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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뉴이재명은 ‘보수’인가
2004년 5월 29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1980년대 운동권 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열린우리당) 17대 총선 당선자의 만찬에서 80년대 학번 운동권 출신 당선자 30여 명이 이 노래를 선창하자 노무현과 다른 참석자들도 모두 따라 불렀다.
보수 진영에서는 난리가 났다. 급진적인 개혁과 국가 체제의 혼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어르신들은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지금은 국가가 주관하는 5·18 기념식에서 제창하는 노래지만 그때는 파격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정책들은 보수세력의 걱정만큼 급발진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 파병을 결정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오히려 진보 진영으로부터 욕을 먹었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을 둘러싼 ‘부안 사태’는 진보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의 생채기가 됐다.
152석의 과반 의석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개혁 정책을 관철시키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백팔번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여당 초선의원 108명의 진보 정체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때가 덜 묻었던 원리주의자들은 실용 노선을 걸으려고 했던 노무현을 임기 내내 괴롭혔다. 그 때문인지 진보 지지층 내에서 발생한 균열로 노무현 국정수행 지지율은 집권 5년 차에 27%까지 폭락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때 자신이 ‘중도 보수’라고 주장했다. 외연 확장을 위한 선거 전략의 하나로 이해됐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까지는 실용주의 정책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미국과 일본을 중시하는 외교 노선, 검찰 개혁 과정에서 불거진 강경파들의 주장을 ‘외과 시술적 교정이 유용하다’는 논리로 뚫어 나가고 있다.
이 대통령은 “필요한 개혁을 하더라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며 모두를 개혁 대상으로 몰아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결과가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며 “검찰 개혁이든 노동·경제 개혁이든 언론 개혁이든 법원 개혁이든 그 무슨 개혁이든 그래야 한다는 게 제 생각”(3월 9일 X 메시지)이라고 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화두로 들고나왔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마약범죄·공직부패·보이스피싱·부동산 불법 행위·고액 악성 세금체납·주가조작·중대재해 등을 ‘7대 비정상’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요소를 정상화하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는 “국가정상화위원회라든지 일종의 팀을 만들어 ‘비정상의 정상화’ 사업을 각 부처 단위로 주요 과제를 뽑아 종합해서 한번 해보면 어떨지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취임 후 첫 여름휴가를 다녀온 직후인 2013년 8월이었다.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실은 모든 정부 부처에 비정상 사례를 수집해 보고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박 전 대통령은 그해 광복절 경축사와 이듬해 신년사를 통해 거듭 ‘비정상의 정상화’를 국정운영의 기조로 천명하면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다만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6년 총선 패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등으로 국정의 구심력을 잃고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빛이 바랬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누가 봐도 보수의 용어다. 진보 입장에서 비정상은 청산해야 할 적폐이지, 정상화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성향이나 습관을 바꾸긴 쉽지 않기 때문에 아예 교체해야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굳이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심정적인 저항감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 “실제 상황을 바꾸면 되는 것이고 결과가 중요하다”(3월 10일 국무회의)고 말한다.
여권 내부에서는 이 대통령의 이런 실용주의적 노선을 추종하는 ‘뉴이재명’ 그룹이 태동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임기 말까지 이 노선을 추구한다면, 뉴이재명 세력은 그때까지 든든한 지원군으로 남을 전망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진짜 보수인지 실용적 진보인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 명확해질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대통령의 진의가 드러나기 전까지 보수정당임을 내세우는 국민의힘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석호 정치부 선임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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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4·7세 고시 금지법
‘개학 대비 리더십 캠프.’ 초등학교 앞 학원에 내걸린 선전 문구다. 발표력, 설득력, 자기소개법을 가르친다. 발성, 표정, 제스처 요령과 논리적으로 말하는 훈련이 커리큘럼이다. 쉽게 말하면 ‘반장 학원’이다. 사교육은 학습 성과를 넘어 관계 맺기의 우열에까지 스며들었다.
학원은 한국 고유의 사회문화 현상이다. 외신도 번역하지 않고 ‘hagwon’으로 지칭한다. ‘private academy(사설 교습소)’로 옮기면 대학입시 사교육뿐만 아니라 초등 방과후 심화 학습, 나아가 영유아까지 확장된 선행 교육의 특성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6세 미만 영유아 47.6%가 사교육을 받고 있다.’ 지난해 3월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취학 전 아동 학원 시장이 거대 산업화했다는 기사에서 좁은 영어유치원의 문을 뚫기 위한 ‘4세 고시’ 실태를 전했다. 유명 영어·수학 학원에 다니려면 구술시험을 포함한 레벨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데 수준이 높다 보니 고시 수험생처럼 매달린다는 것이다. 유치원 졸업 때가 되면 ‘7세 고시’가 기다리고 있다. 초등생이 된 뒤 더 좋은 영어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4·7세 아동에 영어로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설명력을 강요하는 극성 사교육에 원성이 들끓었다. 그 결과 ‘4·7세 고시’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학원법) 개정안이 지난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모처럼 여야 합의로 처리됐다. 앞으로 영유아 레벨 테스트는 금지되고, 어기면 영업정지나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
환영하는 목소리가 다수지만 우려는 여전하다. 학원에 다니는 동안 관찰·면담 방식의 ‘진단 행위’는 허용되기 때문에 서열화 수단으로 오용될 소지는 여전하다. 자체 시험을 치르지 않고 계열 유치원생만 받는 꼼수가 나올 수도 있다.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돼 더 좁은 문이 되거나, 조기 교육을 앞당길 부작용도 걱정이다.
