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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해수부 이전·기능 강화 아우른 '해양수도특별법' 만들자
부산을 진정한 해양수도로 육성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지원에 초점을 맞춘 ‘이전 지원형’ 법안과 해양산업 육성에 방점을 둔 ‘산업 강화형’ 법안이 각각 상정돼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도약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해수부 이전은 부산의 숙원이지만 각각의 법안만으로는 세계적 해양도시로 성장하기에 부족하다. 이제는 두 갈래 논의를 하나로 통합해 해수부 이전과 기능 강화는 물론 국가 해양 전략까지 담아낼 수 있는 ‘종합 특별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분명코 해양수도 부산의 미래는 단순한 해수부 이전에 그쳐서는 안 된다.
부산판 해양수도특별법은 행정기관 이전을 뒷받침하는 수준을 넘어야 한다. 5년 단위 종합계획 수립, 규제 특례, 글로벌허브도시법의 내용을 접목하는 것은 물론, 북극항로 개척 전략까지 포괄해야 한다. 해양금융, 해운·조선 신산업, 극지 연구, 전문 인재 양성 등 부산이 글로벌 톱5 해양도시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담아내는 종합 패키지가 되어야 한다. 이미 세종 행복도시법과 제주특별법은 국가균형발전과 국제 경쟁력 강화를 내세워 큰 결실을 거두었다. 부산 역시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 이번 특별법이 단순한 지역 숙원사업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미래를 여는 법안임을 설득해 낸다면 국민적 공감과 여야 합의를 끌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해양수도특별법 제정은 부산의 숙원이다. 2005년 ‘해양특별자치시법’을 시작으로 수차례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정치권의 이견으로 번번이 좌절됐다. 이재명 대통령과 전재수 해수부 장관이 강력한 의지를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적기라는 평가가 나온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해당 특별법이 농해수위에 배정되면서 이전 지원을 넘어 기능 강화까지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다행이다. 특별법 제정에 있어 중요한 것은 국가적 명분과 국민적 공감대다. 이에 국무총리 직속의 강력한 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객관적인 성과지표를 공개함으로써 해양수도특별법이 대한민국 성장의 명확한 전략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적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
부산은 이제 단순한 해수부 이전 논리를 넘어 대한민국 해양수도 전략이라는 큰 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미 그 기반이 마련돼 있다는 점이다. 해양수산부와 공공기관 이전, 북극항로 시범 운항, 해양금융 활성화 등 여러 국정 과제가 부산과 맞닿아 있다.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가 바로 해양수도특별법이기도 하다. 김도읍 의원이 강조했듯 “실질적 해양수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권의 약속이 공허한 구호로 끝나서는 안 된다. 여야가 힘을 모아 이전 지원과 기능 강화를 함께 담아내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부산을 넘어 대한민국이 해양 강국으로 도약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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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여 입법 폭주 맞서 야 상복 등원, 극단 치닫는 정기국회
이재명 정부 출범 뒤 첫 정기국회가 1일 막을 올렸지만, 여야는 첫날부터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갔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화합의 의미로 개회식에 한복을 입고 참석하자고 제안했지만,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여당의 입법 폭주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검정 정장과 넥타이에 ‘근조 의회 민주주의’ 리본을 단 상복을 입고 나와 투쟁을 예고했다. 100일간 열리는 이번 국회에는 이재명 정부 첫 예산안과 쟁점 법안 처리, 인사청문회 등 암초가 많아 여야 극한 대치 구도가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우 의장이 개회사에서 “갈등하고 대립하는 속에서도 할 일은 하는 것이 정치”라고 말했지만, 첫날부터 ‘드레스코드’ 대결이 펼쳐져 무색하게 됐다.
민주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개혁법안 44개를 포함해 총 224개 중점 법안을 처리할 예정이다. 특히 검찰청 폐지를 골자로 한 ‘검찰 개혁’ 입법, 언론과 유튜브 등에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는 ‘언론 개혁’ 입법, 대법관 증원을 통한 ‘법원 개혁’ 입법 등 3대 개혁 입법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또 내란·김건희·해병대원 등 3대 특검의 수사 대상과 기간을 늘리는 ‘더 센’ 특검법 개정안을 이달 내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국힘은 민주당의 독주를 부각하며 이들 법안의 처리를 막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쟁점 법안이 많아 여야 간 주도권 다툼이 벌어질 우려가 크다.
특히 이번 주가 인사청문회 ‘슈퍼위크’여서 여야 대립은 더 격화될 수 있다. 2일 최교진 교육부 장관 후보자와 이억원 금융위원장 후보자, 3일 원민경 여가부 장관 후보자, 5일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가 열릴 예정이다. 국힘은 최 후보자에 대해 과거 음주 운전 전력과 천안함 관련 음모론 제기 등을 지적했고, 주 후보자에 대해선 세금 상습 체납 이력 등을 이유로 지명 철회를 주장한다. 또 예산안 처리를 두고도 격돌이 예상된다. 민주당은 정부가 편성한 728조 원 규모의 예산안을 통과시킬 방침이지만, 국힘은 ‘포퓰리즘 예산안’으로 규정하고 대대적 삭감을 예고했다. 정기국회 내내 협치는 사라지고, 정쟁만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국민을 위한 정책과 입법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여야가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견을 조율해 더 나은 정책과 법안을 도출하는 것이 의회 민주주의의 본령이다. 지금 여야의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이재명 대통령이 미일 순방 뒤 성과를 이어가기 위해 초당적 협력을 주문했지만, 공허한 메아리가 된 셈이다. 처리해야 할 현안도 많은데 여야가 극단적 대치만 한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정부와 여당은 야당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야당도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여야 모두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략적 이해에 매몰되지 말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민생을 살리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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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말라버린 호수에서 그려보는 북극항로
요즘 종종 1960년대 중앙아시아 목화 산업이 태동한 시절의 뒷이야기를 생각해 본다. 이 시기 우즈베키스탄 지역은 세계적인 목화 산업지로서의 터를 닦았다. 산업 규모가 전성기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은 세계 6~7위 목화 생산국이다. 목화산업이 무너지면, 이 나라 경제는 주저앉는다.
목화산업의 번영은 1950~1960년대 관개 사업의 결과다. 당시 소련 정부는 ‘흰 황금’이라 불리던 목화 생산을 늘리기 위해, ‘아랄해’ 호수로 향하던 강들에 댐과 운하를 지었다. 관개수로가 깔리고 물이 들어오자, 마른 땅은 목화 재배지가 됐다. 1960년대 말 이미 아랄해의 수위가 빠르게 내려가는 게 관찰됐지만, 목화가 가져올 번영에 가려 자연의 경고는 보이지 않았다. 희망에 들뜬 시기였다.
