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 호'와 황금 양피
오늘날 유럽 문명의 양대 지주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든다. 유럽의 문명의 기저에 그리스 문명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유럽 문명이 해양활동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암시한다. 왜냐면 그리스 문명은 해양문명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15세기 중엽 미케네가 선문명인 미노아 문명을 몰락시키고 에게 해의 패자가 되었다. 이 시기 일단의 영웅들이 황금 양피를 찾아 떠났는데, 그때 탔던 배가 '아르고' 호다. 아르고 호에 승선한 대원들을 ‘아르고 호의 선원’이란 뜻으로 ‘아르고너트’라 불렀다.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카스토르, 폴룩스와 트로이전쟁 이전의 쟁쟁한 영웅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는 아르고 호에 동승한 영웅들이 50여명이 거명되어 있다.
기원전 1250년 경 이아손을 함장으로 한 아르고 호는 그리스 북부의 이올코스 항(현재의 볼로스)을 출항, 흑해 동안의 콜키스 왕국으로 향하였다. 이 아르고 호의 항해를 제안한 사람은 펠리아스 왕. 그는 이복형인 이아손의 아버지를 왕위에서 쫓아냈으나 장성한 이아손이 왕위계승권을 요구하자 황금 양피를 찾아오라는 조건을 붙였던 것이다. 이아손은 수많은 모험을 한 끝에 1500여마일을 항해, 콜키스에 도착하여 아이에테스 왕의 황금양피와 메데이아 공주도 함께 데리고 돌아왔다. 이때 메데이아는 마법으로 이아손을 도와 황금 양피를 얻게 도와주고, 부친이 이아손을 추적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친동생 마저 희생시켜 이아손이 황금 양피를 획득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훗날 이아손은 코린토스의 글라우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조강지처인 메데이아를 내쫓게 되고, 메데이아는 글라우케와 자신의 두 아이마저 살해함으로써 이아손에게 복수한다. 노인이 되어 썩어가는 아르고 호에 등을 기댄 채 쉬고 있던 이아손은 뱃머리가 부러져 떨어지면서 이에 깔려 죽고 만다.
이아손의 이야기는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장이었던 아폴로니우스에 의해 ‘아르고 호의 모험’으로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인류 최초로 선명을 가진 배 ‘아르고 호’
1톤 남짓에 불과한 아르고 호는 용골을 거치하고 뱃전을 이어붙인 뒤 뼈대를 집어넣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용골에는 아테나가 제우스의 신탁을 전하던 도도나의 떡갈나무로 만든 신목을 박아 넣었고, 뱃전 너머로 파도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양현에 버드나무로 엮어 짠 방수판을 설치하였다. 돛대는 하나를 설치했고, 50명의 대원들이 절반씩 양현에 앉아 노를 저을 수 있도록 했다. 길이는 20m, 너비는 4m, 흘수는 대략 1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고 호는 선명을 가진 최초의 배라는 점에서 선박사상 의미가 있는 배다.
아르고 호의 이야기는 그저 신화 속의 이야기로나 치부되어 왔었다. 이배로는 기원전 13세기 당시 1500 마일에 이르는 바다를 항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1984년에 세버린은 아르고 호의 항해가 실제 가능할 수 있었음을 복원선 ‘아르고 II’를 통해 실증해 내었다. 1984년 5월 2일 세버린은 자원자 20여명을 ‘아르고 II’에 태우고 볼로스 항을 출항하여 이스탄불에서 지친 선원들을 교체 승선시킨 뒤 7월 21일 코카서스의 리오니 강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사이 ‘아르고 II’는 키가 두 번 부러졌고, 시속 7.5km의 역류가 흐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과해야 했으며, 폭풍을 견뎌내야 했고 총 150만번의 노를 저어야 했다. 이 항해는 토르 헤이에르달의‘콘티키’와‘RA II’항해 이후 가장 유명한 실험항해로 평가되고 있다.
세버린이 복원한 ‘아르고 II
자료 : 루츠 붕크, 역사와 배, p.25.