한국 특유의 집단 경쟁이 낳은 괴물을 잡으려 세계 유일의 ‘영유아 시험 처벌법’까지 나왔다. 교육 당국의 관리 감독이 중요하지만, 심리적·사회구조적 요인이 바뀌지 않으면 근절은 요원하다. 백방의 규제로도 좀체 잡히지 않는 부동산 광풍이 겹치는 대목이다. 벌써 유명 학원의 상혼과 수많은 ‘대치맘’의 조바심이 결국 편법의 우회로를 만들 것이라는 자조도 나온다. 아이를 경쟁의 도구로 내모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면 ‘4·7세 고시’는 이름만 바꿔 되살아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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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뭐 하고 놀아야 해?” 부모에게 묻는 아이들
지난해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 딸이 입학했다. 자기 덩치보다 큰 가방을 멘 자녀의 등하굣길을 함께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보람이었다. 종이 울리면 운동장은 인조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깔깔대는 아이들로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약 30년 전 초등학교에 다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도 ‘동심’은 여전하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하교 풍경이 달라졌다. 아이들 손에 입학 선물로 받은 스마트폰이 하나둘 쥐어지기 시작하면서 운동장 한쪽이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친구의 얼굴을 마주 보기보다 각자 화면을 들여다본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서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스마트폰만 보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요즘 아이들은 심심할 틈이 없다. 맞벌이 부부가 아이의 동선과 학원 출석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사주는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은 연락 수단을 넘어 가장 중독적인 놀이터가 된 지 오래다. 친구를 기다리는 빈틈, 학원이나 집으로 가는 잠깐의 시간까지 작은 화면이 차지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선 ‘과잉보호’, 온라인 세계에선 ‘과소보호’로 요약된다. 놀이터에 나온 7~8세쯤 돼 보이는 아이가 엄마에게 “뭐 하고 놀아야 해?”라고 묻는 장면은 낯설고도 충격적이었다. 부모가 빽빽한 학원 일정으로 아이를 빈틈없이 관리하면서도, 정작 아이가 들여다보는 화면 속 위험에는 너무나 무지하다. 국민을 경악하게 한 조주빈의 ‘n번방’ 사건 당시,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 중 최연소는 만 11세 초등학생이었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온라인에서는 사실상 무방비로 내몰린 셈이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저서 ‘불안 세대’에서 스마트폰이 청소년 정신건강을 구조적으로 악화시킨다고 경고한다. 특히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후 10대 여자 청소년의 우울증과 자살 충동 등 정신 건강 지표가 비정상적으로 치솟았다. 과거 전쟁과 국가적 위기를 겪은 세대조차 오늘날 청소년에게서 나타나는 수준의 우울과 불안, 자해 충동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자아가 형성되기 전 무분별한 스마트폰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위태로운 청소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현실은 학교 현장에서도 드러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0년 만에 학교 일과 중 휴대전화 수거·보관을 인권침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을 바꿨다. 2014년 이후 관련 진정을 모두 인권침해로 인정했지만, 2024년 10월 전원위원회에서 8대 2로 이를 기각한 것이다. 사이버 폭력과 성 착취물 노출 등 휴대전화 부작용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학교 안에서조차 강력한 규율이 필요해진 현실이라면, 무방비 상태인 학교 밖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 역시 더 이상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최근 세계 최초로 ‘16세 미만 청소년 SNS 금지법’을 시행한 호주에 이어 영국, 덴마크 등 유럽 일부 국가들도 관련 법안을 발의했거나 검토 중이다.
하굣길 운동장에서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아이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선택이, 정작 아이가 몸으로 부딪치며 배워야 할 세상을 작은 화면 속에 가둬버린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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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봄, 아침 산책, 다중문화 생각
이란 전쟁의 비극이 계속하여 세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봄이다.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도 싫고, 여러 모순을 해결하고 삶의 조건을 개선해달라고 일어선 시위 국민을 ‘폭도’와 ‘순교자’로 동시에 내모는 이란 내 지배세력도 못마땅하다. 늪으로 빠져드는 이 비극을 딛고서 그래도 세계가 관용과 공존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가속페달을 밟으며 밑으로 밑으로만 추락할 것인가? 뒤숭숭한 마음을 안고 아침 산책을 나선다.
그래도 때가 되면 꽃은 피고, 새는 노래하고, 물빛은 짙다. 부산 기장군 좌광천을 따라, 저수지를 지나, 대천사로 오른다. 유리 나기빈(1897~1975)의 소설 제목에서 따서 내가 ‘어두운 참나무’라고 부르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지석골을 굽어보며 오늘도 우뚝하다. 저 밑동에선 다시 온갖 벌레와 유충들이 우글거릴 거고, 쌀알같이 잔잔한 저 꽃망울들 위에 산들바람이 한 번만 더 불면 지나가는 고양이의 잔털에도 봄 향기가 짙겠다. 나뭇등걸에 앉아서 어제 일을 되돌아보며 멀리 아른아른한 청거북의 등에 괜히 시선을 던져본다. 밖은 전쟁으로 아우성인데, 이 안은 무릉도원이다. 평화로운 물소리, 새소리에 귀를 대며 어슬렁어슬렁 절 안으로 들어간다.
올 적마다 느끼는 거지만, 봄날이 오니 더한 것 같다. 다른 고향과 다른 문화적 배경을 안고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이 봄빛의 따스한 치마 안에서 서로에게 녹아들어 있는 느낌을 준다. 일주문 안쪽에는 왕방울 눈을 부릅뜬 인도 수미산 중턱에서 온 두 명의 사천왕 아저씨가 보초를 서 있고, 중앙아시아의 12지신, 낙태되거나 물에 빠져 죽은 어린아이의 영혼을 구제한다는 일본풍의 수자(水子)령 지장보살이 마당의 돌부처를 지키고 있다. 동남아시아 절의 관욕(灌浴) 문화, 중국 왕실의 전각과 처마, 조선의 왕들이 다닌 길을 이어받은 법당 중앙의 어간(御間), 산신각에서 뛰어나오는 수천 년 묵은 신령과 호랑이도 있다. 용왕, 칠성님, 돌 할미,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우리 불교만의 나반존자 등도 이 작은 절간의 주인들이다. 뜯어보면 여러 국적의 여러 문화가 한 공간에 있고, 한국 문화라고 해도 민중문화, 양반문화, 궁중문화 등 지층이 다양하다. 포토존을 표시한다고 그랬는지, 홍문관을 연상시키는 저 옥당(玉堂) 벽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 올림포스산에서 온 듯한 서양 천사의 하얀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말하자면, 능청스럽다. 서로 낯설었을 상징과 표상들이 여러 사연을 안고 극동의 이 동쪽 끝에 모여 독특한 하모니를 내고 있다. 오랜 세월 부딪히며 하나의 둥그런 만다라를 이루었으면서 본래부터 근원이 하나인 듯이, 처음부터 한 가족이었던 듯이 천연덕스럽다.
오늘을 기준으로 굳이 역산해 본다면,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 화상이 처음으로 한반도에 불교를 전한 이래 이 다색의 자연스러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데 무려 1700여 년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한 번이면 족하지, 또다시 그만한 세월을 기다려서 우리 사회를 다(多) 지층화, 다 음성화할 순 없을 것이다. 전술 전략을 잘 세우고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실천하여, 다시 하나 되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크게 앞당겨야 한다. 그런데 이런저런 상념도 잠시, 점차 확전 되는 미국-이란 전쟁이 블랙홀이 되어 모든 걸 삼키고 앗아가 버린다.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의 예언대로 이 찬란한 봄기운, 뭇 생명의 부활, 문화 결합과 용융의 에너지마저도 저 거대한 악과 욕망 앞에선 그저 속수무책인 걸까? 결국은 물질 문명과 전체주의의 검은 쇠 손바닥이 우리의 작은 생명의 노래, 화합의 노래를 영원히 걷어가 버리고 말까? 이 악다구니에도 결국은 끝이라는 게 있을 건데, 그 끝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
어둑어둑 저수지에 산 그림자가 비쳐들고, 물소리도 잦아졌다. 거북이들도 물 구슬을 뚫고 용궁으로 뛰어든 지 오래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만난 ‘어두운 참나무’, 오늘도 귀갓길을 잊고 한 소년이 흙바닥에 앉아 나무 밑동을 열심히 살피고 있다. 다중문화란 결국 생명 존중, 존재 간의 연민을 말할 것이다. 어제와 다른 빛깔과 다른 움직임의 오늘, 저 소년은 아침 등굣길에 그랬던 것처럼 돌아갈 때도 주변의 모든 사물과 생명의 변화에 일일이 반응하고 감탄하다가, 아마도 밤이 늦어야 집으로 돌아가리라. 러시아 숲엔 늑대와 곰이 우글거리는데 겁도 안 나는지…. 40리 밖 학교에선 사범대학을 갓 졸업하고 이 시골 학교에 부임한 새내기 선생님이 안절부절못하며 소년의 무사 귀가를 기도하고 있을 테고, 시커먼 언덕을 한참 오르내려야 나오는 소년의 통나무집에선 오늘도 홀어머니가 아들 녀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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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중동 전쟁 격화, 부울경 지역 경제 전방위 피해 확산
중동 전쟁이 점점 장기화의 수렁에 진입하는 모양새로 흘러가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에서의 군사작전 축소 방안 검토 발표 하루만에 호르무즈 해협 완전 개방 불응시 이란 발전소 초토화를 공언하면서다. 이에 따라 전쟁 초기부터 우려돼 온 국내 경제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 본격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 중동발 뱃길이 끊어지면서 원료 부족이 현실화하자 부울경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석유화학·철강 등 관련 업체들은 감당 못할 피해 앞에서 신음하는 중이다. 피해는 기업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물가를 올리는 압력으로 작용해 서민들은 기름값 폭등에 이어 밥상 물가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 됐다.
