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산 열두쪽배기등 전망바위에 올라선 영남알프스학교 배성동 이사장이 영축산에서 정족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을 가리키고 있다. 신불산 단조봉에서 시작한 열두쪽배기등의 산줄기는 삼남들판을 가로질러 KTX울산역에 닿는다.
신불산 열두쪽배기등으로 해서 단조봉(1,045.7m)까지만 올랐다. 그리고 길이 험해서 산짐승도 겁을 먹는다는 아리랑리지로 하산했다. 신불산과 영축산은 단조봉에서 눈에 담아 왔다. 신불평원의 억새는 푸른 기운을 떨치며 넘실거렸다. 영남알프스 이야기꾼 배성동 작가가 앞장서서 열어 준 길. 아리랑리지와 쓰리랑리지 사이 우는골에서는 바람이 오래 머물며 한참 소리 내었고, 쓰리랑리지 꼭대기의 '남도부 지프'는 벼랑 아래로 위태위태하게 걸려 비운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마당바위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여기가 선경인 듯 천상으로 오르는 돌사다리가 신비롭다.
소똥 무더기·뚝배기 엎어놓은 형상 마당바위서 올려다 본 하늘 '한 편의 선경'
신불평원 바람에 속삭이는 억새 물결 인근엔 바람도 구슬피 우는 '우는등만디'
남도부 짚차바위 벼랑에 걸려 위태위태 민초들 비운의 역사 말해주는 듯
■밥자배기 팥죽자배기 질뚝배기
산을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등산로는 주로 계곡이나 능선으로 나 있다. 울산 울주군 삼남면에서 신불평원 '우는등만디'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그중 열두쪽배기등은 옛사람이 억새 등짐을 지거나 소 먹이러 다니던 편한 길이라고 했다.
작가이자 영남알프스학교 이사장인 배 작가의 안내를 받아 장제마을~고장산 안부~묘지~전망 바위~계곡 갈림길~아리랑리지 갈림길~주능선~단조봉~아리랑리지 갈림길~짚차바위~아리랑리지~마당바위~너덜겅~쓰라링리지 입구에서 너덜겅길로 다시 되돌아 나와 군 사격장 출입금지 팻말~절터~김해 김씨 묘~압류사지~금강골 입구~장제마을까지 8㎞를 6시간 40분 동안 걸었다.
거리는 짧았지만, 길이 험해서 느긋하게 걸었고,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느라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줄도 몰랐다.
배성동 이사장이 신불산 구상나무를 안아주고 있다.
배 작가는 2013년 '억새야 길을 묻는다-영남알프스 오디세이'란 책을 냈다. 25년 동안 영남알프스의 오지와 골짜기·능선을 구석구석 다닌 결과물이다. 지난달부터는 영남알프스학교를 열어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장제마을은 농부 시인으로 불리는 이우정 시인의 집이 있는 마을. 이 시인의 집 앞마당에 차를 대고 산행을 시작했다. 장제2지를 지나니 장제1지는 유료 낚시터가 돼 있다. 낚시터 앞마당 한쪽에 영남알프스 둘레길 안내판이 서 있다. 오른쪽에 우뚝 서 있는 고장산을 보며 왼편 안부를 향해 숲 속으로 들어섰다.
열두쪽배기등은 신불평원 단조봉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삼남들판 마산마을까지 이어지며 크고 작은 12개 뚝배기를 닮은 봉우리를 만들어서 붙은 이름이란다. 배 작가는 "소똥 무더기 같기도 하고, 아가리 큰 열두 개의 뚝배기를 엎어놓은 형상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고장산은 주둥이가 넓어 둥글넓적한데 사방 어디서 보아도 그 모양이 매끈한 잘 빚은 그릇이라고 말했다. 고장산 안부에서 단조봉을 향해 걸음을 시작하자 산딸기가 먼저 반겨준다. 산딸기 한 줌을 허겁지겁 먹고 나니 허름한 무덤 하나가 있다. "보부상인지, 소금장수인지 모르지만 잠시 묵상을 하고 갑시다." 배 작가는 길섶에 있는 무덤은 길을 걷는 운명을 타고났던 분일 경우가 많다고 했다.
쓰리랑리지 남도부 짚차바위로 접근하는 취재팀.
■우는등만디에서 부는 억새 바람
앞서가던 황계복 산행대장이 뱀을 보았다. 나무를 잘 타는 누룩뱀이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동작이 너무 빨라 제대로 담을 수가 없었다. 바로 발 앞에는 맹독을 지닌 살모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뱀 소굴로 잘못 들어온 것인가.' 내심 걱정이 된다. 살모사는 꼬리를 흔들며 도망도 가지 않는다. 황 대장이 스틱으로 뱀을 치운 후에야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신불산은 독사 조심, 나물 조심이라는 말이 있어요." 배 작가가 신불산엔 유독 뱀이 많고, 나물이 지천이어서 혹 탈이 날 수도 있어 이런 말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름 모를 무덤에 예를 표한 것이 주효했던지 뱀과는 아무 일이 없었다. 다음부터 산행 초입에 있는 무덤엔 꼭 '입산 신고'를 해야겠다.
