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부산사람] ⑪ 주기철 (1897~1944)

입력 : 2003-07-02 00:00:00 수정 : 2009-02-17 02: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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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뿌려진'시대정신의 밀알'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요체인 십계명에 따라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지만,올곧은 소신과 꿋꿋한 실천으로 훗날 큰 평가를 받는 이다.

주기철은 1897년 경남 창원군 웅천면(지금의 진해시 웅천1동)에서 아버지 주현성과 어머니 조재선(재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이름은 주기복이었다. 그의 고향 웅천(熊川)은 우리말로 곰내지만,옛 이름은 웅신(熊神)이다. 웅천은 토속신앙이나 원시종교가 성행한 고장이었으며,주자영당(朱子影堂)에 올리는 마을공동제가 유명하였다. 그의 집안은 신안주씨로 중국 송나라의 주자를 시조로 한다. 전남 능주(화순군 능주면)에 살던 주덕호가 1618년 웅천으로 이주했는데 주씨는 웅천에서 서씨(徐氏) 유씨(劉氏)와 함께 대표적인 성씨로 집성촌을 이루었다.

소년 주기복은 처음 서당에 다니다 1906년 주기효가 천도교 사상을 교육하기 위해서 세운 사립 개통(開通)소학교에 사촌 주기용과 함께 다녔다. 주기용은 뒷날 오산학교에도 함께 진학하여 남강 이승훈의 사위가 된 이다. 일본의 조선합병이 구체화되자 전국에서 토론방식의 윤강회가 열렸는데 개통학교의 어린 주기철은 돋보이는 연사로 활약했다. 이 무렵 주기철의 가문은 큰형 주기원을 필두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소년 주기복도 1910년부터 웅천읍교회에 나가면서 이름을 주기철로 바꿨다. 1913년 민족운동가 남강 이승훈이 세운 평안남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했는데 경남 출신의 첫 유학생이었다.

1915년에는 오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오산학교 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학교로 돌아온 이승훈이었다. 선생으로 이광수 등도 있었지만 신앙적으로는 유영모,학문적으로는 조만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 예로 주기철이 일생동안 평소 양복을 입지 않고 한복 차림을 한 것은 조만식이 물산장려운동 때 양복을 벗어버린 데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16년 오산학교를 7회로 졸업하고 민족을 일으키려면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이승훈의 권유를 받아들여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안질로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그에게는 큰 시련의 시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형 주기원이 사업에 실패하여 전답까지 처분했다. 형제 간의 재산싸움으로 안질이 악화되어 이때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색안경을 끼게 된다. '윌슨독트린' 발표 이후 신민회의 간부 오상근을 따라 청년운동을 시작하여 웅촌청년운동단을 조직하여 명륜당에서 시국강연과 토론회를 열었다.

점차 웅천에도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집안에서는 장가를 보냈는데 1917년 서울 정신여학교를 나온 김해의 부잣집 딸 안갑수와 결혼했다. 1919년 4월 3일,웅천의 성내리 만세운동 때 주기철은 행동책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돌리다 구류를 살았다. 3·1운동 이후 주씨 집안은 신앙적으로 큰 시련을 맞는다. 전처의 아들들이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주기철은 1920년 9월 마산 문창교회 사경회에 참석하여 병을 낫게 하는 신유 은사로 유명했던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설교에 감동받는다. 이후 김익두 목사의 웅천읍교회 사경회에서 더욱 깊은 감화를 받고 신학교 진학을 결심한다. 여기에는 독실하게 불교를 믿다 나중에 교회도 철저하게 다닌 장모 이분옥의 추천도 작용하였다.

1921년 경남노회의 12회 목사 후보생 시취에 합격한 후 머리를 짧게 깎아 결의를 다지고 1922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4년 만에 졸업하면서 목사가 되었다. 그의 진정한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방학이 되면 고향에 내려왔는데 겨울부터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로 청년들을 계몽했다. 이승훈은 일본 유학을 한 뒤 오산학교를 맡아 교육계의 지도가가 되도록 권유했으나 구령(救靈)사업에 헌신하겠다고 거절했다.

1926년 만 28세의 젊은 나이로 부산의 5대 교회이자 부산 최초로 설립된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에 파격적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이후 교회 임원들의 유임시켜 교회의 안정을 취했다. 이후 권찰제도 도입,주일학교 개편,장례제도 창설 등의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또 교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아동성경학교를 개최하였다. 이때 개인적으로 아들과 딸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1929년에 벌써 주기철은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안을 제출하여 대일본 제국에 도전장을 내었다. 모두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여겼다. 당시 일제는 교회를 민족의 최후 보루로 보고,신사참배로 골격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경남노회에서는 주기철의 주도로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 교리 상 죄가 된다는 것을 역설하여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했다. 이로써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가 처음으로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은 '완미(頑迷)한 양귀(洋鬼),끝끝내 신사참배거부'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때부터 주기철 목사는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부상하였으며 이것이 초량교회를 떠나 마산의 문창교회로 가게 되는 이유가 된다.

1931년 7월에 쑥대밭이 되어 있던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 목사로 부각되었다. 이곳에서는 신앙집중 훈련에 몰두하였다. 특히 교회직영의 창신학교 운영,정식 연보제(십일조) 채용,교회역사 편찬,노회장으로서 반교권적 운동인 신진리파 척결 등의 굵직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1933년 부인이 34세로 죽는 개인적인 아픔도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부인의 묘소를 찾아 기도하면서 순교의 싹을 키웠다.

1935년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오정모 집사와 재혼했으며 12월 평양신학교 학생 부흥회에 초빙되어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설교를 하였다. 1936년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였다. 이 교회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장로로 있었다. 그는 먼저 낡은 교회당 건축에 착수하였는데 1938년 2월 헌당예배 직전에 신학생 장홍련이,신사참배를 통과시킨 김일선 노회장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은 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 당시 일본기독교회 의장 도미다(富田滿) 목사의 신사참배 계몽강연 때 주기철은 새벽까지 반론을 제기했다.

1938년 유재기 목사가 경북 의성에 있을 때 기독교청년면려회 창립총회에서 한 설교 때문에 의성의 농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9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산정현교회에서 유언 설교가 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최후로 교인들에게 전하였다. 이 설교사건으로 28회 전국 기독교 총회 전에 3차 옥고를 치렀다. 12월 평양노회는 임시노회를 열어 노회의 결의 형식으로 주기철을 산정현교회 목사직에서 파면시켰으며 산정현교회도 폐쇄했다. 가석방된 후 6월에 교회복구문제에 관여한다는 혐의로 5번째 구속되었다. 1944년 4월 몸이 쇠약해져 병감(病監)으로 옮겨졌으나 병사했다.

주기철은 일제강점기의 주목받는 기독교 목사로서 일제의 갖은 회유에도 소신과 신앙을 꿋꿋이 지켜낸 실천적 종교인이자 민족운동가로 널리 평가된다. 주기철은 양적인 성장에 치우쳐 온 근현대 한국기독교사에서 질적 성장의 한 모범으로 기억될 것이다. 김강식·울산대 연구교수






















































1897년

경남 창원군 웅천면(진해시 웅천1동)에서 출생

1906년 

사립 개통소학교 입학

1910년

웅천읍교회에 나가면서 주기철로 개명

1912년

평안남도 정주의 오산학교 입학

1916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상과 진학

1917년 

서울 정신여학교 출신의 안갑수와 결혼

1922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입학

1926년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첫 부임

1929년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반대안 첫 제출

1931년 

마산 문창교회 부임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

1939년 

경북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 연루

1944년 

감옥에서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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