동남권 지역의 석유화학업체들은 나프타와 에틸렌 등 원료 공급 차질로 인해 실제로 저조한 공장 가동률를 나타내고 있다. 울산에 공장을 둔 대한유화는 중동산 나프타 대신 미국산으로 수입처 다변화에 일찌감치 나섰으나 물량 확보가 저조해 최근 공장 가동률이 70% 수준으로 떨어졌다. 나프타 뿐만이 아니라 에틸렌 수급도 중동발 공급선이 끊어지다시피 하면서 동남권 자동차부품·조선업이 연쇄적 타격을 입는 중이다. 그나마 선제적 물량 확보가 가능했던 대기업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동남권 제조업의 ‘잔뼈’ 역할을 해 온 중소 조선사들은 이대로라면 공장 셧다운을 고려해야 하는 실정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중동 전쟁의 여파는 제조업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부산지역 경제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하고 있는 관광과 유통을 비롯해 수산업까지 휘청거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항공유 급등으로 에어부산이 내달 국제선 3개 노선 운항을 포기하는 등 극도 긴축은 일상이 됐다. 잇따른 여행 취소 등으로 여행업계가 생존 위기에 놓이는가 하면 백화점과 면세점 등 유통업계도 고객 감소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수산업계는 선박가스오일 가격이 최근 100% 넘게 오르자 참치업계를 필두로 원양조업을 포기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에 따라 참치·명태·오징어 등 원양어업 의존도가 높은 어종의 가격 급등에 따른 소비자 물가 인상도 우려된다.
장기화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든 전쟁 양상이 계속된다면 비상 시나리오를 전제로 한 대비책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 특히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최대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동남권 석유화학·조선업 등의 산업군에 대한 지원책을 이제부터라도 고려해야 한다. 지자체도 지역업체의 가동률 조정 등과 연계한 고용안정책 등을 선제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교통비를 비롯한 각종 물가의 상승은 결국 사회 취약층에 더 큰 타격을 가할 가능성이 크므로 이에 대한 지원책도 빠트려선 곤란하다. 단기적으로 유가와 물가의 충격을 잡고 장기적으로 에너지 안보의 재편까지 아우르는 지자체와 정부의 ‘2인3각’ 정책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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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BTS 공연 앞둔 부산도 ‘아미노믹스’ 극대화 고민해야
방탄소년단(BTS)의 21일 서울 광화문 공연은 도시 브랜드 전략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사례다. 도심 한복판 공연을 통해 조선의 궁궐과 현대적 건물이 어우러진 상징적 장면이 연출됐다. 넷플릭스는 4년 만에 완전체가 된 글로벌 아이돌 그룹의 공연을 전 세계 190여 개국에 생중계했고, 이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효과로 이어졌다. 공연을 직관하려 집결한 아미(ARMY·BTS의 팬덤 명칭)의 숙박, 교통, 쇼핑 소비로 인한 ‘아미노믹스’의 위력 또한 입증됐다. 여기서 BTS 다음 공연 도시인 부산이 주목된다. 지역에서도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경제적 파급 효과까지 얻는 전략적 고민이 절실하다.
BTS 복귀 공연은 ‘시티 콘서트’(City Concert) 형식이어서 도시 전체가 무대로 활용됐다. 또 ‘아리랑’ 등 전통 요소를 현대 K팝과 결합한 연출은 서울의 역사성과 문화적 깊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외국인 관광객 증가와 함께 뷰티, 패션, 외식 등 전방위 소비가 확대됐고, 호텔과 숙박시설은 연일 만실을 기록했다. 공연장을 찾은 다국적 아미들은 서울 곳곳을 소비하며 도시 전체에 파급 효과를 남겼다. 관객 집결 규모나 상업적 흥행 수치를 넘어서는 도시 브랜딩 이벤트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콘텐츠와 공간, 소비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이 구조는 도시의 브랜딩과 성장에 있어 하나의 모델로 정립될 필요가 있다.
BTS 월드 투어 부산 공연은 오는 6월 12·13일 열린다. 우선 공연장 안과 도시 사이에 감동이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 광화문 공연장이 '장소성'에 힘입은 것처럼 부산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연장이면 금상첨화다. 바다라는 독보적 자산과 해양문화도시라는 정체성, 국제 행사 경험 등은 서울과 다른 매력을 제공할 수 있는 요소다. 숙박, 교통, 관광, 쇼핑을 유기적으로 묶고, 해운대·광안리 등 해양 공간과 연계한 도시형 콘텐츠를 기획해야 한다. 공연장의 열기가 도심으로 이어지면서 부산을 경험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과제다. 글로벌 아이돌 팬덤이 지역의 매력에서 접점을 찾게 하는 게 중요하다.
광화문 공연이 부산에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같은 BTS 공연인데, 부산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서울은 상징 공간과 콘텐츠를 결합해 도시 자체를 공연장화하는 데 성공했다. 서울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내세워 성공했다면, 부산은 바다와 도시를 결합한 스토리텔링을 어필하는 것으로 차별화할 수밖에 없다. 단순한 관람을 넘어 도시 브랜드, 관광, 상권, 글로벌 노출까지 연결하는 전략이 없다면 같은 공연도 효과는 다르다. 부산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동시에 ‘아미노믹스’를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해양수도 비전으로 차별화되는 유형무형의 부산 자산을 매력 포인트로 잘 엮어내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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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국민의힘, 부산 없이 선거 치르겠단 건가
6·3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부산 정치권에선 국민의힘을 향한 근본적인 의문이 커지고 있다. 선거 승리를 준비하는 정당이라기보다, 패배 이후를 염두에 둔 조직처럼 보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박형준 부산시장 경선 컷오프 논란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정현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은 한차례 사퇴 의사를 밝힌 뒤 당 지도부로부터 공천 관련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선언과 함께 복귀했고, 곧바로 현역 시장 컷오프라는 초강수를 밀어붙였다.
