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모든 사랑은 기적이다

입력 : 2015-06-16 20:13:40 수정 : 2015-06-17 11: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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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주 부산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마지막 칼럼이다. 속내랄 것도 없다. 인문학자랍시고 버젓이 글을 기고하기는 하였으나, 인문을 경서 삼아 산책을 주도하리라는 본의 따위는 애당초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반듯한 곡식을 짓듯, 정연한 마음을 싣고자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초입부터 헝클어져서는 말썽을 빚기 일쑤였다. 그제나 이제나 무참하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자초를 살핀다 한들 별반 도리가 없었다. 꼬박 반년을 삼켰다. 시시한 글들을 잘도 헤프게 써댔다. 서글픈 실토이다.

재간이 척박함을 자각한 지 오래다. 수완이 신통치 못해서이기도 하거니와, 사람이 변변치 못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글을 품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최선이 아닌 차선이었다. 마음을 건넬 친우가 없고 마음을 쏟을 연인 또한 없어, 문학에 의탁하고 예술로 거두었을 뿐이다. 구실은 그럴듯해졌고, 트집은 잡힐 리 없었다. 차선은 늘 최선이었다. 이를 빌미 삼아, 인문학자가 되었다. 행여나 하고 요행을 바란 것은 아니다. 천행이라 여겼다. 덕분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가장 가난한 발성은 사랑이다
인생은 신파다
오늘도 선량한 기척을 듣는다

세상은 어수룩하지 않다. 살아지기는 하였으나, 거뜬하지는 않았다. 온몸에 옹이가 맺혔다. 학인으로서의 삶은 윤택하였으나, 세인으로서의 삶은 황폐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발성은 사랑이라 여겼다. 각고로 정려를 기울인다 하여 다다를 수 있는 너비가 아니었다. 하여 기꺼이 체념했다. 하릴없이 소꿉놀이로 소일하였다. 어느 사내에게도 넉넉히 품을 내어주지 못했다. 댕기 풀고 낭자 틀며 살고 싶은 이는 어디에고 없었다. 그 어느 때도 연심은 아니었지만, 연정이라 야무지게 화답하고는 했다. 사랑이 발화되는 순간, 곤궁한 너비는 여실해진다. 한 단어에 온 마음이 실리지 않아 애달프기는커녕, 번번이 헐겁기만 하여 매번 싱거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계절이 짙어갈수록 작별은 흔쾌해졌다. 번번이 작정한 이별이었다. 사람은 편재했으나, 사랑은 부재했다. 혹독한 자백이다.

인생은 신파다. 학인으로서 내려놓은 적 없는 명제이지만, 속인으로서 체감한 적 없는 논제이기도 하다. 알콩달콩한 리듬에 통속적으로 살고 싶었음에도, 아기자기한 가락에 마음이 실리지는 못하였다. 곁을 내어주기는 하였으나 언제고 기탄없이 거두어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시간의 찰나를 승낙하기는 하되 세월의 영속마저 용인하지는 않았고, 덕분에 그 어떤 인연에도 결박되지 않고 용케 무탈할 수 있었다. 실연한 이의 적막감이나 상실감에는 무감했다. 철저히 상대의 몫이라 치부하였다. 애써 잊으려 하기도 전에, 이내 쉬이 잊혀져 버렸다. 사랑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처사이다. 소꿉놀이에 애도의 의례는 불필요했다.

단 한 번도 신파로 살아내지 못한 마당에, 첫눈에 반한다는 말 따위를 믿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제는 식상한 그 은유를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세상만사 단언할 수 있는 것이 그 어느 것도 없음을 여실히 깨친다. 인생은 신파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아찔해져, 롤랑 바르트의 글귀에 종일 기댄다. 그가 읊조리거늘,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 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한 사람이 있다. 참외향이 가득한 사람이다. 매일 재회함에도, 그를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일생을 기다려온 사람이니, 거뜬히 의젓하게 기다린다. 첫눈에 반했다. 사랑이다.

곁에서 그의 선량한 기척을 듣는다. 산책을 하고, 소풍을 가며, 사랑을 한다. 모든 하루가 처음이다. 첫 설렘이고, 첫 고백이며, 첫 포옹이다. 새하얀 운동화를 나란히 신고, 오순도순 예쁘게 장을 본다. 김밥을 싸는 법을 어설프게 궁리하면서도, 야무지게 과일을 깎기 위해 골똘히 골몰한다. 오늘도 그를 사무치게 사랑한다. 망부석이 따로 없다. 모든 사랑은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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