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와 벼룩을 통해 전염되는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감염병으로 꼽힌다. 약 7일의 잠복기를 거쳐 가슴 통증, 기침, 각혈, 고열 증상을 보인다. 내출혈로 피부에 검은 반점이 나타나 죽어간다고 해서 중세에 ‘흑사병’으로 불렸다. 14세기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였다. 현대에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러시아 시베리아와 몽골 접경에는 야생 설치류와 벼룩 사이에서 균이 순환하는 지역이 남아 있다. 감염 경로는 형태에 따라 다르다. 가장 흔한 림프절 페스트는 감염된 벼룩에게 물리거나 감염 동물의 조직·체액에 접촉해 걸린다. 반면 폐를 침범한 폐페스트는 비말을 통해 전파가 가능하다. 하지만 오늘날엔 항생제로 페스트를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2020년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역주행하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1947년 출간된 이 소설은 흑사병 확산으로 봉쇄된 알제리의 가상 도시 오랑에서 재앙에 대처하는 다양한 인간이 등장한다. 카뮈는 이를 통해 잔혹한 현실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부조리와 맞서는 것만이 진정한 인간성임을 강조한다. 특히 소설 내용이 당시 코로나 팬데믹 상황과 흡사해 주목받았다. 당국에 신속한 대책을 촉구하는 소설 속 주인공 의사 리외의 모습은 코로나19의 진실을 폭로했던 중국 우한의 의사 리원량을 떠올리게 했다. 또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소설 속 자원봉사대는 코로나19 확진자 치료를 위해 감염 병원으로 달려간 국내 의료진과 닮아 공감을 자아냈다.
최근 러시아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주의 페스트 방역연구소 소속 직원 1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해당 연구소는 페스트를 포함한 고위험 병원체의 연구, 진단, 방역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일각에서 이 직원이 폐렴형 페스트 병원체가 든 시험관을 실수로 깨뜨린 뒤 건강이 악화해 사망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WHO(세계보건기구)는 10일(현지시간)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사망한 직원에게서 페스트 감염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또 병원성 미생물을 취급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 사실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사망자와 접촉한 사람들로부터 추가 중증 폐렴 사례도 아직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폐렴 발병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은 찜찜하다. 러시아가 좀 더 투명하게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의혹과 불신이 자칫 공포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