아랄해는 세계 4위 호수였다. 크기가 한때 6만 8000㎢에 달했다. 남한 면적의 3분의 2 정도다. 이랬던 아랄해가 강물 유입이 줄기 시작하고, 50년 만에 10분의 1 정도로 면적이 줄었다. 호수 대부분은 염분을 품은 사막이 됐다. 호수가 사라진 땅은 달구어져 기후가 크게 변했고, 모래바람은 주변까지 황폐화했다. 주민들 사이엔 폐질환부터 다양한 건강 문제들이 발생했다. 어업에 의존하던 도시들은 폐허가 됐다. 호수가 사막이 된 ‘아랄해 비극’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함께 소련의 대표적인 환경 재앙으로 꼽힌다.
오래전 다큐멘터리로 본 우즈베키스탄 목화 산업의 뒷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도는 건, 녹아가는 북극에서 말라가는 아랄해가 떠올라서다. 북극항로 개발에 들뜬 우리의 모습과 1960년대 아랄해 주변의 희망찬 분위기가 묘하게 닮은 느낌이 있다. 같을 순 없지만, 비슷한 구석은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목화 산업이 그러했던 것처럼, 냉정하게 말하면 북극항로 개척 기회도 환경이 망가지면서 생겼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 면적의 8배 이상의 북극 빙하가 사라졌다고 하고, 10년마다 면적이 13% 줄었다는 관측 결과도 있다. 무척 빠른 속도로 녹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북극항로 개척 기회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기후위기 증거이다.
북극 빙하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을 반사하는 역할도 한다. 빙하 손실은 기후위기의 결과이자 동시에 위기를 더 키우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여름에 북극 해빙이 사라지는 때가 올 수 있다는데, 봄가을에도 그런 날이 온다면 북극항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즘엔 부산의 북항 일대가 상당 부분 물에 잠겨 있을 수도 있다.
북극항로를 접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련이 관개 공사를 접었다면 아랄해의 사막화는 멈췄겠지만, 지구온난화는 대한민국 혼자서 대응할 수 없다.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빙하는 녹을 것이다. 당장 오늘 전 인류가 탄소 생산을 멈춰도, 이미 대기에 탄소가 많이 쌓여 있어 긴 시간 지구는 뜨거워지고 북극은 녹는다. 짧은 뱃길이 생겼는데 굳이 길게 돌아가는 것 자체가 탄소를 더 뿜는 일이다.
그래서 북극항로는 상당 부분 현실화를 앞두고 있고, 대한민국은 여기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공하면 부산이 물류허브 도시로서 한 단계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설득력이 있다.
다만 북극항로를 추진하면서도, 기후위기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좋겠다. 바닷길이 열리는 대신 빙하가 사라지고 있고, 북극곰과 바다코끼리 등이 터전을 잃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한 번씩 떠올렸으면 한다. 얻는 기쁨이 크다고 잃어버리는 것들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기후위기에서 기회를 얻고 성공한다면, 기후위기 해결에 더 노력하는 것이 도의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해양 분야의 무탄소 기술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거나 녹색 에너지 비율을 높이는 식의 노력이 쌓이면, 북극항로 개척자로서의 명분도 함께 얻을 수 있다. 기후위기에 편승하기보다 위기 해결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거다. 이런 노력은 북극항로에서 대한민국의 입지를 넓히는 데도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 우즈베키스탄은 수출에서의 목화 비중을 줄이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이 무너져 쉽지가 않다고 한다. 만일 소련이 아랄해 주변의 물길을 돌릴 때, 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다면 지금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북극항로도 마찬가지다. 북극항로 개척이 성공하려면, 경제적 가치를 계산해 내는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지금 무엇을 잃고 있는지 알아채는 통찰력도 필요하다. 경제적 가치에 더해 공존의 의미를 고민하고 미래 세대를 배려할 줄 알 때, 지속가능한 북극항로를 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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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비디오 판독
얼마 전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 조성환 감독대행이 비디오 판독 결과에 항의하다 퇴장당한 일이 있었다. 지난달 2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홈 경기에서 두산의 오명진이 상대 투수의 공을 받아쳐 오른쪽 외야 파울 라인 근처로 타구를 보냈다. 1루심은 파울을 선언했고, 두산은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중계 화면에는 공이 떨어진 지점에 하얀 가루가 튀는 장면이 포착됐다. 공이 파울 라인 끝에 닿았다고 본 두산은 ‘판정 번복’을 기대했지만, 비디오 판독 결과는 ‘원심 유지’로 파울이 선언됐다. 조성환 대행은 곧바로 외야로 뛰어나가 항의했고, ‘비디오판독 결과에 항의하면 퇴장당한다’는 KBO규정에 따라 퇴장됐다. 두산은 이날 2-6으로 패했다.
경기 뒤 KBO가 홈페이지에 올린 1분 12초짜리 영상에도 공이 그라운드에 닿은 뒤 하얀 가루가 튀는 장면이 나온다. 하얀 가루가 튀었다는 건 공이 라인에 닿았다는 이야기고 세이프다.
하지만, KBO 비디오판독센터는 판정을 번복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봤다. 외야 파울 라인은 페인트로 긋는 데, 오명진의 타구 때 보인 하얀 가루가 ‘파울 라인 밖 이물질’일 수 있다는 게 비디오판독센터의 판단이다.
KBO리그의 비디오 판독은 2014년 도입됐다. 홈런을 비롯해 외야 타구의 페어·파울, 포스·태그 플레이, 야수의 포구, 몸에 맞는 공, 타자의 파울·헛스윙, 홈플레이트 충돌 등 7개 항목에 대해 비디오 판독을 적용한다. 올해 후반기부터는 타자의 체크스윙 판정에도 비디오 판독이 도입됐다. 비디오 판독은 야구뿐아니라 축구, 테니스, 농구, 배구, 미식축구 등 많은 스포츠 경기에서 진행되고 있다.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면서 오심이 최소화됐고 신뢰도가 높아진 장점이 있다. KBO리그는 1일 현재 올해 들어 805건의 판독 요청이 들어와 234건(29.7%)이 번복됐다. 30%가량의 오심이 비디오 판독을 통해 바로잡힌 것이다.
하지만 두산의 경우처럼 비디오 판독의 오류로 의심되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 프로배구가 좋은 사례가 된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비디오 판독 오류 땐 곧바로 정정 가능한 제도를 마련했다. 비디오 판독을 잘못 해석할 경우 즉시 제공된 화면에 한정해 재확인을 거쳐 이를 정정하도록 한 것이다.
