 주말까지를 ‘가족 주간’으로 정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의 의미를 함께 되새기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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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지방선거, 부산 디지털 금융의 청사진을 묻다
얼마 전 세계 8위 해운사 HMM이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에 이어 한국 해운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민간 기업까지 부산에 둥지를 트는 셈이다. 정부 부처와 대형 민간 기업이 차례로 내려오면서, 부산은 단순한 항만 도시를 넘어 ‘해양 금융의 수도’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이 발판이 진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항만과 해운이라는 실물 자산을 ‘디지털 금융의 언어’로 다시 짜는 작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필자는 지난 3월 본 지면을 통해 부산이 가진 해운·물류 인프라가 RWA(실물자산 토큰화)와 결합할 때 만들어 낼 새로운 금융 모델을 제안한 바 있다. 선박의 소유권과 용선료 수익권을 토큰화해 일반 투자자에게 개방하는 ‘선박 RWA’, 가덕신공항의 운영권 일부를 시민 참여형 디지털 펀드로 조달하는 ‘인프라 RWA’가 그 골자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지금, 해수부와 HMM의 부산 이전이라는 거대한 모멘텀이 만들어지면서, 그 제안은 더 이상 미래의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책 의제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부산의 정책 시계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표되는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부동산·교통·복지 등 전통적인 의제는 빼곡히 채워져 있지만,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을 어떻게 구체화할지에 대한 실질적인 청사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지 수년이 지났고, 디지털 자산 시장은 이미 제도권 금융의 본류로 진입하고 있는 시점에서 부산은 여전히 이 변화의 무게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 차원의 입법 또한 사정이 녹록지 않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규율할 디지털자산기본법은 발행 주체와 지분율을 둘러싼 이견 속에 표류를 거듭하고 있고 지방선거 국면에 접어들면 그 우선순위는 더욱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그 사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송금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중앙의 입법이 늦어진다고 해서 지방이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부산이 ‘제도의 실험장’을 자처하며 한 걸음 앞서 나가야 할 시점이다. 이미 글로벌 해양·금융 도시들은 디지털 자산을 도시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삼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싱가포르는 통화청(MAS) 주도의 ‘프로젝트 가디언(Project Guardian)’을 통해 채권·펀드·외환의 토큰화 실증을 정부 보증 아래 진행 중이고, 두바이는 별도의 가상자산규제청(VARA)을 설립해 토큰화 자산의 발행과 유통을 일원화된 체계로 관리하고 있다. 홍콩 또한 디지털 자산 ETF와 스테이블코인 라이선스 제도를 정비하며 아시아 디지털 자산 허브 자리를 노리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도시 단위에서 명확한 정책 방향을 가지고 자산 토큰화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 부산에서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검토해 보기를 희망한다. 첫째, 부산 차원의 ‘디지털 자산 규제 샌드박스 2.0’이다. 기존 블록체인 특구가 기술 실증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 단계는 금융과 자산의 실증으로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 선박·항만·물류 자산을 기초로 한 RWA 발행과 유통,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실험, 디지털 자산 커스터디 인프라 구축이 부산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빠르게 검증될 수 있도록, 지자체가 중앙 부처와의 가교 역할을 적극적으로 자임해야 한다. 둘째, ‘부산형 시민 참여 인프라 펀드’의 제도화다. 가덕신공항, 북항 재개발, 항만 배후 단지와 같은 대형 사업의 일부 지분을 토큰화해 부산 시민이 소액으로 보유하고 운영 수익을 배당받는 구조다. 자본 조달과 시민 참여,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한꺼번에 풀어내는 ‘부산만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셋째, 디지털 금융 인재 생태계의 본격적인 구축이다. 디지털 금융 혹은 블록체인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정규 과정에 편입시키고, 지역 대학·연구기관·기업·금융권을 잇는 상설 플랫폼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 도시에 자본은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금융은 부산이 오래 짊어져 온 구조적 과제, 즉 수도권 자본 의존, 청년 인구 유출, 산업 고도화 지연 등을 정면으로 풀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항만과 조선이 20세기 부산을 만들었다면, 그 위에 얹히는 디지털 금융이 21세기 부산을 다시 만들 수 있다. 다만 이는 시장과 의회가 의지를 갖고 일관되게 끌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의 청사진을 분명히 제시하는 후보, 그리고 그 청사진을 끝까지 검증하는 시민. 이 두 주체가 만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부산의 다음 10년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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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무너지는 세계에서 버티는 법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패션이라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전쟁터 같은 사회를 누비는 여성들의 초상을 그려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쉴 새 없이 등장하는 명품 브랜드와 세련된 스타일링은 보는 이들의 감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누군가는 소비 지향적인 판타지를 그린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아찔한 킬힐 소리 뒤에 숨겨진 땀방울을 목격하며, 화려한 외양 너머 존재하는 이면을 그려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2006년 개봉한 영화에서는 사회초년생 ‘앤디’(앤 해서웨이)가 패션 매거진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비서로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까다로운 상사와 어수룩한 신입, 패션을 중심으로 한 볼거리는 가볍게 소비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앤디의 미숙함, 완벽해 보이지만 언제든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미란다의 불안을 교차시키면서 20~30대 여성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다. 가히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 속 그들. 가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던 그들이 20년 만에 돌아왔다.
