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인공지능(AI)의 성능을 고도화하고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려면 방대한 양의 고품질 학습 자료가 필요하다. AI 기업들이 생성형 AI를 학습시킬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I 기업이 별도의 계약 없이 대규모로 수집한 책과 전자책을 대규모 언어모델(LLM) 학습에 활용하면서 저작권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AI 기업이 책 한 권 값만 내고 구매한 저작물이나 불법 유통 중인 출판물을 확보한 뒤 AI 학습에 활용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책을 무단 복제하거나 인터넷에 불법 유통하는 행위가 저작권 침해의 핵심이었지만 AI의 등장 이후 저작권 분쟁의 양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국내 문학 작품들까지 AI 회사에 무단으로 확보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AI 학습에 사용한 출판물의 저작권을 둘러싼 문제가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업 앤트로픽의 로고. 앤트로픽은 집단소송에서 약 48만 권의 합의 대상 저작물과 관련해 총 15억 달러(약 2조 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 한국 작가 도서의 불법 복제본 다운로드
미국 AI 기업 앤트로픽은 AI 학습을 위해 온라인 해적판 도서 사이트에서 700만 권 이상의 디지털 복제본을 다운로드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이 논란은 결국 집단소송으로 비화됐다. 이후 앤트로픽은 약 48만 권의 합의 대상 저작물과 관련해 총 15억 달러(약 2조 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고, 미국 법원은 올해 7월 이 합의를 최종 승인했다.
그런데 앤트로픽 소송 관련 저작권 합의 사이트에 올라온 보상 대상 도서 목록에 한국 작가 책 21종이 등재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앤트로픽이 불법 복제본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김영하 <빛의 제국> 외 3종, 김숨 <한 명>,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외 2종, 한강 <소년이 온다> 외 2종, 황선미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석영 <손님> 등이다. 앤트로픽이 국내 작가들의 영문판 도서 등을 무단으로 확보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들 작품의 AI 학습 활용 여부와 저작권 침해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최근 해당 작가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통보한 데 이어 저작권 유관기관 등과 협력해 작가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앤트로픽 저작권 소송과 관련해 합의 대상 도서 목록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 등 한국 작가들의 책 21종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2024년 서점에서 고객들이 한강 작가의 책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한글 도서 대량 구매 움직임도 포착
국내 유명 작가뿐만 아니라 각종 한글 도서를 대량으로 구매하려는 의심스러운 움직임도 잇따라 포착되고 있다. 교보문고에는 올해 초부터 미국과 영국 등 해외 업체들로부터 도서 종류별로 한 권씩 대량 구매하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교보문고는 AI 학습에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납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른 온라인 서점에도 이와 유사한 문의가 있었지만 실제 구매로는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다른 곳에도 이런 구매 요청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더욱이 국내 도서가 해외 AI 기업의 학습자료로 얼마나 확보됐는지조차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와 관련, 국내 출판업계의 대응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AI 학습용으로 사용할 것으로 의심되는 대량 구매 주문 현황 등을 파악하기 위해 각 서점과 유통사, 출판사 등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한국출판인회의도 최근 AI 학습에 이용한 출판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지난 15일 시작된 연명 운동에는 이미 출판사와 관련 기관 등 단체와 작가, 번역가, 출판 관계자 등의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내 저작권자들이 자신의 책이 어떤 경로로 AI 기업에 확보됐으며, 실제 학습자료로 이용됐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피해 사례가 확인된다고 해도 거대 AI 기업에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고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AI 기업들이 정당한 대가 없이 각종 저작물을 인공지능 학습 자료로 활용할 경우 출판과 저술 환경을 위축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사진은 부산의 한 서점에서 어린이가 책을 고르고 있는 모습. 부산일보DB
■ 관련 제도 보완 서둘러야
일반적으로 책 한 권의 판매 가격에는 책을 소유하고 읽을 권리가 반영돼 있다. 하지만 해당 책의 내용을 상업용 AI 모델의 학습 자료로 이용할 권리까지 당연히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 기업이 책을 대량 구매한 뒤 이를 스캔해 학습자료로 전환할 경우 저작권자에게 추가 사용료를 지급해야 하는가 여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다. AI 발전 속도가 워낙 빨라 제도가 이를 뒤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현재까지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나라는 없다. 각국은 법률과 저작권 제한 규정에 따라 이 문제를 다르게 해석한다. 하지만 유럽연합의 경우 AI 기술을 발전시키고, 저작권자의 권리도 명확히 보호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지난 3월 결의를 통해 AI 기업에 대해 저작권 보호와 정당한 보상, 학습 자료 투명성 강화를 촉구했다. 독일 출판업계는 지난 6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계기로 AI 학습에 대한 저작권 보호 강화를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법적 장치가 미비해 AI 학습에 따른 저작권 침해 사례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 AI 기업이 시중에서 판매하는 책을 구입해 스캔한 경우 합법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반면 저작권자의 별도 허락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학습이 위법이라고도 판단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 등은 현재 AI 학습 관련 보상 체계를 마련하고 입법화를 서두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관련 법 제도를 정비해 보상금의 산정과 징수 등에 적용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AI 기업들이 현재처럼 적절한 보상을 지불하지 않고 저작물을 AI 학습에 무단 사용할 경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동기와 환경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즉, 지식 생산 기반인 출판과 저술 환경이 위축되면 장기적으로 AI 발전에도 불리하다는 것이다. 한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하려 한다면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AI 모델 개발에 대한 투자뿐 아니라 작가와 연구자, 출판사 등 지식 생산 그룹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AI 시대, 국내 출판계와 작가들의 저작권이 훼손되지 않도록 정부와 정치권의 발 빠른 대응을 촉구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