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헌책방 싹쓸이, 왜?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입력 : 2026-10-03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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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럽, 미국, 일본 등 세계 각국 중고 서점에서 특이한 주문이 부쩍 늘어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매자들이 수백, 수천권의 책을 사들이면서도 가격 흥정 없이 온라인에 표시된 가격을 그대로 지급한다는 것이다. 배송 방식도 특이하다. 특정 물류 거점으로 보낸 뒤 한꺼번에 미국으로 나르는 주문이 많다고 한다. 각국 서점업계에서는 이 정체불명의 구매자들이 AI(인공지능) 기업의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때아닌 중고 책 호황의 큰손으로 AI 기업이 지목된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헌책방의 모습. AP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헌책방의 모습. AP연합뉴스

■ 헌책방에 쏟아지는 대량 주문

지난 7월부터 일본 각지 헌책방에는 온라인 대량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9월 27일 니혼TV의 보도에 따르면 하루 100권이 팔리거나 매출이 평소의 5배로 뛴 헌책방이 많다. 평소 많이 팔리던 소설·만화 대신 철학·역사·의학·법률 전문서가 한꺼번에 팔려나간 곳도 있다. <에도 시대의 장신구> <다이쇼 시대 판례집> 등 사료와 전문서도 포함됐다. 니혼TV는 지난해부터 일본의 한 대형 도서 유통회사 자회사가 미국으로 책 50t 이상을 수출한 기록도 공개했다. 한 권을 대략 500g으로 잡으면 약 10만 권 규모에 달한다.

지난 5월 유럽 아일랜드의 한 중고 서점에도 5000권의 대량 주문이 들어왔다. 기관에서 수천 권씩 책을 살 때는 대개 할인을 요구하지만, 구매자는 온라인에 표시된 가격 그대로 지급했다고 한다. 20여 년 전 아일랜드 정부의 특별저축장려계좌(SSIA)를 설명한 투자 안내서 같은 책도 섞여 있었다. 독일 베를린 중고서점과 고서점에는 수만 유로어치 주문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주문 목록에는 역사서나 전문서뿐 아니라 운전면허 시험 안내서 같은 책도 포함됐다. 각국 헌책방에 주문이 들어온 책에는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과 절판본 서적도 있다. 아직 한국의 헌책방에서는 중고 서적 대량 구매 정황은 포착되지 않았다.


AI 학습을 위한 도서 수집에 뛰어든 정황이 보이는 아마존. 로이터 연합뉴스 AI 학습을 위한 도서 수집에 뛰어든 정황이 보이는 아마존. 로이터 연합뉴스

■ 책 추적했더니 아마존 시설로

지난 7월 미국의 한 중고 책 판매상에게 수상한 주문이 들어왔다. 온라인 중고 책 플랫폼 ‘비블리오’(Biblio)를 통해 한꺼번에 들어온 주문은 약 1000권에 달했다. 책의 분야나 저자도 제각각이었다. 익명으로 책을 사고파는 플랫폼 특성상 판매상은 구매자를 알 수 없었다. 미국 정보기술 매체 ‘404미디어’는 판매상과 함께 주문받은 책 한 권에 애플의 위치추적기 ‘에어태그’를 몰래 넣었다. 미국 곳곳의 물류 거점을 거쳐 책이 도착한 곳은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아마존 물류 시설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현장 직원들은 대량으로 들어온 책의 책등을 잘라 낱장을 스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종이책은 파쇄됐다고 한다. 아마존 측은 “제품·서비스 개발과 개선을 위해 책을 구매한다”고 설명하면서도 구매량과 구체적인 활용처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존이 AI 학습을 위한 도서 수집에 뛰어든 정황이 짙어지고 있다.


실물 책 수백만 권을 사들인 뒤 제본을 뜯어 디지털화하고 원본은 폐기한 사실이 알려진 앤트로픽. 로이터연합뉴스 실물 책 수백만 권을 사들인 뒤 제본을 뜯어 디지털화하고 원본은 폐기한 사실이 알려진 앤트로픽. 로이터연합뉴스

■ 책 파쇄, 저작권법 허점 노린 꼼수

미국 AI 기업 앤트로픽은 2024년 챗봇 클로드 학습을 위해 ‘프로젝트 파나마’라는 이름으로 실물 책 수백만 권을 사들인 뒤 제본을 뜯어 디지털화하고 원본은 폐기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작가들이 제기한 저작권 침해 소송 과정에서 책을 대규모로 구매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앤트로픽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중고책을 포함한 종이책 수백만 권을 샀다. 외주 업체가 책을 해체해 스캔한 뒤 종이 원본을 버렸고, 앤트로픽은 이렇게 모은 자료 중 일부를 AI 학습에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법원은 앤트로픽이 책을 구입해 AI 학습에 이용한 행위를 ‘공정 이용’으로 인정했다. 합법적으로 구매한 종이책을 스캔한 뒤 원본을 폐기하고 사내 디지털 자료실에 보관한 행위도 허용했다. 디지털로 스캔한 뒤 원본을 완전히 파괴하면 이를 무단 복제가 아닌 물리적 책을 디지털로 ‘형식 변환’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는 저작권 침해의 증거가 될 원본을 아예 없애면 로열티를 내지 않고도 합법적으로 AI 학습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반면 법원은 앤트로픽이 수백만 권 해적판 전자책을 내려받아 보관한 행위까지 ‘공정 이용’으로 보지는 않았다. 결국 앤트로픽은 작가·출판사 측과 15억 달러(2조 원) 규모 합의에 나섰고, 미국 법원은 지난 7월 이 합의를 최종으로 승인했다. 미국 저작권 집단소송 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러한 판결을 토대로 AI 기업이 ‘종이책을 사서 디지털화하고 원본을 폐기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미국 법의 허점을 교묘히 노릴 공산이 크다.


국회부산도서관 내부 모습. 부산일보DB 국회부산도서관 내부 모습. 부산일보DB

■ 인류 지혜 독점해선 안 돼

AI 기업이 오래된 종이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학습 데이터의 품질이다. 특히 2022년 11월 챗GPT가 등장하기 전에 판매된 책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든 글이 섞이지 않은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모델 성능이 고도화될수록 학습에 필요한 신뢰도 높은 원문 데이터가 더 많이 필요하다. 학습에 쓰이지 않은 상업 출판물만 아니라 헌책과 희귀본이 ‘원천 데이터’로 몸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오래된 종이책에는 인터넷에서 구하기 힘든 지역사, 전문 지식, 생활 문화, 소수 언어 자료까지 담겨 있다. AI 기업 입장에서는 이미 경쟁사들이 긁어간 인터넷 자료와 겹치지 않는 신선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생성한 AI가 아니라 사람이 직접 쓰고 편집자가 다듬은 2022년 이전의 문장을 담은 책이 희귀 자본이 되었고, AI 개발 회사는 그 가치를 간파한 것이다.

AI 모델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종이책 파쇄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블로그, 뉴스, 위키피디아 등은 AI가 거의 다 학습을 끝낸 상태다. 반면 종이책은 편집자와 출판사의 검증을 거친 고품질 지식이 담겨 있어 AI의 추론력과 문해력을 높일 핵심 자원이다.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AI 빅테크가 희귀본과 절판본까지 쓸어 담으며 지식을 독점하면 일반인과 후발 연구자들은 그 책에 담긴 지식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된다. ‘AI의 분서갱유’로 인해 기술의 발전이 실물 지식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정보 불평등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일이다.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 지성, 지혜를 소수자만 누린다면 너무 불합리하지 않은가.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