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을 역사읽기] <5> 고대 아테네 여성들

입력 : 2017-01-12 02: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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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꽃피는 시기 여성의 지위 노예나 같아

고대 아테네 여성들은 집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사회적으로도 여성의 열등성을 강조하는 주장과 이론들이 난무했다(기원전 5세기 화병에 그려진 아테네 여성들의 모습).

"우리에게는 영혼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여자친구들이 있으며 육체적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처녀들이,우리의 혈통을 잇고 집을 지켜주기 위해서 주부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가 남긴 이 말은 당시 여성의 지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영어"데모크라시"가 그리스어인 데모크라티아(인민의 지배)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고대 그리스,그 중 아테네는 기원전부터 일찌기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8세기 귀족이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행정관 솔론의 정치개혁과 다시 페이시스트라투스의 독재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친 뒤 기원전 510년 "민주정치의 아버지"클레이시테네스에 의해 민주주의가 완성된다.

클레이시테네스는 아테네에 사는 모든 자유민에게 권리를 부여해 시민의 인구를 확대시키는가 하면 30세 이상의 모든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보통 사람의 정치적 능력을 신뢰하고 다수결 원칙을 철저히 신봉하고 지켰다는 점에서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크게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아테네의 "시민"은 "양친이 모두 아테네 태생인 성년남자"를 뜻했다.여성은 시민이 아니었으며 그 지위가 노예나 외국인에 비해 나을 바가 없었다.

여성들은 가정에 갇혀 도시국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관여할 수 없었고 법률상으로는 결혼전에는 아버지에게,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예속돼 있었다.

데모스테네스의 말처럼 당시에 이미 매매춘 여성과 "헤타에라에"라고 불리는 이오니아 도시 태생의 외국인 여성들이 있었고 남성들은 교양있는 헤타에라에들을 사회적.지적 동반자로 대우했다.

이 시대 뛰어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관은 남성이 철학과 학문분야를 독점할 때 그 관점이 얼마나 형편 없는 지를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체내의 불충분한 열기 때문에 여성의 성기는 바깥으로 돌출되지 못한 채 체내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며 그 결과 여성은 불완전하고 차갑고 습한 육체를 가지게 됐다"는 비과학적인 주장을 내세웠다.그는 심지어 여성의 치아가 남성보다 적다면서까지 여성의 불완전성을 강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같은 여성관은 그의 뛰어난 철학적 업적과 함께 중세에 이어지면서 중세의 지배적인 여성관으로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사적으로는 상당히 유감스런 철학자가 되었다.

교양철학서 "소피의 세계"저자 요슈타인 가아더는 "성서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지향하면서도 중세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릇된 여성관을 이어받았다"고 지적했다.

김진경기자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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