프로야구에서도 비디오 판독에 항의하는 감독을 퇴장시킬 게 아니라 비디오 판독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게 합당하다. 그것이 비디오 판독 도입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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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트라우마, 상처는 보이지 않고 고통만 남는다
이태원 참사에 투입됐던 소방관이 또 세상을 등졌다. 참사 이후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불안 장애에 시달려 왔다. 악몽과 불안 발작 때문에 근무를 이어가기 어려웠고, 병가와 휴직을 반복했다. 공무상 요양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불승인 통보를 받으며, 끝내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렸다. 사람을 살린 이들이 정작 자기 삶은 지키지 못하는 현실. 우리는 그들의 트라우마를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트라우마란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도 기억과 감정이 반복적으로 되살아나 일상 전체를 흔드는 고통을 말한다. 단순히 ‘힘든 경험을 떠올리는 정도’가 아니라, 수면·집중·대인관계까지 무너뜨리며 삶의 기반을 뒤흔든다. 특히 반복적으로 위험과 참혹한 장면에 노출되는 직업군은 트라우마가 쉽게 만성화된다.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소방공무원 중 약 7.2%가 PTSD를 겪고 있다. 자살 위험군은 5.2%, 우울증은 6.5%로 모두 늘었다. 소방관의 PTSD 유병률이 최대 16%에 달한다.
일반인에게도 트라우마는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70% 이상이 생애 한 번 이상 외상 사건을 겪었고, 그 중 약 15%는 PTSD 위험군으로 분류된다. 실제로 국내 성인 평생 PTSD 유병률은 약 4.7%에 이르며, 치료받는 환자 수도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트라우마 증상이 객관적 진단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라우마는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상처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 수 있다. 증상은 주로 악몽, 불면, 불안 발작, 회상과 같은 ‘내면적 체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골절이나 전치 진단처럼 눈에 보이는 지표가 없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의학적으로도 객관적 수치나 영상 검사로 확인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결국 진단은 환자의 진술과 심리 검사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주변이나 조직에서 가볍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멀쩡히 근무하거나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집중력 저하·대인관계 회피·심장 두근거림 같은 심리·신체적 고통이 일상 전반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쉽게 방치된다. 이렇다 보니 가해자는 “그 정도는 별일 아니다”라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 장면이 바로 용산구청의 ‘축제 관리·안전 우수사례 대상’ 수상 해프닝이다. 용산구청은 지난달 22일 서울시가 주최한 행사에서 해당 부문 대상을 받았다가, 논란이 커지자 곧바로 취소됐다. 특히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재판을 받고 있는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활짝 웃으며 상을 받는 장면이 공개되자 국민적 분노가 커졌다. 참사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고 많은 이들이 트라우마 고통을 겪고 있는데, 박 청장은 책임 여부를 떠나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는가. 상처 받은 피해자만 고통 속에 갇히는 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이런 사회나 조직에서는 제2의, 제3의 피해자가 끊임없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가까운 주변에서 받은 상처는 훨씬 흔하다. 그러한 일상의 반복된 상처가 깊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는다. 다만,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트라우마가 남기는 사회적 비용은 결코 적지 않다. WHO(세계보건기구)는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한 세계적 손실을 연간 1조 달러(약 1300조 원)로 추산한다. 우리는 이 어마어마한 대가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우리가 외면하는 순간, 또 다른 비극은 예정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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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비혼주의자의 결혼 선언
10년 동안 비혼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곧 결혼한다. 30대 초입에서 결혼 소식은 흔해진 지 오래지만, 이번에는 다소 놀랍게 다가왔다. 그만큼 그 친구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 같다. ‘결혼 안 한다던 친구가 제일 먼저 결혼한다’는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무념무상으로 쳇바퀴 같이 굴러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내게 이 소식은 오랜만에 ‘생각’이라는 걸 하게 했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토론해 온 페미니즘의 여정이 겹치며, 관점을 전환해주는 하나의 사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던 ‘제도’에 눈을 뜬 건 20대 초반이었다. 왜 여성만 당연히 가사 노동을 하는지, 왜 아이의 성은 아버지를 따르는지, 왜 육아와 돌봄은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는지,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보이던 시간이었다. 그 무렵, 한국 사회에는 여성 대상 범죄를 계기로 다시 한번 페미니즘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친구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당연히 결혼해 출산과 육아를 전담할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나는, 처음으로 자신을 ‘비혼주의자’라고 소개하는 친구를 만났다. 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왜 비혼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물었고, 친구는 “1인 가구야말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는 가족 형태라고 믿는다”고 답했다.
'혼자일 때 독립적이고 자유로움’ 인식
10년 전 비혼·독신 등 1인 가구 급증
최근 결혼·임신·출산 등 선택지 다양
각자의 욕망 솔직히 인정하는 분위기
남성·여성 성 역할 구분 짓지 않고
두 주체가 선택한 사랑 방식 존중을
학교에서 사회학 수업을 들으며 우리는 생각을 점점 더 구체화해 나갔다. 결혼, 임신, 출산은 여성의 주체성을 억압하는 제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언어를 손에 쥔 첫 세대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2015년 오마이뉴스에서 소개된 기획 기사 ‘결혼제도를 묻다 ④-비혼여성집담회’는 이렇게 전한다. “2015년에는 혼인 건수가 30만 건대까지 줄어들고, 1인 가구 비중이 전체 가구의 약 27%를 차지하는 등 비혼 및 독신 삶이 ‘소수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실제로 통계청 혼인 건수를 보면, 2015년 혼인은 30만 2800여 건으로 2003년 이후 최저였고, 1인 가구는 급증해 4인 가구를 제치고 대표적 가구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혼과 임신을 욕망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면 비혼을 선택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느꼈고, 결혼과 출산을 원하는 마음이 스스로 모순처럼 여겨졌다. 그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며 제도를 비판하면서도, 내 안의 욕망을 인정하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의 선택지를 오히려 줄이는 관념이었다. 미국의 작가 록산 게이는 〈배드 페미니스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릴 때조차 그것을 지지하는 기반 위에 서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놓치고 있던 지점이었다. 다른 여성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의 정신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 세대는 더 복잡해졌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워졌다. 주변에는 결혼만 하되 임신과 출산은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고, 결혼은 하지 않지만 아이를 낳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입양을 꿈꾸는 사람, 1인 가구를 유지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선택지가 다양해졌고, 각자의 욕망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건 이 선택들이 더 이상 ‘정상 가족’에 비해 부족하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상 가족의 경로를 따르지 않으면 어쩐지 잘못 살고 있다는 기분, 설명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는 각자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흐름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다.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친구에게 ‘어떻게 결혼을 결심했느냐’고 묻는다. 친구는 오랫동안 혼자일 때만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둘이서도 서로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했다. 남성과 여성 모두 성 역할에 스스로를 구분 짓지 않고, 서로의 주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의 육아와 여성의 직장 생활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두 주체가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사랑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2025년 우리가 그리는 이상적 가족의 모습 아닐까.
