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는 형을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입력 : 2017-05-25 19:12:51 수정 : 2017-05-26 09:5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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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주 부산대 윤리교육과 교수 부산국제영화제 포럼위원장

형께 편지 한 통 보냅니다. 나는 형이 이 편지 읽고 계실 것을 확신합니다. 어찌 이 부산국제영화제를 두고, 영화의전당 두고 저편 세계로 그렇게 훌쩍 떠나실 수 있나요. 말이 안 되는 얘기지요. 세상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오직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 수영만 요트 계류장 옛 부산국제영화제 간이사무소 부근이나 영화의 전당 어딘가를 서성이고 배회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그동안 통곡조차 원대로 할 수 없었던 형이 차마 두고 가지 못할 이것들 붙잡고 그 뜨거운 마지막 눈물들 한껏 다 쏟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이 편지를 쓰려니 나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형, 좋은 세상 왔잖아요, 형이 그토록 갈망해 마지않던 자유롭고 화평한 세상이. 이제 당신의 영원한 연인 부산국제영화제가 목에 씌워졌던 칼 벗고, 손발을 동여맨 오랏줄 풀고 석방되어 막 당신을 만나려는 순간 아니던가요. 그런 지금에 형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다이빙 벨' 상영 파문 이후 몇 년간 형의 삶은 처참하리만큼 산산조각이 나 버렸지요. 당신의 생 전부를 바쳐서 쌓아 왔던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것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내몰렸던 어느 날 저녁. 독대했던 형의 얼굴이 이 순간 생생히 머리에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수수께끼였지요. 타협파와 강경파 양쪽으로부터 온갖 비난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 영화제만은 지켜야 하고, 행사는 열려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고독하고 힘겨운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었지요. 그때 형의 얼굴에 기이한 초연함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압니다. 오늘의 이 비극을 암시하는 신호였다는 걸.

그토록 짧은 연륜 안에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의 눈부신 약진을 견인했던 것, 키아로스타미, 마흐말바프, 허우샤오셴, 차이밍량, 지아장커 등 재능 있는 감독들을 세계 영화 무대에 각인시켜 놓았던 것, 그래서 명실상부한 아시아 영화의 발언대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 등등도 순전히 아시아 영화 프로그래머였던 형 덕분이었지요.

무대 위에서는 화려하나 무대 뒤에서는 초라한 허풍쟁이들이 판치는 영화판, 찬란하지만 따스함이 없는 미소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영화판, 그 판에서 형은 도대체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지요. 은근한 열기로 사람을 따뜻하게 데워놓는 품성은 그 유가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까요. 무거운 입술로 토하는 말은 그 자체가 미리 당겨 놓은 현실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 입술로 내게 했던 약속이 있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인문학의 향기와 격조를 갖춘 영화제, 곧 언어가 있고, 개념이 있고 논리가 있는 축제로써 다른 영화제들과 차별화해 내는 것,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최상급의 담론들을 창출해 내는 영화학술 축제를 병행시키는 것 등입니다. 아아, 이제 이 모든 것들이 홀연 기약 없는 추억들로 멀어져가려 합니다.

머무르는 것과 떠나는 것이 다 무상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형이 그렇게 서둘러 떠나야 할 때가 아닙니다. 빼앗긴 들에는 봄이 올지 모르지만, 형 잃은 전당에는 영화제가 오지 않을 테니까요. 한창 부산국제영화제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을 때, 내가 청와대의 어떤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김지석이고, 김지석은 부산국제영화제"라고요. 지석 형, 이거 틀린 말 아니잖아요. 그런 영화제를 두고 어찌 그리 허망하게 떠나실 수가 있나요. 떠난다고 다 떠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형을 보내드릴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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