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났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출발점이었다. 지난 18일 오후(현지시각) 칸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 칸에서 타계한 BIFF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했고 누구보다 부산, 그리고 한국을 사랑했던 그가 지구 저편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불귀의 객이 됐다.
그는 1996년 출범한 BIFF 창립멤버 6인 중 한사람이다. 김동호 위원장을 '어른'으로 모시고,이용관 전 위원장 전양준 전 부위원장 박광수 감독을 '형님'으로 받들며 BIFF를 아시아 정상의 영화제로 이끈 주역이었다.
이른바 BIFF 개국공신 중 막내였지만 '우리도 제대로된 국제영화제를 해보자'며 부산에서 문화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이가 바로 김지석이었다.
그는 출범을 앞둔 영화제가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당시로선 거액인 결혼자금 500만원을 쾌척했고 안정적인 교수 자리도 박차고 영화제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누구도 관심없던 '아시아 영화'에 주목했고 아시아 담당 프로그래머를 자청했다.
그래서 지금 부산이 세계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영화도시로 우뚝 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매년 영화제가 열리는 10일동안 그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 했다. 한마디로 철인이었다. 그렇게 BIFF에 젊음과 청춘을 바쳤고 20년 세월을 살아왔다.
그런 '영화철인'을 힘들게 한 것은 2014년 발생한 '다이빙벨 파문'이다. '정치 외풍'을 차단하며 순수한 문화 단체인 BIFF는 이를 계기로 한 순간 불량집단으로 낙인 찍혔고 이용관 전양준 등 창립멤버 '형님'들과 반목과 대립하는 사이로 변질됐다.
'BIFF 정상화'를 외치며 보이콧을 선언한 충무로 영화인들과 달리 그는 '영화제가 쉴 순 없다'며 집행부 자리를 지켰다.
결국 몸이 망가졌다. 절친 오석근 감독(부산국제영화제를 지키는 시민문화연대 공동대표)는 심혈관 지병이 있어 혈압이 높았다고 전한다. 작년에는 약 3주가량 입원치료도 받았다. 하지만 개국공신 6인 중 가장 막내인 그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너무 아쉽고 눈물난다.
필자는 지난 2009년 5월 BIFF 탄생 비화 등을 듣고자 고인과 3일간 긴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출판목적이었기에 언론 보도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 인터뷰는 많은 분량으로 인해 3회에 걸쳐 나눠 보도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책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후 가장 나중 (2009년 5월)에 만난 사람이 김지석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자란 탓에 영화제 창설 멤버 중 오석근 감독과 함께 정통 부산 맨이다.
학창 시절 무작정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청년이었던 그는 영화제 출범에 결정적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은 김지석 때문에 부산영화제가 탄생됐다고 말한다. 공과대학(부산대 기계공학과)을 졸업하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그는 왜 세상의 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영화제에 뛰어들었을까? 그리고 그가 그리는 BIFF 청사진은 무얼까?
- 누가 영화제를 하자고 제일 먼저 제의했나.
▲배경을 정확하게 말씀 드릴게요. 부산에서 영화제를 만들자며 제가 주동이 돼 세미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 연후에 1994년 말 즈음에 만난 사람 중에 공연기획을 하던 김유경 씨가 있는데 그분이 파라다이스 호텔 쪽에 영화제 이야기를 했었죠.
물론 김씨는 저에게 와서 호텔에서 영화제를 할 경우 시드머니를 댈 수 있다고 귀띔을 했죠. 영화제 할 생각을 갖고 있던 우리로선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용관이 형 등 멤버들과 모여 얘기를 나눴고 호텔을 끌어들이자는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죠. 물론 그 전에 영화제 이야기는 모두 꿈꾸는 단계였죠.
일단 호텔 측 이야기를 듣고 의사를 확인한 뒤 95년 들어 영화제 선장이 필요해 김동호 위원장을 섭외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찾아가 인사 드리고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죠. 당시 김 위원장은 영진공 사장을 했고 해외에도 많이 다니고 했는데 그 즈음 광주에서 영화제를 하자는 제안이 우리 쪽 보다 먼저 들어간 걸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쪽은 준비가 덜 돼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고 저희들 제의에 흔쾌히 동의해 주신 거죠.
-그것 갖고는 김 위원장 영입작전 설명이 좀 부족해 보인다. 김 위원장을 공직에서 차관까지 지내시고 영진공 사장까지 역임한 분이지만 영화제 준비 팀들은 모두 일천한 경력에다 나이는 모두 30대가 아니었는가.