그래서 친구의 결혼 소식은 내게 단순한 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를 관통하는 질문이자,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변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계기였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고민을 증명하는 사건이자, 앞으로의 삶을 함께 모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난 10년간 우리가 페미니즘을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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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내년도 가덕신공항 예산 복원 이젠 신속한 착공 나설 때
정부는 내년 예산안을 올해 본예산보다 8.1% 증액된 728조 원으로 편성했다. 본예산 기준으로 총지출이 700조 원을 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라 내년 말 기준 국가채무는 1415조 원에 달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51.6%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빚을 내서라도 재정을 풀어 경제 성장을 견인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재정의 적극적인 활용은 필요하지만 동시에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발표한 내년도 국가 예산안에는 가덕신공항에 6890억 원이 편성됐다. 올해 1조 원에 가까웠던 예산에서 30% 가까이 감소한 규모지만, 가덕신공항 건설 공사가 재개된다면 내년 착공에 큰 차질이 없을 것으로 기대된다.
예산 삭감의 배경에는 현대건설 컨소시엄의 사업 참여 중단과 부지 조성 공사 시공사 선정 지연으로 올해 예산의 절반 이상(5224억 원)이 ‘불용’ 처리된 뼈아픈 현실이 작용했다. 하지만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 공사와 관련해 새 컨소시엄이 구성되면 예산은 증액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국토부의 설명이다. 이는 가덕신공항 조성 일정의 정상화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여기에 엄궁대교(320억 원), 사상~하단선(300억 원)을 비롯해 조선해양 미래혁신인재양성센터, 북항 글로벌 창업허브 등 부산시의 주요 역점 사업들이 대거 예산안에 반영된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도시로 성장할 기반을 한층 더 다졌다.
박형준 부산 시장은 최근 구윤철 경제부총리를 방문해 주요 현안 사업에 대한 국비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건의한 사업 가운데 부산 해수담수화 실증시설 조성, 사직야구장 재건축 사업과 낙동강 유역 안전한 먹는물 공급 체계 구축사업 등이 이번에 반영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부산시는 국회 예산 심사 과정에서도 행정부시장을 중심으로 지역 국회의원과 공조 체계를 강화해 국비 확보 노력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또 국회 상주반을 가동해 예산 추가 확보에 총력을 다할 계획이다. 하지만 예산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가 추가 예산을 선뜻 챙겨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한 번 놓친 예산은 되돌리기 어렵다. 결국 사업이 차질을 빚게 되는 건 부산의 손해다.
기획재정부가 올해 연말까지 턴키 발주와 기본설계를 전제로 내년도 가덕신공항 예산을 편성한 만큼 이번 예산 확보는 지연된 사업을 다시 이어갈 중요한 전환점이다. 따라서 이 기회를 다시 ‘불용’으로 날려버린다면 가덕신공항은 자칫 희망고문이 될 수 있다. 부산시는 수차례 유찰과 공정 지연 등 난관을 겪은 가덕신공항 건설사업의 내년도 국비 확보로 적기 개항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정부는 빠른 시공사 선정과 사업 재개를 위한 구체적 로드맵을 마련해 신속한 착공에 나서야 한다. 물론 미반영 예산 추가 확보를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부산의 미래가 가덕신공항 재추진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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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용후핵연료 관리비 배 인상 고시 흐지부지 배경 밝혀야
원자력발전소에서 연료로 사용한 뒤 배출하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는 핵 종류에 따라 반감기만 수 만년 가량 소요된다. 사용후핵연료 영구 처분시설이 없는 우리나라는 사용후핵연료를 발전소 내 수조, 건식저장시설로 옮겨 저장하는 수순을 밟는다. 정부는 사용후핵연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공론화위원회를 출범하는 등 그동안 대책을 모색했으나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 와중에 정부가 사용후핵연료 관리 비용을 투명하게 고시하지 않고 사실상 은폐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 스스로 원전 정책에 대한 국민 불신을 조장한 셈이다. 원전 인접 지역인 동남권 주민들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사용후핵연료의 안전한 관리와 영구처분 등을 위해 관리 비용을 부담한다. 2년마다 열리는 ‘방사성폐기물관리비용 산정위원회’가 한수원의 관리 부담금을 결정한다. 2013년 부담금을 다발당 3억 2000만 원으로 인상한 이후 부담금은 동결됐다. 그런데 정부는 2023년 경수로형 연료 다발당 기존의 배 이상인 6억 6000만 원 상당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부담금 인상은 발전 단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당시 후속 조치는 없었다. 재산정 결과가 고시되지 않으면서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일부 관계자들만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원전 관리가 주먹구구로 진행된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원전에서 배출되는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위한 부담금은 발전 단가에서 적잖은 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부담금 상승은 전력 수급 계획이나 에너지 정책 설계에 영향을 준다. 한수원은 전체 원전에 대한 부담금으로 연간 8000억 원을 내는데 이 결과가 정확하게 고시됐다면 비용이 배로 증가하고, 결국 전기료 인상 압박 요인이 됐을 것이다. 이는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사안이다. 문제는 누가, 어떤 이유로 고시를 하지 않도록 주도했느냐는 것이다. 현재는 단가 상승을 막으려는 원전 업계 등에 의혹의 눈길이 쏠린다. 탈원전 주장 등에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고시를 하지 않았다면 국민의 알권리를 정면으로 침해한 중대한 문제다.
