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보는 이달부터 '영화편집의 대가'인 고임표 편집감독의 칼럼을 싣습니다. 아시다시피 고 감독은 충무로에서 영화와 드라마 편집으로 30년 이상을 보낸 한국영화 편집의 산증인이자 전설입니다. '충무로 1인자'로 군림한 강우석 감독과 많은 시간 호흡을 맞추며 숱한 작품을 빚어냈고요. 가장 최근에는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를 통해 안방극장 시청자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요즘 대학에 출강하며 후학들을 가르키는 그가 매주 혹은 격주로 독자들과 소통할 칼럼의 제목은 '고임표 감독의 재미있는 편집이야기'로 정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영화편집에 종사한지 어느 덧 30년을 훌쩍 넘었기에 글쓰기는 좀 어색하다. 사실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시간을 망설이고 고민했다. 영화는 보통 작가가 글을 쓰고 감독이 연출을 하고 촬영된 그림을 자르고 붙여 만드는게 보통의 제작과정이다. 하지만 오랜기간 찍어온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드는데 익숙한 내가 영화이야기를 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니…. 이렇게 글로 영화이야기를 하려니 재미없으면 어쩌나 조금, 아니 많이 걱정된다.
첫 이야기인데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 오늘은 편집자로서 '나의 호칭은?'으로 정했다. 좀 무거울 수도 있지만 나름 가벼운 이야기라 생각하고 펜을 들었다.
내 고향은 강원도 영월이다. 1981년 2월 고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충무로 영화녹음실에서 영화를 처음 접했다. 이어 1984년 이웃한 영화편집실에서 조수일을 시작했다. 방송사들이 몰려 있는 서울 여의도로 건너가는 행운을 잡았다. 1991년 5월부터 MBC에서 200여 편의 베스트극장과 수목 및 미니시리즈, 주말드라마 등의 방송편집을 했다.
약 7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영화가 그리워졌다. 1997년 충무로가 아닌 강남에 '고임표 편집실'이란 상호로 사무실을 열고 지금까지 100여편의 한국영화를 편집했다. 틈틈이 10여 편의 방송 미니시리즈를 매만지기도 했다.
이론적 부족함을 매우기 위해 늦깎이 공부에도 도전했다. 경희대 연극영화과와 동국대 영상대학원에서 편집을 전공하며 책과 씨름하기도 했다. 지금은 대학에서 영화-드라마 편집 강의를 하며 꿈꾸는 50대로 살고 있다. 거창할 것도 없지만 나의 소개는 이 정도로 마무리 하려 한다.
나는 편집감독이다. 많은 영화인이나 영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나 같은 직업의 소유자를 '편집기사'라 부른다. 대개는 '고기사`라고 하고, 존칭을 쓸땐`고기사님'이다. 흔히 본인의 성을 따서 부른다. 김기사, 박기사, 유기사, 장기사, 방기사, 기사 등등. 그래서 주변사람들이 '고기사' 라고 하는데 좀 친해지만 이렇게도 부른다 "고기사세요" 라고. 또 친한 영화인이나 동료들은 나의 작업실을 푸주간(정육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아무튼 그 바람에 고기 참 많이 샀다.(하하)
그럼 '감독'과 '기사'는 무엇이 다를까.
기사는 흔히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기술자를 칭한다. 영화인 중에서 한때 촬영기사, 조명기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촬영감독협회와 조명감독협회가 생기면서 '감독'이라 부르고, 영화크래딧에도 촬영감독, 조명감독으로 올린다. 그런데 편집은 그만한 힘을 가진 협회가 없기에 아직도 편집기사로 불리워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을 통해 영화가 들어왔는데 이러다보니 한때 영화현장에서 일본 용어가 비교적 많이 쓰였다. 흔히 아는 따찌마와(액션장면), 대모찌(카메라를 어깨에 매고 찍기), 가께모찌(두가지일을 교차하여 동시에 하는 것) 등등.
편집실에서도 도뿌(top), 게스(end), 콤마(frame), 마끼도리(필름감는 장비),끼랴끼랴(반짝반짝 빛나는 장면)등등 정말 많은 일본어가 사용됐다. 이런 와중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기술자로 분류돼 '기사'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다시말해 기사가 일본어는 아니지만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 개인적으로는 영화편집하는 전문직을 기사라고 호칭에 대해 불만이 많다.
요즘엔 감독 대신 영어표기도 종종 목격된다. 예전에 극장용 사운드 담당자를 녹음 또는 믹싱기사로 불렀지만 지금은 'Sound Supervisor'로 호칭한다. 또 컴퓨터 그래픽을 하는 사람은 'Visual Supervisor', 촬영 현장의 카메라에 저장된 정보를 정리하는 사람을 'Data Manager', 분장은 'Makeup Artist'라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도 편집은 빠졌다.무엇보다 영화 믹싱과 비슷한 시기에 필름편집에서 컴퓨터편집(Non-Linear Editing System)으로 바뀌었지만 정작 편집자들은 아무런 호칭 변경요구를 하지 않았다.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영화편집자를 `Film Editor'라고 칭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부른 사람도 없었다. 이런 배경에는 영화 스태프들이 너도나도 감독이라고 쓰는 것에 대한 충무로 주변의 반발 분위기도 어느 정도 감안했으리라 생각된다.
앞서의 지적처럼 영화현장에서 감독이라 불려지는 사람들이 많다. 연출을 담당한 감독, 촬영감독, 조명감독,무술감독, 음악감독, 부감독, 총감독, 알 수 없는 감독 등등. 그래서 연출을 하는 감독들은 영화 스태프들이 감독으로 호칭되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다. 아니 싫어 한다. 촬영현장 여기저기서 "감독님" "감독님" 소리가 들리니까 어떤 이들은 "태양이 하나면 된다"고 대놓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방송드라마 편집자들은 `선생님' 또는 `감독'으로 호칭된다. 하지만 영화편집자들은 아직도 편집기사로 불리워진다. 때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실장님' `사장님' `대표님' `선생님' 등으로 부르는 영화인들도 있다. 그들도 '기사'라고 표현하기가 싫거나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혹자는 "감독이든, 기사든 그게 뭐가 중요해. 일만 잘 하면 되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솔직한 나의 생각은 '기사'로 불리워지는 게 탐탁하지 않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나는 직원들에게 '감독'으로 부르라고 했다. 또 내 명함엔 `대표/Editor'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100여 편의 한국영화 편집과 MBC 베스트극장을 포함하여 수백 편의 방송 드라마 편집을 했는데 나 스스로 편집감독임을 인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방송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대개는 높은 직급을 가진 방송사 종합편집실(방송을 내보내기위한 마스터를 만드는 곳) 책임자가 편집감독 크레딧을 차지한다. 우리의 경우, 몇날 몇일 밤을 새며 스토리를 엮어가는 편집자들이 '편집' 또는 'NLE편집' 이라고 겨우 이름을 올린다. 약자의 설음이라고 할까.
아무튼 30년 동안 편집하면서 정말 많은 밤을 지샜다. 웃으게 소리로 '날샌 편집'이라 한다. 남들이 쉴 때,놀 때, 잠잘 때 즐기지 못하고 열심히 일한 그대들. 이젠 우리 스스로 '편집감독'이라고 말하자. 편집은 알파고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자부심을 갖자. 많은 편집자들이 편집감독으로 불리워지는 그날이 오기를 진정 바란다.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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