▲잘 못 믿겠지만 사실이에요. 우리는 영화제의 필요성을 자세히 얘기 했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인적 네트워크도 함께 털어놨죠. 페사로영화제 집행위원장, 야마가타영화제 집행위원장, 토니 레인즈 등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이고 말이죠. 그리고 저나 전양준 선배는 해외 영화제 좀 갖다 왔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친구들 영화제 좀 아네'하고 승낙을 하신 거죠. 또 하나 이유는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돈을 댄다고 하니까 `이거 되겠다'고 생각하신 거죠.좀 불안했던 부문은 영화 현장 쪽 사람이 없었던 것인데 그래서 김 위원장께서 박광수 감독을 부위원장으로 영입했고요.
- 초반에 공연 기획하던 김유경씨의 역할이 컸다. 일찍 빠진 이유가 궁금한데.
▲판단을 냉정하게 하는 박 감독이 영화제 준비 팀에 합류한 뒤 상황이 좀 달라졌어요. 박 감독이 준비 팀에서 함께 일하는 김 씨의 역할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별로 할 것이 없다고 했고 분위기가 그렇게 되니까 김 씨 본인이 알아서 빠진 것이었어요.
- 파라다이스 호텔이 발을 빼게 된 이유는.
▲호텔 측에서 우리가 준비하던 영화제를 아카데미상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요.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걷고 TV에서 화려하게 중계도 하고 뭐 그런 것 말이죠. 그런데 돈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배우와 감독이 오는 아시아 중심의 영화제를 한다니까 이거 아니다 싶어 발을 빼게 된 것이죠. 우리로선 시드머니가 없어져 다급해졌어요.
결국 자금 줄이 막히니까 김 위원장이 그때 돈 나올 구멍이 기업하고 부산시라고 판단한 뒤 기업은 대우를 접촉한 것이고 시는 오세민 부시장을 만난 거죠. 오 부시장은 당시 문정수 시장에게 보고를 드렸고 그래서 지원을 받게 된 거죠. 영화제의 첫 단추는 그렇게 끼워진 거에요.
- 영화제 준비단계에서 그렸던 청사진은.
▲우리는 늘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고 그래서 합의를 도출했어요. `비경쟁영화제와 아시아영화'에 포커스를 맞추자는 것이 핵심이었죠. 이는 지금도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 준비 작업은 어떻게 했는지.
▲그 때 토니 레인즈를 불러 자문을 구했고 그는 말 그대로 페스티벌 어드바이저였어요. 토니의 경우 프로그래밍하는 데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 도움이 아니라 해외 연락 정도를 자문하는 수준이었고 작품선정 작업에는 개입하지 않았죠.
그리고 중요한 사람이 바로 재미교포이자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영화제 집행위원장인 폴 리였어요. 이 친구는 박광수 감독이 끌어들였는데 폴 리가 합류하면서 영화제 운영의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어요. 사실 우린 아무런 경험이 없었죠.
예를 들어 티켓 카탈로그 하나를 만드는데 마감시간도 생각하지 않고 진행하자 어느 날 폴 리가 와서 "왜 안하고 있냐?"고 묻더군요. 뭐 그런 식이었죠. 몰랐으니까.
또 영화제 초기에는 임안자 씨의 도움도 많이 받았죠. 그분과의 인연은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 때 맺었는데 스위스에 살고 있으면서 한국 영화 관련 평론을 쓰면서 중간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페사로에 가면서 알게 됐는데 나중에 우리 일을 참 많이 도와줬어요.
임 씨 외에 왕아이린 당시 홍콩영화제 프로그래머도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줬습니다. 당시 홍콩영화제는 우리의 롤모델이었는데 토니 레이즈가 연결해 줬어요.
- 그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어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처음 사무실은 수영만 요트경기장 쪽방을 얻어 썼어요. 요즘과 같은 인터넷과 핸드폰은 전혀 없었고 팩스로 대부분의 서류를 주고받았지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해외와의 연락은 그래서 아주 어려웠어요.
- 그래서 해서 1회 영화제를 치렀다. 그때 소회는 어떠했나.
첫 영화제 마지막 날, 오석근 감독하고 있는데 대학교 때 영화동아리를 같이 했던 여학생이 한마디 툭 던지며 지나가더군요. 울산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던 그 친구가 "소원 성취했네요"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사무쳐서 그랬는지 눈물이 왈칵 나오더라구요.
사실 1회 관객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저 5만 명 정도 예상했는데 무려 18만 명이 왔잖아요. 정말 이건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성공이었죠.
김호일 선임기자 tokm@
사진은 지난 2006년 11회 영화제 당시 해운대 피프빌리지에서 행사 후 김동호 위원장과 고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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