2편은 20년 전 런웨이를 떠났던 앤디가 탐사보도 기자로 저널리즘 상을 수상하면서 문을 연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 앤디는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받는다. 회사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간 탓이다. 시상대 위에서 트로피를 쥔 채 실직자가 되는 이 아이러니한 장면은, 영화가 응시하는 2026년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성실하게 축적해온 시간과 성취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경험, 그 불안은 특정 직종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된 감각에 가까워 보인다. 또한 2편이 전작과는 다른 이야기로 전개될 것임을 예상케 한다.
먼저 영화가 포착하는 또 하나의 축은 권력의 이동이다. 과거 미란다의 비서였던 ‘에밀리’는 현재 럭셔리 브랜드의 임원이 되어 협상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다. 상사의 눈치를 살피던 위치에 있던 인물이 이제는 런웨이의 생사를 좌우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갑과 을이 뒤바뀐 이 장면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위계의 재편과 냉정한 속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맞물려 2편은 화려한 외양에 머물지 않고,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저널리즘의 생존을 다룬다. “치실로 써도 될 만큼” 얇아진 잡지의 두께, 하이패션 브랜드들의 광고가 아니면 매체도 존재하지 못하는 현실, 편집장의 직관보다 알고리즘이 우선하는 환경에서 가치 있는 기사는 의미가 없다. 미란다와 앤디 또한 아름다움과 조회 수 사이에서 헤맨다. 그들에게 패션은 예술이나 철학이 아닌, 데이터에 의해 재단되는 숫자에 불과해진 것이다.
영화는 ‘악마’로 불리던 미란다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린다. 한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그의 권위적인 태도는 이제 문제적 행위로 읽힌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코트를 비서에게 던지던 과거와 달리, 끙끙거리면서 스스로 옷을 정리한다. 부하 직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던 모습도 볼 수 없다. 강화된 HR 규정은 그 아무리 미란다라고 해도 비껴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묘하게 씁쓸하다.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권력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과연 사라진 것인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 상황을 그려내는 듯 보이지만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 레거시 미디어의 생존이라는 현실적 고민이 판타지로 치환되는 순간, 공들여 쌓아 올린 질문의 무게는 힘을 잃고 만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자본의 논리나 선의로 덮어버리는 방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무너지는 기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미란다와 앤디를 통해 말한다.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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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헌법에 새겨야 할 이름 - 기억은 어떻게 국가의 형식이 되는가
부마와 5·18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질문이다. 국가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헌법에 새길 것인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울려 퍼진 ‘유신 철폐, 독재 타도’의 함성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을 넘어선 시민의 각성이었고, 자크 랑시에르의 말처럼 권력에 의해 가려지고 말해지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감각의 전환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를 종식하는 거대한 불꽃이 되었고, 그 불꽃은 80년 5·18 민주화운동과 87년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헌법은 모든 법 위에 서서 국가의 근본 가치와 국가권력의 정당성과 한계를 규정하는 최고 규범이다. 또한 헌법전문은 그 정당성이 어떤 역사와 희생 위에서 세워졌는지를 드러내는 정신적 선언이며, 국민이 공유하는 기억의 형식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비워두는가에 따라, 국가는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부마민주항쟁은 ‘군부독재’를 실질적으로 무너뜨린 최초의 시민 항쟁이었다. 5·18 민주화운동은 국가 폭력 앞에서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그 윤리적 기준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헌법전문 밖에 머물러 있다. 이 공백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서사의 단절이며, 국가 기억의 불균형이다.