오디세우스, 뱃전 먼저짜기로 배를 만들다
기원전 12세기 경에는 북방에서 이주해 온 도리아족이 그리스 본토로 밀려들어 왔다. 도리아 족의 남하로 미케네 문명은 완전히 파괴되어 기원전 1100-800년 사이에 그리스는 이른바 ‘암흑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도리아 족을 피하여 남하한 무리들이 아테네와 에게해,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에 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바로 이 시기 그리스 폴리스들의 활발한 해외 활동을 배경으로 하였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배를 짓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나무 스무 그루를 베어 청동도끼로 옆 가지를 친 다음 먹줄에 따라 똑바르게 했다. 칼립소가 송곳을 가져오자 나무마다 구멍을 뚫어 그것을 함께 이어 붙인 다음 나무못과 꺽쇠로 배를 만들었다.…그리고 나서 촘촘히 설치된 늑재(frame)에 붙여 외판을 세웠고, 마지막으로 늑재 위에 긴 널빤지를 댔다.…그는 칼립소가 갖다 준 천으로 돛을 만들고 활대줄을 달고 나서 배를 바다로 끌어내렸다. 나흘째 되던 날 그는 모든 것을 완성했다.”(오디세이아, 제5권)
고대 그리스인들이 뱃전을 먼저 만들고 난 뒤 늑재를 붙이고 그 위에 갑판을 까는 ‘뱃전 먼저 짜기 방식’(shell first)으로 배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나무배를 짓는 방법으로는 오디세우스처럼 외판을 먼저 만들고 늑재를 대는 방식과, 늑재를 먼저 만들고 외판을 대는 ‘골격 먼저 짜기 방식’(frame first)이 있다. 배짓는 법은 ‘뱃전 먼저 짜기 방식’에서 ‘골격 먼저 짜기 방식’으로 발전해 갔다. 고대 조선술에서 골격 먼저 짜기 방식이 나타난 것은 대략 기원후 2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알키노오스 왕은 오디세우스가 이타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를 내어 주면서 뱃사람 52명도 함께 가도록 했다. 이들 중 최소한 두 명은 고물의 양쪽 뱃전에서 키를 잡았을 것이기 때문에 알키노오스가 내어준 배는 노가 50개인 ‘펜테콘토로스’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펜테콘토로스는 ‘50 명이 탄 배’(fifty-er)란 뜻으로 기원전 550년경 그리스 도시국가의 주력선이었다. 알키노스의 펜테콘토로스는 노잡이 1명당 대략 90cm의 공간이 필요하고, 이물 갑판과 고물 갑판, 충각을 합한 길이가 대략 12-15m 가량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단 펜테콘토로스의 전체 길이는 이물에서 고물까지 대략 34-38m 정도였고, 2단 갤리선이었다면 이보다 짧은 대략 20-24m 정도였을 것이다.
‘오디세이아’는 노가 20개인 배도 언급한다.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데 사용한 나무는 폴리페모스가 베어 놓은 몽둥이였는데 그는 그것을 두고 “노가 스무 개 달린 짐배의 돛대만 했다”고 묘사했다. 이밖에 노잡이가 30명인 ‘트리아콘테레스’도 있었는데, 트리아콘테레스는 길이가 23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고대 그리스의 배는 가로 들보의 길이가 배의 앞 뒤 길이의 1/10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길이에 비해 너비가 아주 좁았다. ‘오디세이아’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배의 외판을 검은빛, 흰빛, 주홍빛 따위로 칠했으나, 검은빛을 가장 널리 애용했음을 적고 있다.
그리스 배의 특징, 물고기 형상과 선수의 ‘눈’
그리스 배들은 주로 노를 저어 항해했다. 네모 돛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 배의 주된 동력원은 노였다. 지중해는 비교적 잔잔한 바다였으므로 항구에서 출항하거나 입항할 때, 그리고 바다를 잔잔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노를 저어 항해하였고, 뒷바람이 불 때는 이따금 돛으로만 항해하기도 하였다. 돛으로 항해할 때는 키잡이가 방향을 조정했다. 그리스 배는 말할 것도 없고, 이집트와 페니키아의 배에도 키가 달려 있었다. 다만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가운데 키’(船尾 中央舵)가 아니라 ‘뱃전 키’(舷舵, side rudder)였다는 것이 다르다. 유럽에서 가운데 키는 훨씬 후대인 12세기 한자도시의 ‘코그’선에 처음으로 장착된다. 반면 중국과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배들은 기원전부터 고물 가운데에 키를 장착하였다.
