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 즐거워!]아도르노 '미학이론'

입력 : 2008-03-01 09:00:00 수정 : 2009-01-11 14: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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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물질·문명사회의 유일한 희망'

신채호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건 야만이다."

T. 아도르노(1903~1969)의 이 발언만큼 그의 예술관을 잘 요약한 말이 있을까. 그러나 자주 회자되는 만큼 진의(眞意) 또한 제대로 음미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20세기 현대 (서구)문명사회는 '문명'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처참한 현실을 목도했다. 홀로코스트.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왜 이런 일이 버젓이 자행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대참상(大慘狀)을 역사의 일탈이나 우연으로 돌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는 이 참상이 도구(道具)적 측면만을 과도하게 키워온 이성주의 문명의 필연적 결과로 보았다.

만약 도구적 이성이 계속 득세하고, 그 어떤 근본적인 반성의 힘이 발휘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또 다른 홀로코스트는 언제라도 잉태되고 출현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개별자의 고유성이 통계적 평균치나 교환가치라는 추상적 수치로 환원되는 사회, 고도의 합리적 수단으로 비합리적 지배 관계가 지탱되는 '관리되는 사회'인 현대 산업사회에는 이미 홀로코스트의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반성의 힘'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어떤 힘으로 이 그림자를 물리칠 수 있을까? 아도르노는 그의 비판이론의 총결산이자 최후의 저작인 '미학이론'에서 그 힘을 바로 예술에서 찾는다. 예술은 절망에 던져진 인간에게 거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희망일까? 그렇진 않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묶인 예술과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산물들은 그 지반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공히 '관리되는 사회'의 현실에 순응할 뿐이다.

'진정한 예술'만이 희망이다. '진정한 예술'만이 이 '관리되는 사회'에 함몰되지 않고, 그 대척점에서 이 사회의 새로운 야만을 증언하고 대안의 세계를 꿈꾸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예술이 '진정한 예술'의 이름에 어울릴까?

아도르노는 주로 현대 모더니즘 예술을 염두에 두고 있다. 모더니즘 예술은 본성상 현존 사회에 대한 강한 부정과 저항의 정신을 띤다. 그리고 '쉽게 관리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형식실험을 행한다.

바로 이 형식실험 때문에 이들 예술은 종종 난해하거나 낯설다. 조성을 포기하고 불협화음을 내는 음악, 재현을 포기하거나 온갖 추한 형상들을 담은 그림, 의도적으로 무의미를 조장하는 시, 부조리한 연극 등이 그래서 나온다.

이들 예술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소외, 갈등, 불화, 부조리를 더 이상 '이쁘게'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사회의 그 모든 부정성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끔찍한 삶의 조건을 일깨운다. 이제 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거부함으로써 현실에서 상실된 아름다움을 기념한다.

이상이 그의 '미학이론'에 담긴 내용의 골간이다. 내용들 하나하나가 모두 크고 작은 쟁점들을 안고 있다. 다양한 철학적 미학적 관점과 입장의 교차로에서 얼마든지 달리 읽힐 소지가 있고, 오늘의 서구 혹은 우리 상황에 조회해 볼 문제 역시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읽고 조회하든, 우리 시대 고전의 위상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현대 사회와 이 속에서의 예술의 의미를 이만큼 천착한 사례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 더욱 수긍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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