홍성담의 판화는 그 공백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검은 선으로 깊게 파인 화면 속에서, 광주의 거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장면으로 솟아오른다. 불길과 연기, 무너진 차량, 그리고 무엇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몸짓, 이 이미지는 어떤 특정한 순간을 재현한다기보다, 국가 폭력과 시민의 저항이 충돌하던 감각의 총체를 우리 앞에 다시 펼쳐 놓는다. 판화 속 인물들은 공포 속에서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이들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말하듯,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통의 감각과 행동을 통해 연대 속에서 하나의 주체로 형성되는 ‘다중’이다. 이 다중은 공통의 분노와 존엄의 감각을 통해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었다. 홍성담의 이미지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역사적 주체가 형성되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구성한다.
우리는 최근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을 경험했다. 2016년의 ‘촛불 항쟁’과 2024-25년의 ‘빛의 혁명’은 국민주권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경험은 헌법이 아직 완결된 기억의 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제 국회와 국민은 이 역사적 공백에 응답해야 한다. 헌법전문은 법이 아니라 기억이다. 부마와 5·18을 (그리고 추후 6·10항쟁까지) 헌법전문에 새겨 그 기억을 완성하는 것, 이야말로 이 시대가 감당해야 할 헌정사적 책임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재의 과제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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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거꾸로 간다] 행복한 노년과 지역사회
필자는 1997년 노인생활과학연구소를 개소하고 거의 10년 동안 국내외 석학들을 매년 부산에 초청해 강연을 개최했다. 그들이 먼저 준비하고 경험한 해외 국가들의 미래 노인 정책 사례를 듣는 것은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강연에서 얘기했던 미래가 이제는 현재가 됐다.강연에서 노인정책과 서비스는 그 당시 강조되었던 것들이 우리 사회에 현실화되고 있다. 노인 복지서비스의 변화 유형은 여러 나라에서 매우 유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노년을 지역사회에서 보내자’는 개념은 20세기 중반 유럽과 미국,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 시작됐다. 노인돌봄을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 변화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효율적인 비용은 물론 독립적 생활, 존엄, 사회적 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1989년 정부 백서에 국민을 위한 돌봄이 정책화됐고, 미국은 노인을 위한 사회적 지지망과 자연발생적 노인공동체를 중요하게 다뤘다. 덴마크나 노르웨이는 공동 주거 개념을 지역사회에서 심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건강한 노년, 활기찬 노년, 통합돌봄은 초고령사회의 핵심 정책이 되고 있다.
한국 역시 지역사회복지, 지역간호, 사회적 관계망 등 삶의 중심에 지역사회의 중요성을 두었다. 그러나 노년 중심이라기보다는 생애 전반을 대상으로 했다. 노인인구가 증가하면서 가족의 돌봄 부담 해소를 목적으로 2008년 장기요양보험 제도 속에 재가 서비스, 주야간 보호시설, 방문간호, 방문목욕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집에 거주하는 등급자에 국한된 서비스이다.
지역사회 돌봄은 2018년 병원, 시설이 아닌 자택,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받는 지역사회 돌봄이 시범사업으로 운영됐다. 서비스 범위를 주거지원), 보건의료, 요양 돌봄, 독립생활지원으로 정했다. 2022년에 사업은 더 확산됐고 2026년 올해 통합돌봄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의료수가의 현실화, 지방재정 연계 강화, 사회적 서비스 확보 방안 등의 과제가 남아있어 보인다. 지속가능한 통합돌봄이 안착되기 위해서는 지역자원의 활용과 효율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노인의 욕구 사정을 통한 촘촘한 돌봄 계획을 바탕으로 재택의료, 방문간호, 사회서비스 등이 불평등 없이 제공돼야 할 것이다.
지역을 구성하는 사람은 항상 변화하고 노인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삶의 질에 대한 욕구의 관점이 변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역할이 더욱 강조돼야 한다. 건강할 때는 예방과 사회참여를 이끌 수 있어야 하고, 병약할 때는 돌봄과 지원이 연속성에서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의료보건 복지가 협력하는 시스템이 구축돼야만 행복한 노년은 지켜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