이 장면이 보여준 것은 후보 간 유불리를 떠나 명분과 상식의 붕괴였다. 후보 난립으로 사전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사법 리스크나 중대한 도덕성 논란이 제기된 것도 아니다. 박 시장의 시정 성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산업은행 이전과 부산 글로벌허브 특별법 추진 과정에서 나타나듯 민주당의 반대와 의도적 처리 지연이 그의 시정 구상 실현 동력을 꺾어 놨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전략적으로도 패착이라는 점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현재 판세는 국민의힘 후보들이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에게 밀리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일수록 당내 경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경선은 단순한 후보 선출 절차가 아니라 조직을 재정비하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컨벤션 효과’를 만들어낼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두 후보의 정치적 조건을 고려하면 그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박 시장은 두 차례 시장 선거를 거치며 행정 경험과 선거 검증을 동시에 통과한 인물이다. 반복된 선거 과정에서 여러 논란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고, 중도 확장성 측면에서도 비교적 경쟁력을 인정받아 왔다. 반면 주진우 의원은 초선으로 행정 경험과 대형 선거 경험이 적고 조직 기반 역시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가 따른다. 강성 지지층 결집에는 강점이 있을지 몰라도 행정가로서의 역량이나 외연 확장이라는 과제에서는 아직 검증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경선은 특정 후보를 위한 절차가 아니라 시민들이 후보의 행정 철학과 리더십, 도덕성을 검증할 최소한의 장치다. 동시에 패배 분위기를 반전시킬 마지막 동력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단수 공천을 밀어붙이겠다는 발상은 선거 전략 차원에서도 쉽게 납득되기 어렵다. 공천 방향이 당 전체 선거 전략과 직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이 위원장 개인의 돌출 행동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당 지도부와 일정 수준의 교감이나 공감대 없이 이런 결정을 독자적으로 추진했겠느냐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반면 민주당은 통일교 금품 수수 의혹으로 합동수사본부 수사를 받고 있는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전 의원이 유력 후보라는 점을 앞세워 단일대오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민주당 입장에서 보면 선거 경험과 조직력 등을 고려할 때 본선 상대는 박 시장보다 주 의원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선거 전략과 승리를 향한 절박함이라는 측면에서 국민의힘이 이미 지고 들어간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심각한 생채기만 남긴 채 경선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장동혁 지도부의 노선 문제는 선거 전망을 한층 암울하게 만든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둘러싼 논란에서 분명한 절연 대신 모호한 기조를 유지하고, 극단적 성향 유튜버의 목소리가 내부의 절박한 자성과 쇄신 요구를 무력화하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은 부산 보수의 역사적 정체성과도 거리가 있다. 부산 보수의 뿌리는 권위주의 권력과 결별하며 군부 정치의 잔재를 척결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의힘 지도부와 강성 지지층이 추구하는 ‘윤 어게인’과는 결이 다르다. 이대로라면 부산의 중도층은 물론 합리적 보수 성향의 많은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등을 돌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당 지도부가 선거 승리보다 이후 당내 권력 재편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이는 현장에서 뛰는 후보와 지지자들에게 치명적인 신호가 된다.
TK(대구·경북)가 보수 지지의 중심이라면, PK(부산·경남)는 그 세력을 둘러싸며 변화와 혁신으로 외연을 넓혀온 지반에 가깝다. 이 지반이 무너지면 중심 역시 버틸 수 없다. 부산에서의 균열은 단순한 지역 선거 패배를 넘어서 보수 정치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쇄신은 구호가 아니라 결단에서 시작된다. 부산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국민의힘은 부산과 함께 선거를 치를 것인가, 아니면 부산 없이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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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사람 해칠 개인가?”
반려견에게 물려 다치거나 목숨까지 잃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경남에서 80대 여성이 자신이 기르던 반려견에게 물려 사망한데 이어 올해도 강원도 거주 60대 여성이 대형견에 물려 부상을 입었다. 특히 적법한 허가 등 절차를 밟지 않은 채 맹견을 사육하는 경우가 많아 유사 사고 우려가 상존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맹견은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 또는 다른 동물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는 개를 일컫는다. 동물보호법은 도사견, 핏불테리어, 아메리칸 스태퍼드셔 테리어, 스태퍼드셔 불테리어, 로트와일러 등 5종과 그 품종의 잡종견을 맹견으로 지정했다. 법정 맹견이 아니더라도 공격성이 높을 경우 평가를 거쳐 맹견으로 지정할 수 있다. 법정 맹견들의 경우 사육 허가를 받는 절차가 까다로워졌다. 법정 맹견 품종들은 동물보호법 제18조가 규정한 기질 평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맹견 사고가 끊이지 않자 시민 안전 보장을 위해 2024년 4월 도입된 맹견 사육허가제에 따른 조치의 일환이다. 하지만 당초 지난해 10월 26일까지였던 맹견 사육허가제 시행을 위한 1년간의 계도 기간은 올해 말까지로 연장됐다. 절차가 복잡해 시간이 촉박했던 데다 의무화된 맹견 중성화 수술에 대한 반발은 물론 견주의 경제적 부담도 크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맹견 소유자는 늦어도 올해 안으로 맹견 기질 평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공격성과 통제 가능성 등을 검토하는 맹견 기질 평가는 수의사와 반려동물 행동지도사 등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질 평가위원회에서 실시한다. 위원회는 평가 대상 맹견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 갑자기 발생한 소음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등 다양한 상황에 따라 사람을 해칠 가능성 여부를 분석한다. 맹견이 기질 평가를 통과해야 견주는 사육 허가증을 받을 수 있다.
사후 조치도 엄격하다. 허가 후에도 견주는 매년 3시간 과정의 안전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맹견과 외출할 때는 반드시 입마개를 착용케 하는 등 안전 수칙도 지켜야 한다. 계도 기간 뒤 사육 허가 없이 맹견을 기를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맹견 사육허가제와 맹견 기질 평가는 안전한 반려견 문화 정착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법정 맹견뿐만 아니라 공격성이 높거나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 전력이 있는 ‘맹견 아닌 개’에 대한 기질 평가도 한층 활성화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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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의 그림책방] 특별한 안경
“안경을 쓰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게 보인단다.” 세상에 그렇게 특별한 안경이 진짜 있을까?
핌 판 헤스트가 쓰고 닌케 탈스마가 그린 <안경을 쓰면>(책과콩나무)의 주인공은 의사에게서 안경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속상한 아이에게 안경점 주인은 안경을 쓰면 아주 특별한 것들이 보인다고 말한다. 1주일 뒤 완성된 안경을 쓰니 책상 아래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안경점 주인이 잃어버렸던 결혼반지를 ‘안경 쓴 주인공’이 찾아냈다. 나무 위 비둘기, 저 멀리 가게 간판, 땅을 기어가는 개미까지 예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매일 보던 구름마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니 주인공에게 새 세상이 열린다.