특히 부담금을 현실화하지 않은 것은 사용후핵연료를 임시 보관하는 현재 시스템을 고착화시킬 우려가 크다. 사용후핵연료 처리용 방폐장 설치는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한다. 사용후핵연료가 누적되는 상황에서 부담금 인상을 미룬 것은 영구 방폐장에 대한 의지조차 없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최근 국내 최초로 해체 결정된 고리 1호기도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소가 포화상태에 근접했는데도 영구 방폐장 계획은 답보 상태다. 해당 부지 자체가 ‘영구 방폐장화’될 우려가 높은 것이다. 부담금 인상을 고시하지 않은 것은 부산 등 원전 주변 지역 주민들의 안전과 생명을 무시한 무책임한 행태다. 그 배경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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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노란봉투법 마주한 '가짜 사장들'을 위한 항변
10명가량 둘러앉은 최근 저녁 모임에서 A 씨는 노란봉투법 얘기를 여러 번 꺼냈다. 자동차 협력사 대표인 A 씨 얘기에 개인 사업자이거나 월급쟁이인 동석자들은 “기업들이 외국으로 다 떠나면 어떻게 하느냐” “하루가 멀다 하고 파업으로 날 새게 생겼다” 같은 말로 맞장구를 쳤을 뿐, 대화는 번번이 다른 화제로 옮겨 갔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A 씨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20년 노동계 숙원인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지난달 2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 6개월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에 들어간다. 수많은 근로자와 기업에 영향을 미칠 새 노사 관계 기준이다 보니 숱한 논란과 갈등이 벌어졌지만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는 거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직접 당사자인 중소 하청업체 목소리가 전혀 담기지 못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출범 3개월 만에 노란봉투법을 밀어붙인 정부여당과 노동계의 기세에 눌려서일까. 하청업체 목소리는 이따금 언론에 ‘익명의 하청업체 대표’ ‘기업 관계자’로 등장해 “원청 파업이 잦아지면 회사 운영이 될지 모르겠다”거나 “원청에서 계약을 끊을까 걱정”이라는 하소연 정도로 전해졌다.
당장 경제계가 우려하는 것처럼 해외로 생산시설을 옮기는 ‘코리아 엑소더스’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것도 대기업이나 외투 기업에 해당되는 일이지 국내에서 공장을 옮기려 해도 직원 눈치를 살펴야 하는 중소 하청기업엔 ‘남의 일’일 뿐이다.
대신 기업인들은 향후 고소고발이나 파업이 잦아질 것이라 보고 살길 찾기에 나선 분위기다. 법조계 판단도 다르지 않다. 국내 주요 로펌들은 법 통과 이후 노사관계 대응팀을 꾸리고 노란봉투법 관련 세미나를 연이어 열며 호응했다. 세미나마다 1000명 안팎의 기업인이 몰렸고, 제조 부문 기업 관계자 발걸음이 많았다는 전언이다.
특히, 제조업을 산업 근간으로 한 동남권의 중소 협력사들은 타 지역보다 걱정이 더 크다. 원·하청 구조가 강고한 조선 자동차 기계 철강 등이 부울경에 몰려 있다. 이런 종속관계는 한때 ‘수출강국 대한민국’을 만드는 발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청기업들은 단가 후려치기 등 원청 횡포에 항변도 못한 채 한국 제품 가격 경쟁력 유지에 일조했다. 대기업은 돈을 벌어도 이윤을 나누는 일에는 인색했다. 그들이 지금 와서는 다단계 하청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란봉투법이라는 또 다른 장벽을 만났을 뿐이다.
노사가 교섭 테이블에 앉아도 문제 해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사용자 범위 확대’ ‘교섭·쟁의 대상 확대’ ‘손해배상·가압류 제한’ 등 노란봉투법 조항들이 모호하고 다툼의 여지가 많다는 평가가 노사 모두에서 나온다.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사용자 여부를 가리는 일부터 책임 범위,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사안마다 장기 법적 분쟁이 이어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노란봉투법이 순조롭게 자리 잡아 노동자 권리가 신장돼도 하청기업들은 더 힘겨워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원청이 권한과 교섭권이 강화된 하청 노동자와 직접 교섭을 벌이는 한편 그 손실은 원가 절감을 요구하며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상황도 예상된다. ‘대화의 장’에 끼지도 못하는 하청기업들은 인건비 상승, 파업 리스크, 원청과의 거래 단절까지 걱정할 판이다.
노사 갈등이나 제도 개선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하청업체엔 더 암울한 상황이다. 노란봉투법 성공 여부는 법률의 모호함을 최대한 구체화하고 그 과정을 얼마나 단축시키냐에 달렸다. 정부와 노동계도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법을 시행한 뒤 문제 있으면 고치자”는 정책 핵심 당국자 언사는 지나치게 안이하다. 대립이 격화된다면 하청 중소기업 현실까지 고려될 기회는 더 줄어든다.
무엇보다 일순간 추락한 하청업체 기업인들 자존심은 어떻게 살려야 할지 걱정이다. “진짜 사장이 나서라”는 노동계의 외침에 수십 년 한국 경제 성장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수많은 중소 기업인이 ‘가짜 사장’ 신세가 돼버렸다. 직원 월급 주려고 은행을 쫓아다니며 손을 벌리고, 제품을 개선하려고 국내외를 찾아다닌 노력은 노란봉투법에 짧은 수식어로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돈만 벌면 그만인 사람’으로 치부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계는 정부에 입법 보완을 요구하고 있지만 유예기간 6개월간 제대로 된 목소리가 담길 수 있을지 우려한다. 사용자 범위, 노동쟁의 개념, 경영상의 권한 침해 여부 등 하나하나가 논란과 갈등의 요소인 만큼 보완책이 나온다 해도 부정적 영향이 제대로 제거될지 미지수다. 정부와 노사가 또 다른 ‘힘의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경제 주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로 최선의 해법을 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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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의 문화시선] 35년 만의 귀환, 홍성담 판화
사진 한 장마저도 겁에 질려서 내놓을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엄혹했던 그때 그 시절, 민중미술가 홍성담(1955년생) 작가의 ‘오월 판화 연작’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과 시민 항쟁 의지를 국내외에 생생하게 알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판화 연작은 〈새벽〉이라는 제목의 연작 판화집으로도 나왔으며, “항쟁 당시의 분노, 슬픔, 희망 등 다양한 감정과 진실을 담아내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홍 작가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이후 수배와 1989년 투옥을 거치는 동안 그의 초기 작품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이때 그를 여러모로 후원한 것이 한국 가톨릭이었고, ‘오월 판화 연작’ 첫 작품 공개나 ‘오월 판화 연작’ 첫 전시도 가톨릭을 통해 이뤄졌다. 또한 일부는 홍 작가 구명 운동과 후원 목적으로 독일로 작품이 반출돼 한국의 비민주적인 현실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이번에 독일에 있던 판화 초기작 50여 점과 각종 자료 등 100여 점이 35년 만에 작가 품으로 돌아온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것도 1989년 ‘오월 판화 연작’ 첫 전시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는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홍성담 독일 유배 작품 35년 귀환 기념 전시’(가제)가 추진돼 성사 여부에 귀추가 주목된다.
