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 소년이 옥상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 옥상에는 소년을 때리고 옷 벗기며 모욕을 준 4명의 또래 친구들이 있었고, 조사과정에서 그들이 소년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소년은 러시아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였고, 단지 그 이유로 소년은 죽는 것보다 괴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극한 경쟁 사회가 만든 혐오 문화
성 달라도 ‘같은 인간’ 이해 노력을
15살의 또 다른 소년이 있다. 이란인 소년은 일곱 살에 한국에 왔고, 우연히 교회를 갔다 큰 위로를 얻어 개종했다. 그런데 이슬람 국가 이란은 개종 때 사형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살기 위해서 난민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년을 사지로 내몰 수 없었던 친구들은 난민 신청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학교 선생님도 적극적으로 함께 애썼고, 소년은 불가능해 보이던 난민 지위 인정을 받아냈다.
2018년 비슷한 처지에 있던 두 소년은 왜 이토록 극명하게 다른 운명에 처한 것일까. 이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친구를 죽음으로 내몬 청소년들이 반성할 기미도 없다는 기사에 소년법을 폐지하라는 여론이 들끓는다. 반면 난민 신청을 이끌어 낸 아이들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례에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하지만, 여론은 크게 관심 갖지 않는다.
쉽게 분노하지만 사랑은 부족하다. 2011년 69명을 죽인 한 테러범의 폭탄테러와 총기난사에 대한 노르웨이 사회의 대응이 떠오른다. 당시 노르웨이 총리는 피해자를 애도하는 연설에서 “우리는 증오에 사랑으로 답할 것이다”고 했고, 사회 전반적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더 주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문화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거울이다. 내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지 못한 채 그저 경쟁에서 이겨야만 하는 사회에서 혐오 문화가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중 가장 뚜렷한 것이 여자와 남자라는 구별이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폭력이 가장 두드러진 사회 문제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성으로서, 남성으로서 우리 스스로의 성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또, 우리가 같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는 얼마나 하고자 노력했는가?
이란 난민 신청을 끌어낸 중학생 아이들은 그저 친구를 살리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 지극히 평범하고도 당연한 마음이 한 소년의 생명을 살렸고, 그 소년의 세계를 구했다. 그러니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우리 모두가 이 혐오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새해에는 이 땅의 모든 소년 곁을 지키는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우리 삶의 방식이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