안경을 벗어도 새로운 것이 보인다. 레오 티머스 작가의 <뭐가 보이니?>(그린북)는 머리 위에 안경을 올려두고 깜빡한 곰 이야기다. 안경을 쓰지 않은 곰의 눈에 나무는 ‘사슴’, 풀숲은 ‘악어’, 바위는 ‘코끼리’로 보인다. 친구인 기린이 머리 위 안경을 찾아주자, 곰은 자신이 본 동물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체 악어가 어디 있다는 거야?” 기린의 질문에 곰은 안경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며 안경을 벗는다. 그러니 눈앞에 없는 새로운 동물이 다시 보인다.
안경을 써야 보이는 것이 있고, 안경을 벗어야 보이는 것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알던 세상과 다른 것을 보게 된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은 안경과 비슷하다. 그림책을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펴고,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잊고 있던 가치를 발견한다.
심예진 작가의 그림책 <자란다>(노란상상)에서 여기에 딱 맞는 장면을 찾았다. 어린이가 안경을 쓰고 즐겁게 독서하는 모습(그림)이다. <자란다>는 일상에서 한 뼘씩 자라고 변화하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공동 현관 숫자판에 드디어 손이 닿은 날, 보조 바퀴를 떼고 자전거 타기에 성공한 날,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 먹은 날 등 평범하게 보이는 하루에도 성장의 순간이 있다. 아이와 어른 모두 ‘특별한 안경’ 같은 그림책을 만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 그 소중한 순간을 선물하는 그림책 세상에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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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연안 여객선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고언
어청도, 상왕등도, 횡도, 홍도, 가거도, 여서도, 거문도. 이 섬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23개 영해 기점 중 하나이자, 여객선을 타고 방문할 수 있는 섬이다. 이 중 3곳은 ‘국가보조항로’로 지정되어 정부 소유 선박이 운항한다. 연안 여객 항로의 유지 및 확대가 섬 주민의 교통권 확보뿐만 아니라 해양 관할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도 매우 중요한 과제임을 시사하는 사례다.
2025년 말 기준, 우리나라에는 100개 항로, 149척의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으며 약 1260만 명의 섬 주민과 관광객을 수송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항로 수는 변동이 없으나 여객선은 18척이 감소했고, 수송 실적은 20% 가까이 줄었다. 섬 주민 감소, 연륙교 개통, 해외 관광 수요 증가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의 상황은 어떨까? 작년 54개 연안 여객선사의 전체 매출액은 3767억 원 규모로 선사당 약 70억 원 수준이다. 이는 시외버스 업체당 매출액의 4분의 1 수준이고 국내 항공 운송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이다. 특히, 제주도, 울릉도 등 주요 관광 항로를 운항하는 13개 선사의 매출액 비중이 60%에 가까운 점을 감안할 때 나머지 선사는 40억 원 미만으로서 격차가 더 벌어진다.
지속적인 수요의 감소, 선박 건조비 상승 등 비용 증가가 겹치면서 연안 여객 운송업계의 지속 가능성에 빨간불이 켜져 있는 상태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표본의 한계는 있지만 과반수의 선사가 재무적으로 ‘심각’한 단계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연안 여객선이 섬 주민의 교통 이동권과 직결되는 준공공재적 서비스임을 감안할 때,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정부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형 카페리 여객선을 중심으로 현대화 펀드 사업을 시작하였고, 차도선 등 중소형 여객선에 대한 금융 지원도 강화하고 있다. 항로 단절 방지를 위한 국가보조항로와 소외 도서 항로 운영 지원 사업 등도 병행하고 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도 연안 여객선에 대한 다양한 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적자 항로에 대한 지원은 결을 같이 하지만, 개별 업체에 대한 직접적 보조보다는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직접 운영하거나 공공 법인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스웨덴의 경우, 40개 전 항로를 교통부 산하 ‘국가도로페리청’에서 운영하고 운임 무료 정책 등 교통 복지 차원에서 강력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각 나라의 사정과 관련 산업 생태계가 다르기에 무조건 외국 사례를 따를 필요는 없지만, 이제는 연안 여객 운송업에 대한 정부 정책의 실효성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새로운 방안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마침 이재명 정부는 섬 주민의 교통권 확보와 섬 관광 활성화를 국정과제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관광 항로와 나머지 항로를 다른 시장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 특히 시장 원리 작동이 어려운 국가보조항로 등의 경우에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운영 방식, 즉, 공공 부문의 통합 운영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둘째, 선박, 즉 여객선을 철로, 도로와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으로 보고 공공 부문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 현재의 연안 여객 시장 여건상 어느 항로를 막론하고 막대한 신조선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공공 부문의 ‘선주사’ 개념과도 닿아 있지만, 반드시 병행해야 하는 것이 해당 선박을 운영하는 선사의 항로 운영을 보장하는 보완 장치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는 목적은 선사의 이익 보장이 아니라 도서민의 교통권 보장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장 확대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 정책 발굴이다. 작년 인천광역시에서 시행한 ‘인천 I-바다패스’ 같은 운임 지원 확대는 물론 항로 특성에 맞는 스토리텔링형 관광 자원 개발이 병행되어야 한다. 단기적으로 공공 부문의 재정 부담은 늘어날 수 있지만 무너져 가는 산업 생태계 유지를 통해 장기적으로 재정 부담은 줄어들 수 있다.
현재, 연안 여객선의 공공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다수의 해운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지난 19일 관련 상임위 법안 소위에서 처음 심의가 이루어졌지만 아쉽게도 의결은 다음으로 미루어졌다고 한다. 개정안의 핵심은 국가보조항로의 운영을 민간 위탁에서 공공 위탁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중단 없는 서비스 제공을 위해 조속한 법안 의결을 기대해 본다
오는 4월 16일은 제12회 국민 안전의 날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의 중요성을 되새기기 위해 제정된 법정 기념일이다. 아픔을 딛고 온 국민이 연안 여객선을 안심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첫 출발이 되는 4월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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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내 곁에 있어 줘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꽤 많은 동물을 길렀던 것 같다. 첫 경험은 병아리였다. 아마 내 또래 유년의 공통된 경험일 것이다. 초봄의 하굣길, 학교 앞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서 삐악거리는 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기어코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집으로 왔었다.
병아리가 담긴 종이상자는 따뜻한 아랫목에 자리 잡는다. 경험상 병아리는 무조건 따뜻하게 해주면 되었다. 배추 잎을 연필 칼로 잘게 썰어주고, 파리채로 파리를 잡아줬다. 벌레를 잡아 톡톡 신호를 주면 저만치서 놀다가도 솜털 날개를 파닥이며 달려왔다. 보름쯤 지나면 솜털 끝에 하얀 깃털이 나온다. 이제부터 확연히 달라진다. 화단 흙을 헤집어 지렁이를 잡아내고, 장에 가두려 쫓으면 쏜살같이 도망친다. 병아리는 어느새 벼슬이 늠름한 닭이 되어 있다.