돌아오는 작품 대부분은 홍 작가가 1980년대에 제작한 판화들로, 광주민주화운동뿐 아니라 우리나라 탈춤과 농악 등을 표현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작가 자신도 어떤 작품이 ‘반출’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다. 수배 중 제작한 것들이어서, 홍 작가 주요 판화(고무판화, 목판화)의 초기 희귀작일 가능성이 크다.
1990년 독일 순회전은 홍 작가가 1989년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작업에 참여했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른 것이 계기였다. 독일에는 이미 홍 작가가 전시했던 작품 중 일부가 있었고, 그가 결성한 시각매체연구회가 찍은 판화를 더해 행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작가 본인은 1992년 8월 석방된 이후에야 독일 전시 존재를 알게 된다. 당시 유럽 전시는 큰 반향을 일으켜 국제사회의 석방 촉구가 잇따랐다.
홍 작가의 판화는 과거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기록이자 역사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또한 홍 작가는 독일 유배 한국 미공개 작품 순회 첫 전시를 부산가톨릭센터에서 개최함으로써 종교와 사회, 종교와 예술의 동행을 다시금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작품은 독일에서 봉인된 채로 9월 1일 홍 작가 안산 작업실에 도착한다. 작가는 이 상자를 개봉하지 않고 부산가톨릭센터로 가져와 현장에서 봉인 해제한 뒤, 이를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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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국가 부채의 기능
미국이 ‘천조국’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건 국방비 때문이다. 지난해 국방비 8414억 달러는 우리 돈 1000조 원을 훌쩍 뛰어 넘는다. 문제는 ‘1000조국’을 능가해 버린 국가 부채 비용이다. 곳간이 빌 때마다 채권을 발행한 탓에 올해 이자만 9520억 달러(우리 돈 1320조 원)다. 빚 갚는 돈이 국방비를 역전하면 패권 쇠락이 시작된다는 이론까지 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동맹국의 팔을 비틀어 공장을 유치하고, 국경 통과세(관세)로 삥뜯는 미국의 낯선 모습이 설명되는 대목이다.
EU(유럽연합)의 재정 위기는 미국보다 심각하다. 지난해 유로존 국가들의 재정 적자 3분의 2가 이자 비용이었다. 심지어 프랑스는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우려할 상황이다. 프랑스의 공공 부채는 지난해 3조 3000억 유로(우리 돈 5200조 원)로, 국내총생산(GDP)의 113%다. 재무장관이 “IMF 개입 위험”을 공론화해 파문을 일으켰고, 총리는 지난달 25일 긴축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하고 신임 투표를 요청했다. 야권이 불신임을 벼르고 있어 내각이 해산될 위기다. 부채 비율 1위는 일본(234.9%)이다. 미국(124%)의 배에 가깝다. 복지비와 경기 부양을 위한 자금을 국채에 의존한 공통점이 있다. 저성장 탓에 세수가 준 것도 마찬가지다.
재정 적자의 역할과 효과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폴 시어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전 부회장은 “정부의 부채는 그것을 보유한 사람에게는 자산”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의 적자는 민간의 흑자이기 때문에 후대에 부담을 준다는 논리에 반대한다. 그는 올해 출간된 〈돈의 권력〉에서 “걱정해야 할 것은 정부 부채로 인한 부담이 아니라, 정부의 적절한 규모와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정부가 올해보다 8.1% 늘어난 728조 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을 편성했다. 적자 누적으로 내년 부채는 1415조 원까지 증가한다. GDP의 51.6%로 사상 처음으로 50%대를 넘겨 재정 건전성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내수 침체와 저성장의 터널을 빠져 나오는 데 적극적 재정 정책이 필요한 측면도 부인하기 힘들다. 재정 지출은 성장의 마중물이 돼야 비로소 쓸모가 있다. 세수 확대, 구조 개혁도 병행돼야 의미가 있다. 나랏빚으로 국가 경제와 민생을 지탱했지만 성장 동력 확보에 실패해 재정 위기에 처한 선진국이 반면교사다. GDP 대비 50% 돌파를 목전에 둔 지금 국민은 국가 부채의 효능을 묻는다. 선진국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정부는 실천적 답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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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해양인재가 대한민국 흥망 가른다
세계 해운·조선 생태계가 구조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국제해사기구(IMO)가 2023년 개정 온실가스 전략에서 2050년께 넷제로 달성을 명시하고 올해는 연료 기준과 배출 가격을 결합한 글로벌 규제틀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규제 준수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인력·표준 경쟁의 문제다. 누가 연료 전환과 운영 안전, 디지털 최적화 역량을 먼저 확보하느냐가 시장지배력을 좌우한다.
유럽연합은 지난해부터 해운을 EU 배출거래시스템(EU-ETS)에 편입했고, 올해는 유럽연합온실가스저감규제를 본격 가동하며 선박 에너지의 탄소집약도 저감을 의무화한다. 규제 타임라인은 이미 돌아가고 있으며, 단지 ‘새 연료를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라 ‘새 연료를 안전하게 다루고, 데이터로 운항·정비를 최적화하며, 국제규정과 계약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성패를 가른다.
국내 정책 환경도 ‘인재’로 초점이 모인다. 북극항로 개척을 통한 K-해양강국 건설이 국정과제로 추진되고 해양수산부 2025년 업무계획은 ‘민생에 온기, 경제에 활력’을 내걸고 글로벌 선도 해상물류 공급망, 깨끗하고 안전한 바다, 연안·어촌 활력, 글로벌 해양 리더십 등을 핵심축으로 제시했다. 이는 곧 스마트 항만·친환경 선박·자율 운항 등 전환 영역에서 교육·훈련·실증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신호다.
부산시는 ‘글로벌 해양수도’ 도약을 선언하고 북항·신항·영도·남항 등 5대 항만을 잇는 혁신거점을 재편, 공간혁신·산업혁신·인재혁신 3대 전략과 12개 실행과제를 가동했다. 해양금융·본사 집적, 해양신산업 육성, 해양과학기술 축을 연결해 세계 5위권 해양도시로의 도약을 목표로 하고, 국정과제인 북극항로 개척과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흐름을 지역 전략에 내재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선언의 성패는 결국 ‘인재혁신’이 쥐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한미 조선해양 협력이 새로운 스케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 정상외교를 계기로 한국 조선사들은 미국 조선소 현대화·공급망 강화·첨단조선기술 투자 및 합작펀드에 참여하며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로 상징되는 조선 협력의 생산능력 회복과 기술이전을 시도한다. 이는 생산설비 이전이 아니라 인력과 표준의 공동생태계 구축이라는 점에서 교육·훈련의 초국경 체계를 요구한다.