고대 그리스 배는 전체적으로 물고기 모양을 흉내 내어, 이물에는 사람의 눈을 그려 넣었고, 고물은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만들어 매우 날렵한 인상을 준다. 그리스 배들은 이물의 아래에 충각(衝角, ram)을 갖추고 있었다. 이물의 충각은 페니키아의 군선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그리스인들이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 충각은 해전에서 적선을 파괴하기 위한 무기로만 간주해 왔었다. 그러나 사우스햄프턴에서의 시험항해 결과 충각은 단순한 무기로서 뿐만 아니라 능파성을 향상시키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늘날에 건조되는 모든 배들은 선수를 튀어나게 건조하는 데, 이를 1907년 USS Delaware 호에 처음 적용한 D.W. 테일러의 이름을 따서 ‘테일러의 돌기' 또는 ’구상선수‘라 한다. 이물에 눈을 그려 넣은 것과 고물을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만든 것은 그리스 배에만 나타나는 독창적인 양식이다.
그리스의 1단 갤리선(BC 750)
출처 : 김재근, 배의 역사, p.50
그리스인 뱃사람, 별을 따라 항해하다
오디세이아에는 그리스인들이 항로를 찾아가는 방법도 소개되어 있다.
“오디세우스는 줄곧 플레이아데스(Pleiades, 비둘기 자리)와 늦게 지는 보오테스(Bootes, 목동 자리), 큰곰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큰곰은 같은 자리를 돌며, 오리온을 마주보고 있다. 큰곰은 오케아노스(Oceanos)의 목욕에 참가하지 않기(지지 않기) 때문에 칼립소는 바다를 항해할 때 이 별을 왼쪽에 두라고 말했던 것이다.”(오디세이아, 제5권)
배를 타 본 사람이라면 항해하는 데 가장 긴요한 것은 침로와 동력이라는 것을 잘 안다. 오늘날 뱃사람들이야 자이로 콤파스나 나침반을 통해 방향을 알 수 있지만, 나침반이 항해에 사용된 것은 중국의 경우 11세기, 그리고 유럽의 경우 12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따라서 이전까지 난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은 낮에는 해를, 그리고 밤에는 별을 보며 방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살펴본 고대 그리스의 배는 호메로스가 생존했던 기원전 8세기 경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이 시기 그리스의 배의 전형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유명한 도자기에는 세이렌(Seiren) 자매의 곁을 항해하는 오디세우스의 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오디세우스는 사람을 홀리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도록 뱃사람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았으나,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자신의 귀는 막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돛대에 자신의 몸을 묶고 노래를 들었다. 이 도자기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 이물에는 눈 모양이 새겨져 있고, 고물은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뱃전 키가 달려 있고, 네모돛은 감아 올린 채 노로만 항해하고 있다. 이것이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의 전형적인 배였다.
세이렌 자매와 오디세우스(기원전 6-5세기, British Museum 소장)
출처 : Luc Cuyvers, Sea Power : A Global Journey, p.iii.
오디세우스 이후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해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리스의 배들도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펜테콘토로스 단층선이나 2층선은 기원전 500년경에 등장한 3층 갤리선인 ‘트리에레스’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이 3층 갤리선이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해역을 지배하는 주력 전함이 되었다.
갤리선, 로마의 주력선 지중해를 평정하다
로마인들은 육상 민족으로서 자체의 독특한 선박을 개발하지는 못하였고, 대체로 그리스 배를 계승하였다. 다만 로마가 팽창하면서 지중해 일대에서 해전을 치러야 했으므로 전함의 크기를 대형화시켰다. 그리스인들의 주력함대는 3단노선이었지만, 로마인들은 16단선까지 이용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수는 뱃전에 설치한 노의 층수가 아닌 노잡이 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 고대의 어떤 갤리선도 3층 이상으로 노잡이들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16단선은 어떻게 노를 배치하였을까? 16단선은 각 층에 노잡이 8명이 젓는 노들을 배치한 2층짜리 갤리선이거나 3층에는 여섯명이 젓는 노들을 배치하고, 1층과 2층에는 각각 다섯명이 젓는 노를 배치한 3층짜리 배일 가능성이 크다.