하굣길 문방구에서 뽑기를 하고 돌아온 어느 날, 마당 어디에도 닭이 없음을 알게 된다. 할머니께 닭의 행방을 물으면 대뜸 이런 지청구가 나온다. “꽃이고 이파리고 다 쪼아대서 화초가 남아나길 하나. 온 마당에 똥은 싸놓지.”
그렇다고 저녁 밥상에 닭고기가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할머니는 어느 맘씨 좋은 할아버지께 닭을 줬다고 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다른 집으로 간 닭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토끼도 키웠었다. 털이 부드러워 소위 밍크 토끼라 불리던 렉스 토끼 한 쌍을 삼촌께 얻었다. 나는 틈만 나면 시장에 가서 배추 겉잎이나 자투리 푸성귀를 잔뜩 주워왔다. 토끼 사료도 있었지만, 배추 잎을 입에 물고 아삭아삭 갉아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었다.
추운 겨울밤, 토끼는 새끼를 5마리 낳았고, 나는 다음 날 아침, 차갑게 굳은 5마리 새끼를 발견했다. 털 하나 없는 벌거숭이였다. 아기 손가락 같은 것을 편지봉투에 담아 사철나무 아래에 묻었다. 나는 어미 토끼가 새끼를 밴지도 몰랐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뭔가 예쁘고 귀엽다면 내 곁에 두려는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잉꼬, 십자매 같은 애완조류를 길렀고, 수족관을 마련해 열대어를 길렀다.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돌봄의 노동, 그리고 죽음에 대한 자책이 요구되었지만, 그들과 함께함으로 행복을 느꼈다. 함께하는 기쁨이란 건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먹이를 먹는 모습, 조금씩 자라는 모습, 그리고 새끼를 낳아 생명이 이어지는 광경을 보는 것. 어쩌면 어린 마음이 가장 먼저 접한 생명에 대한 순수한 감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은 책 안의 개념이 아니라, 눈앞에서 숨 쉬고, 자라나며, 어느 날 예고 없이 아파지는 존재였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것은 사실, 바라보고 기다리고 아파하는 행위라는 것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은 사랑한다는 자체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이 얼마나 평화로운지도 안다. 그래서 그저 내 곁에 있어 달라고만 한다.
하지만, 내가 기르던 동물의 죽음은 단지 자연의 이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들의 죽음은 늘 나의 책임과 죄책감을 일깨운다. 설사 내 잘못이 아니었더라도, 애초부터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자유로웠어야 했을 생명을 소유했으니 말이다.
한때, 애완동물이라 불리던 존재가 반려동물이라 불리고, 더 나아가 가족의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이것은 생명을 소유물로 여기던 시대에서 벗어나는 진전일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동물에게 사람의 결핍까지 대신 메워주기를 기대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동물이라는 존재를 인간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그 존재를 그 존재답게 사랑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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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해양력은 곧 국력이다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말이 국민적 구호였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직면한 환경을 돌아보면, 이제 그 구호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해양력은 곧 국력이다.”
정부가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한 결정은 단순한 행정기관 이전이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다시 한 번 스스로를 해양국가로 재정의하려는 선언이며,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국가 전략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부산은 대한민국 근대 해양사의 출발점이다. 부산포라는 작은 어촌에서 시작한 부산은 1876년 개항 이후 일본과의 교역은 물론,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핵심 관문 역할을 수행해 왔다. 바다를 통해 문물이 들어오고, 기술과 인력이 오갔으며, 새로운 세계 질서가 부산을 통해 유입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부산을 단순한 항구 도시가 아닌 ‘해양 교류의 플랫폼 도시’로 성장시켰다. 오늘날 부산항이 세계적인 환적항으로 기능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축적된 해양 경험과 지리적 이점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의 해양적 가치는 전쟁의 위기 속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존속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부산항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군 병력과 군수 물자, 식량과 장비는 바다를 통해 부산으로 들어왔고, 부산은 이를 전선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해상 교통로 (Sea Line of Communication), 즉 국가의 생명선 역할을 수행했다. 만약 부산항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경험은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해양 통제력과 항만 운영 능력은 전시뿐 아니라 평시에도 국가 생존의 핵심 요소라는 점이다.
부산이 해양력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결코 최근의 일이 아니다. 약 17년여 전, 해군작전사령부가 진해에서 부산으로 이전할 당시에도 핵심 배경은 분명했다. 해양작전의 중심은 항만·물류·연합작전 환경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현재 부산에는 대한민국 해군작전사령부뿐만 아니라, ‘주한미해군사령부(CNFK)’가 함께 위치해 있다. 이는 부산이 단순한 국내 해양 거점이 아니라, 한미 연합 해양안보의 핵심 노드임을 의미한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은 이러한 군사·안보·산업 인프라와의 결합을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조치라 할 수 있다.
이제 시선은 미래로 향해야 한다. 기후 변화와 글로벌 물류 재편 속에서 북극항로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해상 실크로드로서 북극항로는 해운, 조선, 에너지, 안보 전반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부산은 이 변화에 가장 먼저 대응할 수 있는 도시다. 세계적 항만 인프라, 조선·해양산업 기반, 해군과 연합 해군의 존재, 그리고 해양수산부 이전이라는 정책적 결단까지 갖추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명확한 국가 해양 전략과 인재 양성, 그리고 해양력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컨트롤타워의 실질적 기능 강화다.
부산의 해양사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자산이며 미래의 가능성이다. 개항의 기억, 전쟁의 교훈, 해군 전략의 축적, 그리고 북극항로라는 미래 비전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를 ‘해양력의 시간 항로’라 부르고 싶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은 그 항로 위에 놓인 중요한 이정표다. 이제 부산은 질문받고 있다. 우리는 해양수도를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이전을 받아들였을 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대한민국 해양력의 미래이자, 국력의 방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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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트렌드를 읽고 취향을 입다, ‘나다운 옷’의 시대
‘오늘 무엇을 입을까’라는 질문은 매일 아침 마주하는 작지만 설레는 선택이다. 하루의 옷차림을 정하는 행위는 단순히 몸을 보호하는 단계를 넘어 타인에게 건네는 첫인사이자, 스스로를 정의하는 기분 좋은 의식이다. 이처럼 패션은 개인의 가치관을 투영하며 일상을 완성하는 가장 가까운 매개체가 된다. 옷은 나를 표현하는 솔직한 언어이자 그날의 기분과 일상의 활력을 결정짓는 가장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패션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거리의 풍경을 보면 그 시대가 지향하는 가치와 대중의 심리가 고스란히 읽힌다. 최근 패션 시장은 급변하고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소비자들의 반응이다. 과거에는 유행을 따르는 것이 보편적인 선택지로 여겨졌으나, 지금의 소비자들은 획일화된 유행만을 좇지 않는다. 지난 겨울, 보온성을 우선시한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을 벗어나 각자의 체형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퍼스널 패딩’이 인기를 끈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는 옷을 비롯해 사용하는 물건 하나하나 ‘나의 취향’이라는 필터를 거쳐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올봄 패션계에 등장한 다채로운 스타일들 또한 트렌드보다 개인의 감각이 우선시되는 ‘취향의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준다. 시인처럼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의 ‘포앳코어(Poet-core)’부터 선명한 색감의 대비로 활력 넘치는 ‘컬러 블로킹(Color-blocking)’까지 상반된 트렌드가 동시에 사랑받는 중이다. 유행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 본인의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소비자들에게 트렌드는 참고용 데이터이고, 마지막 선택을 내리는 결정값은 ‘나의 취향’에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디지털 공간이 있다. SNS나 유튜브를 통해 각자의 스타일을 공유하며 취향은 더욱 세밀해졌고, 소비자들은 ‘내 취향에 맞는 옷’을 찾기 위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적극적으로 탐색한다. 이는 패션 소비의 기준이 ‘나’를 중심으로 재정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브랜드가 제안하는 답안을 거부하고 스스로 스타일의 주인공이 된 소비자들은 옷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성껏 큐레이션하고 있다.