제법 올라왔다. 도드라지게 솟은 바위에 서니 아래가 잘 보인다. 삼성의 이병철 전 회장이 터를 잡을 때 삼남들판이 풍요로운 길지라서 풍수에게 보이고 공장을 지었다는 말이 있다. 산과 들, 내가 어우러진 들판에 국도 35호선이 지나간다.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금강골 입구 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갈림길을 지나서 한참을 가다가 살짝 능선을 왼쪽으로 우회한다. 아리랑리지 갈림길에서 주능선까지 단숨에 오른다. 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덮어씌운 용수를 닮았다는 봉우리는 예사롭지 않다. '위험한 등산로이니 장비를 갖춘 사람만 이용'하라는 안내표지가 있다.
왼쪽은 우는등만디, 오른쪽은 신불산 쪽 단조봉이다. 유월의 억새가 푸른 몸체를 자랑하며 일렁인다. 간월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은 구불구불 잘도 이어진다. 이곳 신불평원의 단조성터는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빼앗긴 백성과 의병들이 지키던 최후의 보루.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고 피는 늪을 물들였다. 바람도 그리 슬퍼 울어댔을까.
누구는 빵을, 누구는 샌드위치를, 누구는 밥을, 누구는 고구마를 사 왔다. 여러 사람이 앉아 음식을 나누며 충분히 쉬었다. 살짝 녹아 살얼음이 동동 뜨는 한 병뿐인 막걸리는 축복이었다.
농부 시인 이우정 씨가 부산 손님에게 줄 죽순을 다듬고 있다.
■아리랑 쓰리랑 고개를 넘어가요
신불산이나 영축산은 가지 않고 아리랑리지로 바로 하산을 하기로 했다. 아리랑리지는 암벽등반을 하는 이들이 붙인 이름인데 원래 능선은 아리랑고개라고 불렀단다. 그 옆에 쓰리랑리지는 쓰리랑고개였을까.
배 작가는 신불산에는 구상나무가 있다며 안내해 주었다.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나무로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 등에 자생하는데 신불산에도 구상나무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6·25가 나기 전에는 이 산에 구상나무가 많았을 것이라고 배 작가는 짐작했다. 산판꾼들이 일제강점기부터 혼란한 틈을 타서 베어 낸 나무는 모두 아름드리 구상나무일 것이라고 한다.
바위틈에 자리 잡은 구상나무는 새잎을 틔워 생생하게 자라고 있다. 그 아래 남도부가 타던 지프가 벼랑에 걸려 있다고 해서 가 보았다. 운전석이라고 해서 앉아보았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는데 나중에 반대편 아리랑리지에 가서 그쪽을 보니 돌로 깎은 듯한 지프가 바위 꼭대기에 위태롭게 걸려 있다. 남도부는 진주 출신으로 이곳 배내골에 은둔했던 빨치산 대장이다.
아리랑리지는 암벽 등반 장비가 없으면 내려갈 수 없다. 다만, 그 옆으로 일반인이 다닐 수 있는 산길이 있다. 아리랑리지 아래 마당바위에 도착했다. 우는골을 향해 배 작가가 소리를 내니 메아리가 몇 번이고 화답한다. 바람이 불면 골짜기 전체가 운다고 해서 우는골이다.
금강폭포 주변에 임진왜란 때 피란한 사람이 숨어 지내던 동굴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려 했지만 숲이 우거져 가지 못했다. 대신 쓰리랑리지 바위만 실컷 구경했다. 아래에서 본 아리랑·쓰리랑리지와 용수는 하늘로 오르는 천상의 사다리처럼 웅장하다.
하산길은 순조롭다. 금강골은 사격훈련장으로 출입을 통제한다. 금강골은 원래 험준하여 임란 때 단조성의 의병이 일당백으로 지킬 수 있는 골짜기였지만 지금은 가 볼 수 없다.
사격훈련장 입구를 지나니 상북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울산~함양 간 고속도로 현장이다. 장제마을 농부 시인 이우정 씨는 뜨내기 부산 손님에게 준다며 죽순을 다듬고 있었다. '사람이 못할 일을 신이 하네/멀리서 바라본 산 어머니 품속/…억새꽃 구름 같은 능선길 따라/무심히 오고 가는 산행길 가네' 시인의 '단조방에 올라'란 시다. 문의:황계복 산행대장 010-3887-4155. 라이프부 051-461-4094.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