따라서 해양분야 인재육성은 ‘미래 대비’가 아니라 ‘현재 대응’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상은 첫째, 암모니아·메탄올·수소 등 위험물 대체연료를 안전하게 취급·운영할 수 있는 연료전환 안전 전문가이고, 둘째, 자율운항·예지정비·항로·기상·벙커링 데이터를 통합하는 디지털 해기·항만 운영자, 셋째, 해사분야 국제협약을 이해하고 해상운송계약·해상보험·해사분쟁까지 다루는 규제·법무·금융 융합형 인재다. 이 삼중 역량을 대학·기술교육·현장학습으로 연결하는 지산학 협력 모듈이 마련되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는 첫째, 국가 해양인재 전략펀드를 가동해 ‘그린×디지털×글로컬’ 핵심전공과 대학원·폴리텍·해기사 교육을 통합 지원해야 한다. 장학·채용연계·장기현장실습을 묶고, 연료전환·안전·규제과목을 국가 표준 커리큘럼으로 인증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둘째, 해사분야 규제 샌드박스를 확대해 교육-실증-자격의 선순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자율운항선박 촉진법이라는 기둥이 서 있는 만큼, 실증특례를 인력 자격·훈련과 바로 연동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셋째, 한미 조선해양 협력 연계 인력 공동양성 프로그램을 국책과제로 상향해 공동학위·상호인정·표준훈련을 구축해야 한다. 미국해사청(MARAD)의 ‘국내 해양인력 양성 우수기관(CoE)’ 지정제도와 연계해 양국 실습선·시뮬레이터를 공유하면 교육의 신뢰성과 이동성이 높아진다.
부산시 차원에서는 북항·신항을 잇는 인재혁신 허브를 조성해 교육·실습·채용이 한 공간에서 이어지는 캠퍼스형 거점을 만들 필요가 있다. 항만 디지털 트윈, 연료·안전 실습센터, 국제교육 시설을 하나의 패키지로 배치하고, 부산형 장학·기숙·생활지원으로 청년 정주성을 높여야 한다. 더불어 싱가포르 해사항만청(MPA)·영국 해사기술위원회(Maritime Skills Commission)·미국 상선사관학교와 학점교류·단기 공동훈련을 제도화해, 부산을 동북아 해양인재의 관문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 한국은 결정적 ‘타이밍’ 위에 서 있다. 규제의 시계는 이미 가동됐고, 부산은 세계 해양수도로 도약하겠다고 선언했으며, 한미 협력은 거대한 투자를 동반하고 있다. 남은 것은 사람을 앞세우는 일이다. 인재를 먼저 확보하면 규제는 기회가 되고, 한국 해양산업은 세계의 표준을 주도하게 된다. 이 거대한 전환의 열쇠는 설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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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밥심에서 커피심으로
오늘도 아침밥 대신 커피로 하루를 연다. 비단 나만 그럴까. 요즈음은 밥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커피심으로 견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에는 ‘밥’으로 통하는 인사말을 주고받았다면, 지금은 “언제 커피나 한잔합시다”라는 대화까지 일상화되었다. 나 또한 이다음에 죽으면 어동육서로 줄지은 제사음식 대신 좋아하는 커피 한 잔만 올려 달라고 일러두었으니 커피의 위력은 사후까지 발휘될 태세이다.
내친김에 커피박물관에 가보기로 한다. 가는 길 내내 다방, 커피숍, 카페, 커피하우스 등 커피 전문점 간판이 숱하게 내걸렸다. 가히 커피숍 전성시대이다. 현대인은 커피 소비로도 자신을 나타낸다. 어디서 커피를 마시는지, 어떤 커피를 애호하는지, 누구와 함께 마시는지…. 커피가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커피는 분위기다. 밖에서 보더라도 감성 넘치는 카페에 더 오래 눈길이 간다. 도착지인 커피박물관도 폐역이 된 부산진역을 탈바꿈시켰으니 의미로운 장소가 되겠다.
이십 년 전만 하더라도 여객열차가 정차하던 곳이라 저 멀리서부터 기적 소리라도 울려 퍼지는 듯하다. 커피에 조예가 깊은 한 시민이 전 세계에서 수집한 이천여 점의 커피 기구를 기증했다는데 대단한 안목이다. 향미에 따라 적절히 섞어 재창조하는 블렌딩과 생콩에 열을 가하는 로스팅을 거쳐 분쇄 커피를 물과 함께 끓이는 달임식, 여과 장치에 넣고 거르는 여과식, 뜨거운 물에 담가 우리는 우림식, 압력을 가하는 가압식 등의 추출 방식이 시대별로 전시되었다. 추출 기구도 터키쉬, 보일링, 비긴, 사이펀, 네오폴리탄, 퍼컬레이터 등 생경한 것이 많고, 생김새도 램프를 닮은 것, 오르골 모양, 양동이를 본뜬 것, 기차 형태 등 다양한데,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온 절구통 분쇄기 앞에서 발길이 멈추었다.
콩팥 이식 수술을 한 그녀의 집은 단출했다. 가족이 떨어져 혼자 지낸 세월도 오래되었지만, 당뇨환자라는 상황이 주변을 더욱 간소하게 만들었다. 그 외로운 사람에게 찾아갔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대뜸 커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선물 받은 원두 콩이 있다고 하였다. 아무렴, 한더위를 식혀줄 아이스커피 한 잔이면 된다고 무심코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식이요법을 하는 그녀의 집에 커피머신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마늘 찧는 절구통이었다. 나는 아연하였으나 그날 열서너 평의 작은 아파트를 가득 채운 헤이즐넛 향기는 어느 과일 향과 꽃 향보다도 향긋했다. 십여 분간 절구통에 찧은 커피 가루를 체에 걸러 내려 얼음을 띄운 냉커피 한 잔, 어찌 그 맛을 짧은 혀의 감각으로만 평가할 수 있으랴.