여성복 브랜드 ‘올리비아로렌’ 역시 이 같은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해 왔다. 기존 시즌별 컬렉션과 함께 ‘온라인 익스클루시브’ 라인을 론칭해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필자가 직접 유튜브를 통해 소통하며 고객의 목소리를 브랜드 방향성에 녹여내고 있다. 올해 봄 컬렉션 ‘Time to Bloom(타임 투 블룸)’과 캠페인 메시지 “당신만의 분위기를 입으세요”에도 이런 고민을 담았다. 단순히 브랜드가 제안하는 신제품을 입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옷이 내 고유한 분위기와 만났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나다움’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나다움’의 기준은 이제 패션을 넘어 삶 전반으로 확장되는 추세다. 필자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지난 2024년 말 ‘OVLR’이라는 신설 법인으로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OVLR은 올리비아로렌을 필두로 여성의 일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라이프스타일 파트너로 나아가고자 한다. 패션부터 일상을 채우는 모든 선택에 취향이 투영될 때 비로소 ‘나다운 삶’이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3월은 새로운 시작을 설계하는 시기다. 가벼운 아우터 하나가 일상의 온도를 바꾸듯, 이맘때야말로 ‘나만의 스타일’을 발견하기 가장 좋은 때다. 우리는 고객들이 올리비아로렌을 통해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내면이 먼저 만족하는 ‘취향의 옷’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기업에게 트렌드를 읽는 것이 생존의 문제라면, 유행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브랜드 본연의 가치와 고객 취향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다. 유행이 지나간 자리에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결국 견고한 취향이다. 올봄, 모든 여성이 나만의 확신과 취향으로 일상을 채워가며 저마다의 삶 속에서 가장 눈부신 순간을 맞이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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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와 글로벌 부산의 만남은 필연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BTS가 완전체로 돌아왔다. 드디어 21일 오후 8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방탄소년단(BTS) 더 컴백 라이브: 아리랑’의 막이 오른다. 공연명은 20일 공개한 정규 5집 앨범 ‘아리랑’에서 따왔다. BTS는 K팝을 글로벌 주류로 이끈 월드 스타다. 3년 9개월 만에 일곱 멤버가 완전체로 귀환해 공연을 선보이는 것은 현대 팝 음악의 역사적 장면이다. 전석 무료인 공연 객석은 2만 2000여 석이지만 광화문 일대에는 전 세계 BTS 팬인 ‘아미’(ARMY)를 비롯해 최대 26만 명이 운집할 것으로 예상된다. 넷플릭스는 이날 공연을 190개국에 단독 생중계한다. 넷플릭스가 특정 가수의 단독 콘서트를 단독 중계하는 것은 처음이다.
■ 광화문과 K컬처가 만드는 서사
BTS는 21일 공연 당일 경복궁 내부 근정문에서 출발해 흥례문을 거쳐 광화문을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어 해태(해치)상이 자리한 월대를 지나 길 건너편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무대로 향할 전망이다. 월대는 조선 시대 국가 중요 행사가 있을 때 왕과 백성이 소통했던 장소다. ‘근정문→흥례문→광화문→월대’로 이어지는 길은 ‘왕의 길’로도 불렸다. 1866년 만들어진 광화문 월대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전차 선로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사라졌다가 2023년 광화문 현판과 함께 복원됐다. 스탠딩석과 지정석은 세종대왕 동상, 이순신 장군 동상 등이 있는 무대 남쪽 방향에 설치되며 시청역 인근까지 늘어선다.
이번에 주목할 부분은 ‘광화문’이라는 공연의 장소성이다. 600년 역사를 품은 경복궁과 현대적인 빌딩 숲이 공존하는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아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왕의 길’을 따라 무대에 오르는 퍼포먼스는 한국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전통 건축의 미를 자연스럽게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드러낼 것이다. 600년 조선 왕조의 서사와 21세기 대중문화의 서사가 하나로 결합하며 더 묵직한 임팩트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연은 문화 혼종성의 관점에서도 주목받는다. 서양 팝 음악에 뿌리를 둔 K팝과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광화문, 경복궁이라는 전통 공간의 조합이 독특한 문화적 긴장과 새로운 예술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문화 요소의 충돌과 융합은 고품격 콘텐츠를 창출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BTS는 과거에도 한복을 재해석한 무대 의상, 전통 부채춤을 현대 안무에 접목한 퍼포먼스 등을 통해 전통과 현대의 결합을 정체성으로 삼아왔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열풍으로 북촌한옥마을, 낙산공원 등은 이미 외국 관광객들 사이에서 성지순례 코스로 자리잡았다. 애니메이션 한 편이 서울을 거대한 K컬처 체험 공간으로 바꿔 놓은 셈이다. 이번 공연을 통해 광화문이 K팝의 글로벌 랜드마크로 부상할 것이란 기대감도 나온다. 마치 영국 런던 북부의 ‘애비로드’처럼 말이다. 이곳은 비틀스라는 이름과 함께 전 세계 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장소다. 1969년 자신들의 마지막 앨범을 녹음한 비틀스는 스튜디오 바로 앞 애비로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진을 앨범 커버 이미지로 사용했다. 이 앨범의 재킷 사진은 수많은 영화와 문화 콘텐츠의 오마주 대상이 됐으며, 팝 역사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2010년 영국의 중요 문화재로도 지정된 애비로드는 문화적 의미까지 부각되면서 런던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됐다. 이로 인해 애비로드는 전 세계 음악 팬이 순례하는 성지가 됐다.
■ 공연장 일대 ‘BTS노믹스’
BTS는 오는 2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컴백쇼를 연 뒤 4월부터 월드 투어에 돌입한다. 4월 9~12일 고양종합운동장 공연, 6월 12~13일 부산 공연을 포함해 일본 도쿄,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 전 세계 34개 도시에서 82회에 걸쳐 투어를 진행한다. 콘서트 개최지마다 경제 활성화 효과를 낳는 이른바 ‘BTS노믹스’(BTS+이코노믹스)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2022년 BTS의 국내 콘서트 1회당 창출되는 경제적 파급 효과가 최대 1조 2207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콘서트 티켓 판매액, 외래 관광객의 관광 소비 지출, 교통비, 숙박비 등을 종합해 경제적 효과를 산출했다.