12단선과 16단선 갤리선
출처 : Casson, 고대의 배와 항해이야기, p.147
로마의 상선, 로마인를 먹여살리다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이집트, 에스파냐, 그리스, 아라비아 심지어 중국의 산물까지 로마로 흘러 들어왔다. 1년간 로마로 들여오는 곡식만도 15만톤에 이를 때도 있었다. 수많은 상선들이 부유해진 로마인들의 취향을 만족시켜줄 상품을 싣고 로마의 항구들로 입항하였으며, 로마인들에게 지중해는 이제 ‘우리들의 바다’(Mare Nostrum)가 되었다. 이에 따라 로마는 상선도 발전시켜야 했다. 오스티아에서 발견된 3세기 경 부조에는 로마 인근의 포르투스 항구로 입항하고 있는 상선이 조각되어 있다. 이 상선엔 동물 그림이 그려진 네모돛과, 그 위에 톱 세일(top sail)로 세모돛이 보이고, 고물 쪽에 뱃전 키가 달려 있다. 이물 쪽에는 길다란 돛대가 앞쪽으로 뻗쳐져 있는데, 이것은 조타용 돛을 달기 위한 돛대이다. 고물은 마치 백조의 머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고물 쪽에 보트에 탄 사람이 배를 정박시키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뒤편에 보이는 불꽃은 등대이다.
최근 그리스 배의 잔해가 발굴되기는 했지만, 아직 그 실물을 확인해 주지는 못하고 있는 데 비해, 로마 배는 네미(Nemi) 호와 피사에서 실물이 발굴되었다. 1932년 로마 인근 네미 호수에서 배 두 척과 닻 등이 발굴되었고, 1999년 피사에서도 상선 8척이 발굴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길이는 배에 따라 7-27m 사이이고, BC3세기에서 AD 5세기 사이의 상선들로 추정되고 있다. 네미 발굴선은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 37-41년)의 놀잇배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배 중 한 척은 충각장치와 선미재, 그리고 키 등이 발견되었고, 길이는 70m, 너비는 20m 정도이고, 다른 한 척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지만, 길이 72m, 너비 14m의 상선으로 추정된다.
네미 발굴선을 보면, 용골과 안쪽 용골을 갖추고 있고, 좁은 간격으로 늑골과 보를 배치하여 외판을 고착하였다. 그리고 외판 위에 납판을 구리 못으로 부착했고, 갑판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기둥으로 받치고 있다. 외판은 두께 10cm, 넓이 30cm 짜리 판자를 썼고, 네모난 촉꽂이 방식으로 접합하였으며, 늑골은 두께 20cm, 넓이 30cm 짜리 각재를 50cm 간격으로 설치하였다. 네미 호에서는 닻도 발굴되었는데, 이를 보면 닻채(shank)와 닻가지(arm)는 나무로 만들었고, 닻장(stock)은 납으로 만들었다. 이 닻장에는 1275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닻장의 무게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략 417kg에 해당한다.
고대 지중해 해역에서 상선의 크기를 구분할 때는 ‘…개를 실어 나르는 배’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 시기에 가장 일반적인 상선은 ‘1만 개를 실어 나르는 배’였다. 1만개가 항아리의 개수인지 아니면 곡물부대의 숫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적재량으로는 대략 400톤 정도였다. 로마인들의 배의 어느 정도 컸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사료가 남아 있다. 기록대로 한다면 로마의 상선 중 가장 큰 것은 대략 1200-1300톤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 경 로마의 대형 곡물선이 바람에 떠밀려 피레우스로 입항하였다. 아테네에 거주하고 있던 루키아누스는 피레우스까지 5마일을 걸어가 이 배를 본 뒤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배의 엄청난 크기라니! 그 배의 목수는 내게 배의 길이가 55m이고, 가로들보의 길이는 그 1/4이 넘으며, 갑판에서 배 밑바닥의 가장 깊은 곳까지의 깊이만도 14.6m나 된다고 했다. 게다가 그 돛대하며, 그것에 매달린 활대하며, 돛대를 지탱해주는 앞버팀줄은 또 얼마나 큰지! … 그리고 장식들과 그림들, 앞갑판에 놓여 있는 닻들과 권양기들, 고물 쪽에 마련된 갖가지 시설들, … 거기에 승선한 뱃사람들의 숫자는 군대의 숫자만큼 많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내게 그 배에 아테네의 모든 시민들이 일년동안 먹고도 남을 만큼의 곡물을 싣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외판을 먼저 만들고 늑골을 만들었지만, 로마인들은 이와는 반대로 먼저 용골과 늑골을 만들고 난 뒤 외판은 촉꽂이 방식으로 접합하였다. 선체 외판의 부식을 막기 위해 납을 덮었는데, 수면 아래는 구리 못을 썼고, 수면 위는 철 못을 썼다. 조선술 측면에서 네미 선은 고대 최고 수준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June KIM, 2011)
글= 김성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