에티오피아의 고원인 카파 지방에서 어느 목동 소년이 처음으로 커피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천 년도 훨씬 넘은 설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첫 커피 열매를 발견한 자에게 경의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시게 된다는 젊은이들과, 오로지 나만의 공간을 찾아 앉을 수 있는 것도 커피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절차가 복잡한 차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은 일과 함께하기 힘들지만, 커피는 정신을 깨어있게 만드니 일할 때도 잘 어울린다. 심지어 ‘워킹 커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걸어 다니면서도 마실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왜 이렇게 커피에 열광하는가. 맛은 물론이거니와 커피를 마실 때를 생각해보라. 신분이나 지위나 나이도 잊을 수 있을 만큼 경계를 허물고 여유를 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직원이 방금 내린 한 잔의 커피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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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인도네시아 외교, 전환점에 서다
최근 며칠 사이 한-인도네시아 외교관계 지평에 지각 변동에 비유될 수 있는 대형 외교 사건이 발생했다. 필자는 지난 6월 중순께 한국에서 자카르타로 들어 오는 길에 인천공항에서 TV 뉴스를 통해 이재명 대통령이 캐나다에서 개최되고 있는 G7정상 회담에 참석해 서방 지도자들과 정상 외교 활동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자카르타 숙소에 도착하여 현지 TV를 통해 프라보우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러시아가 G7회의에 맞대응하는 성격으로 개최하고 있는 SPIEF 2025에 참석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글로벌 사우스의 단합을 논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물론, 프라보우 대통령이 참석 배경에 대해 "G7과 SPIEF 양쪽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SPIEF로부터 먼저 초청을 받아 참석한 것이니, 너무 비약은 말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독립 후 전통적으로 비동맹 외교노선을 견지해 온 인도네시아가 "우리나라가 참가한 G7과 대립관계에 있는 SPIEF에 참가한 사실"에 대해 우리 외교 당국은 배경 분석과 함께 향후 한-인도네시아 관계에 미칠 여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라보우 대통령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이면에는 최근의 국제 정치 상황이 영향을 미친 측면과 함께 그의 담백한 퍼서낼리티(Personality)와 관계가 있다고 분석된다. 인도네시아와 종교 외교적으로 각별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이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에 의해 1년 반에 걸친 무력 침공을 받아 5만여 명의 인명 희생을 겪고, 사회 인프라 대부분이 처참하게 파괴 당한 모습,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선제적으로 이란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행위를 이중잣대에 의한 심각한 반인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독립 후 비동맹을 일관되게 시그니처 외교 기조로 유지해온 인도네시아가 어느 한 쪽 진영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다만, 한-인도네시아 관계의 하모니를 염원하는 필자가 우려하는 대목은, 양국 간 외교 관계 보다 경제 분야 협력에 미칠 영향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외교 정책은 경제, 국방, 교육, 문화 정책보다 상위 개념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인도네시아가 중-러에 밀착할 경우, 우리와의 통상, 투자, 문화 등 분야에서 특히 우리의 자원외교, 방산 수출, 대형 국책건설 부문에서 이미 중국에 비해 열세인 상황이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나마 한-인도네시아 양국의 외교 노선의 차이점이 명백히 노출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양국 지도자들이나, 학자들은 양국 외교 노선의 차이점을 인지하면서도 애써 외면해 온 측면도 있다. 드러내 놓고, 차이점을 얘기하면 우호 협력 분위기를 깰 것을 염려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대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경우를 포함해 최근에 목격된 외교적 상황들, 이를 테면 정상외교를 중시하는 프라보우 대통령이 동북아 3국 가운데 우리나라만 패싱한 점, 이재명 대통령 취임 후, 정상 간 취임 축하 통화가 다른 아세안 나라들보다 지연된 점 등을 볼 때, 이제는 솔직히 차이점과 그 배경을 상호 이해하고, 존중하는 새로운 입장을 강구하며, 나아가 양국이 공통적으로 협력을 필요로 하는 통상, 투자, 관광, 문화, 교육, 인력 등 분야의 협력 강화에 보다 비중을 두는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울러,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대통령 프라보우의 파워가 외교는 물론 통상 등 전 영역에 걸쳐 절대적인 점, 그의 퍼서낼리티가 매우 강한 점, 그가 국방장관 시절 우리나라와 불편한 현안들이 있었다는 점 등을 유념하여,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위기에 처한 양국 관계를 이끌어갈 차기 주인도네시아 공관장은 특별히 프라보우 정부 인사들과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현지 사정에 정통한 인사를 중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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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회복지사의 길, 사회복지의 달에 돌아보다
요즘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팍팍하다. 물가와 금리는 다소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경기 회복은 더디고 양극화와 불평등은 더욱 고착화되고 있다. 기후위기와 잦아지는 재난, 불안정한 노동환경과 돌봄 공백은 새로운 사회적 위험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가장 먼저 취약계층의 삶을 위협한다. 특히 부산은 전국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빠른 고령화, 장애인구의 증가, 1인 가구 확대 등 복합적인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런 시대에 최소한의 온기를 불어넣고, 무너지는 일상을 붙잡아 주는 존재가 바로 현장의 사회복지사가 아닐까. 부산에는 1만 5000여 명의 사회복지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뛰며, 누군가에게는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사회복지사에게 주어진 소명이자 사명감이며, 또한 책임이다.
9월은 사회복지의 달이고, 9월 7일은 사회복지의 날이다. 1999년 9월 7일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전신인 생활보호법이 시혜적이고 단순보호 차원의 복지서비스를 지원해 왔다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빈곤을 개인이 아닌 국가의 책임으로 간주하고, 전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자립자활서비스까지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즉,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공포일을 사회복지의 날로 지정했다는 것은 사회복지가 소외된 계층과 소수의 뜻있는 사람들만의 관심사가 아닌 전 국민이 사회복지의 대상이 되며, 그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동시에 사회복지의 날은 열악한 근무환경과 처우에 시달리는 사회복지사들을 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사회복지사의 낮은 임금수준과 열악한 근무환경은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을 2011년 3월에 명문화하였다. 소위 ‘사회복지사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복지사 등의 처우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이 제정된 지 14년째이지만 여전히 사회복지사의 처우는 열악하다.
사회복지사들은 여전히 헌신과 희생의 이데올로기와 민간 중심의 전달체계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에 앞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사회복지사로서 책임을 다한 결과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의 연속이다.
부족한 인력을 증원하거나 연장근로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지 않아 노동자들은 무료노동을 강요받고 있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확충되는 일자리는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와 반복되는 계약 해지의 덫에 놓여있다.
또한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시설임에도 5인 미만의 소규모시설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아 기본적 권리마저 보장되지 않고 있다. 공무원의 임금수준에 도달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의 임금 인상만큼 사회복지사의 임금을 인상하지는 않고 있다.
고단하다. 여전히 날은 덥고, 갈 길은 멀고,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친다.
지역 깊숙이 스며들어 세상의 그늘진 곳을 밝히는 사회복지사의 남모를 수고와 헌신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근로환경은 언제쯤 조성될까? 고단한 ‘사회복지사의 길’이라는 여정을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는 사회복지사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뒷전이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