이번 BTS 컴백은 미국 인기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테일러노믹스’에 견줄만한 수준이란 평가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공연과 음반, 마케팅 등으로 수조 원의 경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BTS에 팬덤 아미가 있다면 스위프트에게는 팬덤 ‘스위프티’가 있다. 이들은 스위프트 공연이 열리는 곳마다 찾아가고 이를 위한 호텔 숙박과 굿즈(기획 상품) 구매 등을 아끼지 않는다. 아미는 스위프티와 충성도, 연령층, 소비 의향 등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다른 국가에서 열리는 콘서트에도 기꺼이 참석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는 점에서 아미의 열정과 헌신의 정도가 스위프티보다 더 높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울은 이미 ‘BTS노믹스’로 들썩이고 있다. 공연 당일 서울 도심 호텔은 객실이 동나고 백화점, 면세점은 외국인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광화문 대형 전광판은 기업뿐 아니라 BTS 팬클럽인 ‘아미’(ARMY)까지 가세해 광고 특수를 누리고 있다. 다음 달부터 차례로 공연이 열리는 경기 고양, 부산까지 ‘BTS노믹스’ 온기가 이미 퍼지는 중이다.
■ 부산, BTS 성지 생기나
부산은 BTS에 상당한 지분(?)을 가진 도시다. 멤버 7명 중 지민과 정국 2명이 부산 출신이다. 지민은 금정구 회동초등학교와 윤산중학교 출신이다. 정국은 북구 백양초등학교와 백양중학교를 다녔다.
BTS는 2022년 10월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기원 콘서트 ‘BTS 옛 투 컴 인 부산’(Yet To Come in BUSAN)을 개최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부산 연제구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펼쳐진 이 공연 현장에는 5만 명이 몰렸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야외 주차장에 마련된 ‘라이브 플레이’로 1만 명이 공연을 관람했다. 이번 월드 투어의 한국 공연에 부산이 비수도권에선 유일하게 들어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6월 BTS 부산 콘서트를 앞두고 부산 서구 아미동을 BTS 관광 콘텐츠로 개발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팬덤 ‘아미’(ARMY)와 이름이 같은 아미동을 BTS의 ‘성지’로 만들자는 취지다. 김병근 서구의원은 ‘아미(ARMY)가 아미에 오다’ 캠페인 추진을 제안하고 나섰다. 서울이 BTS 복귀에 맞춰 도심 전시 공간과 미디어 파사드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고 있듯이 아미동에 포토 존과 팝업스토어 등을 만들어 관광객들이 아미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멤버 지민은 올 1월 아미동 등 서구 13개 동에 라면 200박스를 기부하며 인연을 맺었다.
과거 멤버들이 방문했던 부산 여행지를 중심으로 한 ‘BTS 순례 코스’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부산진구 부산시민공원에는 멤버 뷔가 산책하며 사진을 촬영한 장소를 중심으로 인증샷 공간이 조성돼 있다. 또 RM이 방문한 부산시립미술관 내 이우환 공간도 주요 코스로 꼽힌다. 이 공간은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이우환이 입지 선정부터 건축 기본 설계와 디자인까지 참여했다. 지민의 부모가 운영하는 부산 남구의 한 카페도 전 세계 아미들의 필수 방문지로 꼽힌다. 해당 카페에는 각국 팬들이 보낸 편지와 선물, 트로피 등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 부산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가 364만 명을 넘었다. ‘글로벌 도시 부산’의 저력을 발휘한 셈이다. 부산시는 올해 5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잡았고 이를 위해 체험형 관광 상품 개발에 본격 나서고 있다. 전 세계에 엄청한 영향력을 지닌 글로벌 아티스트 BTS를 테마로 한 성지 순례 코스를 만든다면 많은 아미들이 찾을 것이다. BTS와 글로벌 부산의 만남은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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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중동 에너지 전쟁 장기화 조짐, 백척간두의 한국 경제
이란 사태가 끝내 에너지 전쟁으로 비화해 세계 질서를 흔들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 지도부를 추가로 제거한 데 이어 사우스파르스 가스전까지 폭격하며 레드라인을 넘어섰고, 이란은 카타르의 라스라판 가스 시설을 타격하며 맞대응에 나섰다. 미국 또한 이란 원유 수출 거점인 하르그섬 점령을 위한 지상군 개입을 예고했다. 에너지 공급망 자체가 전장의 표적이 되면서 시장은 요동치고 있다. 에너지 수급 불안이 커지자 국제 유가의 기준이 되는 브렌트유는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했다. 석유와 가스를 중동에 의존하는 한국이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이다.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닌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엄중한 상황 인식이 급선무다.
중동발 에너지 위기 장기화 조짐에 산업 현장은 초토화되고 있다. 특히 나프타 등 화학 원료는 수입의 60% 이상이 막히면서 재고가 2~3주 수준으로 떨어져 공급 부족과 연쇄 가동 중단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나프타 쇼크’는 플라스틱·섬유·자동차·전자 제품을 비롯해 건설 자재와 타이어 생산 등 전 산업 분야로 파급된다. 원유 수급은 정부가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최우선 공급 다짐과 함께 비축유 방출 등 대책을 세우고 있으나 중동 수입선이 끊기면 4월부터 재고로 버티는 상황은 불가피하다. 석유화학산업의 연쇄 효과로 소비재 생산 마비와 물가 상승 우려까지 겹치면서 일각에서 4월 위기설까지 제기되는 실정이다.
더 큰 문제는 에너지 위기가 국제 질서를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호르무즈 이용국 책임론’을 제기하며 재차 동맹의 참여를 압박했다. 스스로 에너지 안보를 책임지라는 논리다. 반면 이란은 중국 위안화로 결제하는 국가만 안전 통행을 보장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페트로 달러’ 체제의 균열을 시도하고 있다. 또 인도 등은 러시아산 원유 확보에 나서며 독자 노선을 걷는다. 에너지 전쟁을 계기로 세계 질서가 혼돈에 빠지는 양상이다. 한국은 중동 수입 의존 구조와 한미 동맹 체제라는 한계에 선택지가 제한돼 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갈림길에 섰다는 각오로 국익 우선의 대응책을 도출해야 한다.
충격은 이미 금융과 산업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환율은 1500원대로 치솟고 증시는 흔들리고 있다. 고유가와 달러 강세가 겹치면서 물가와 금리를 자극하는 복합 위기 양상이다.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 여지는 좁아지고 스태그플레이션 위험까지 거론된다. 상황은 명확하다. 에너지 문제는 경제 현안의 일부가 아니라 국가 안보 그 자체다. 수입선 다변화와 장기 계약 확대, 전략 비축 체계 재설계, 에너지·산업재 통합 공급망 관리, 재생에너지 전환 가속화가 시급하다. 일시적 유가 상승이라는 안이한 상황 인식은 위험하다. 대응이 늦어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이 백척간두에 섰다는 위기의식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