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에서 63억 달러(약 8조 4000억 원) 상당의 자산이 탈취됐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북한의 소행으로 지목했다. 바이낸스는 엔지니어의 노트북이 해킹됐을 가능성을 언급했고, 다른 곳에서도 침입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돈을 움직이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돈을 지키는 장치도 더 정교해져야 한다.
사이버보안은 인공지능(AI)이 사람을 대신해 상품을 고르고 결제하는 ‘AI 에이전트 경제’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구글과 비자도 이를 위한 기술과 결제 체계를 공개했다. AI에 결제까지 맡긴다는 것은 돈을 쓸 권한도 내준다는 뜻이다. 회사에서 거래처에 물품 대금을 보내는 일을 AI에게 맡겼다고 해보자. ‘입금 계좌가 바뀌었다’는 사칭 메일을 믿은 AI가 송금했다면, 금액과 지급일을 맞췄어도 돈은 사기범에게 간다. 확인되지 않은 메일 한 통으로 회사가 승인한 지급 조건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아시아 금융허브를 꿈꾸는 부산의 기회도 AI 시대의 금융보안에 있다. 금융기관과 자본이 모이려면 안심하고 거래할 기반이 있어야 한다. 사이버보안은 그 신뢰를 뒷받침하는 핵심 인프라다. 문현금융단지의 금융기관이 안고 있는 보안 문제를 부산 기업이 풀어낸다면, 금융서비스의 신뢰와 부산 기업의 경쟁력을 함께 높일 수 있다.
부산이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지 7년이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23~2025년 부산 블록체인 특구의 신규 실증 사업은 0건이었다. 이제는 그동안 쌓은 실증 경험을 바탕으로 AI 금융서비스의 사이버보안을 강화할 새 과제를 발굴해야 한다. 사용자가 승인한 내용과 실제 거래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기술부터 시험해 볼 수 있다. 블록체인은 그 지시와 승인 기록을 함부로 고치기 어렵게 남겨, 사고의 경위를 확인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이런 과제를 정할 때는 금융기관이 실제로 겪는 어려움부터 살펴야 한다. 여러 기관이 공통으로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라면 다른 금융기관에도 판매할 수 있다. 개발 초기부터 금융기관과 기업이 무엇을 고칠지, 효과는 어떻게 평가할지 함께 정해야 한다. 기술을 만든 뒤 고객을 찾기보다 누가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부터 살피자는 것이다. 부산시는 도입 계획이 구체적인 과제부터 지원하고, 필요한 규제 특례는 정부와 협의해야 한다.
검증할 때는 실제 이용자의 입장도 살펴야 한다. 자산을 안전하게 지키면서도 정상적인 거래는 불편 없이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사고가 나면 신속하게 대응해 피해를 줄일 수 있어야 한다. 부산시가 지원하는 금융보안 기술은 전문가의 성능 검증과 금융기관의 현장 평가를 함께 받아야 한다.
이렇게 검증한 AI 금융보안 기술은 금융기관의 구매와 도입으로 이어져야 한다. 실증에 참여한 기업에는 개발과 검증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지급하고, 부산에서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국내외 고객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지원이 시제품 제작에서 끝나면 기업은 기술을 개선하고 인력을 계속 고용할 기반을 갖추기 어렵다. 특구의 성적표에도 실제 도입 실적과 매출, 부산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일자리를 담아야 한다.
AI와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가 확대될수록 이를 안전하게 설계하고 운영할 사이버보안 전문인력의 역할도 커진다. 부산이 이 분야를 청년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전략산업으로 키워야 하는 이유다.
이를 뒷받침할 연구와 교육의 거점도 생겼다. 지난달 13일 부산국제금융센터에 ‘부산 블록체인·AI 디지털금융 혁신 연구센터’가 문을 열었다. 부산대 연구 인력이 상주하는 이곳에서는 내년 2월부터 융합보안대학원 석박사 과정도 운영될 예정이다. 부산대의 융합보안 핵심인재 양성사업에는 2031년까지 국비와 시비를 합쳐 60억 5000만 원이 투입된다.
이 연구센터를 중심으로 부산시·대학·기업·금융기관이 ‘AI 금융서비스의 보안 취약점 점검과 개선’을 공동 과제로 추진하자. 부산시는 실증 비용과 시험 환경을 지원하고, 대학 연구진과 학생은 부산 기업과 함께 해법을 개발한다. 금융기관은 현장에서 효과를 확인하고 도입 여부를 판단한다. 연구에 참여한 학생들이 부산 기업에서 실무를 배우고 취업할 수 있도록 현장 교육과 채용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
금융도시의 신뢰는 위험을 미리 찾아 막고, 사고가 나면 책임 있게 수습하는 데서 나온다. AI가 거래를 대신해도 이 원칙은 달라지지 않는다. 세계가 믿고 쓰는 사이버보안 기술을 부산에서 만들어낼 때다. 부산 기업이 그 기술로 성장하고, 부산에서 나고 자라고 배운 청년이 부산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금융허브라는 부산의 꿈도 그때 시민의 삶을 바꾸는 현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