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미래로 100년] 11. 중국 타이항산 조선의용대

입력 : 2019-04-01 23:04:44 수정 : 2019-04-02 10:43:51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프린트

“일제에 의해 끌려나온 동포들이여… 총을 하늘로 향해 쏘시오”

조선의용대원들이 1940년대에 중국 타이항산 자락인 산시성 윈터우디 마을 입구 건물에 써 놓은 글귀가 70년 넘게 흘렀어도 뚜렷하다. 마을 사람들이 색이 바랠 때마다 다시 칠한 덕분이다. 글귀는 강제 징병돼 일본군으로 참전한 ‘조선 사람’의 탈영을 독려하는 내용이다.

중국의 ‘그랜드 캐년’으로 불리는 타이항산(太行山). 이 곳은 허베이(河北)성과 산시(山西)성에 걸쳐 있어 남북 길이만 600㎞에 달한다. 중국 베이징에서 시속 300㎞ 이상 달리는 고속철도를 타고 2시간을 간 후, 승용차로 3시간을 더 달려야 한다.

그런데 여기 자리한 작은 마을 산시성 원터우디(雲頭低) 마을 입구 주택 벽에는 한문과 한글이 섞인 각종 구호들이 적혀 있다. 이 글들은 1941~1945년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조선의용대원들이 적은 것이다.

중국 타이항산 산시성 원터우디
1941~1945년 조선의용대 활약
벽에 쓴 항일문구 여전히 선명
색 바랠 때마다 현지주민이 덧칠

밀양 출신 윤세주 中 열사릉원 묘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추앙받아

국내는 1982년에야 건국훈장
사회주의 계열 열사 조명 못받아

‘强制兵끌려나온동포들팔로군이있는곧마당조선의용군이있느니총을하랄노향하여쏘시요!’ 70년 넘게 흘렀지만 글씨가 선명하다. 벽 전면에 적힌 글은 “일제에 의해 강제병으로 끌려나온 동포들이여, 팔로군이 있는 곳마다 조선의용대가 있으니 총을 하늘로 향해 쏘시오”라고 풀이된다. 건물 오른쪽 벽으로는 ‘왜놈의上官놈들을 쏴죽이고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라고 새겨져 있다. 왼쪽에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라고 쓰였다.

이들 문구는 당시 조선의용대가 남긴 항일선전표어다. 모두 강제징병된 ‘조선사람’의 탈영을 독려하고 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어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구사할 수 있어 전쟁에 심리전을 이용했다. 한글로 써 일본군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면서 징집 조선 병사들의 애국심을 복돋우는 심리전을 벌인 셈이다.

80년 가까이 지났지만 당시 상황이 담긴 문구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유가 있다. 현지 주민들이 색이 바랠 때마다 다시 칠한 덕분이다. 한 마을 주민(61)은 “당시 조선의용대가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전쟁을 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인에게도 일본군에 함께 맞선 동지였고, 중국인들은 그 뜻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조선의용대 흔적 가득한 타이항산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전신)는 1940년대 중국에서 일본군과 정규전을 벌인 독립운동 단체다. 당시 중국 내 한국 무장 독립단체는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로 나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반면 조선의용대는 의열단 단장이던 약산 김원봉(1898~1958)이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1938년 10월 중국 정부의 임시수도인 허베이성의 한커우에서 조직했다. 그 후 조선의용대 본부는 광시성 구이린에 이어 1939년 충칭으로 옮긴다.

1941년 1월에는 김원봉의 고향 친구이자 의열단원인 윤세주(1900~1942) 열사가 일부 조선의용대원을 이끌고 타이항산으로 옮긴다. 조선의용대는 그해 12월 일본군과 최초로 교전했다.

70년이 지난 현재까지 타이항산 자락 마을 곳곳에는 당시 전투를 연상케 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 1942년 5월 윤 열사는 타이항산 자락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지만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 땅에 묻혔다. 숨질 당시 그의 나이 42살이었다.

그는 타이항산 자락의 스원(石問) 마을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ㅈㅗㅅㅓㄴㅁㅣㄴㅈㅗㄱㅇㅕㅇㄹㅕㅇ’이라고 자음·모음을 풀어쓴 한글이 선명하다. 자음과 모음을 합해보면 ‘조선민족영령’이 완성된다. 또 묘비 정면에는 한자로 ‘조선혁명열사 석정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그는 일본군과 최전선에서 싸우며 ‘조선의용대의 영혼’으로 불릴 정도였으며, 중국인 사이에도 영웅이었다. 경남 밀양 출신인 그는 19살 때 경성에서 3·1 만세운동을 하고, 그 달 13일 고향으로 와 밀양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일제 경찰에 쫓기다 중국으로 망명했고, 그해 11월 10일 길림성에서 김원봉과 의열단을 창단했다. 그 후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6년 7개월 22일동안 옥고를 치렀다.

다시 망명한 윤 열사는 조선의용대 창설에 동참했다. 그의 묘지 옆에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을 지낸 진광화(1911~1942) 열사도 잠들어 있다. 진 열사는 숭덕중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 포위망이 좁혀져오자 중국 남경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중국서 더 추앙받는 조선의용대

일본군은 1942년 5월 병력 40만 명을 동원해 타이항산 일대 조선의용대와 중국 팔로군을 공격했다. 윤세주·진광화 열사 등 20여 명도 그때 목숨을 잃었다.

타이항산 자락에 조성됐던 두 열사의 묘는 1950년 허베이성 한단(邯鄲)시 국립묘소인 진지루위(晋冀魯豫) 열사릉원에 이장됐다. 열사릉원에는 일본과 전투를 벌였던 중국 팔로군의 연대장급 이상 열사 200명이 모셔져 있다. 이 중 한국인은 윤세주·진광화 열사 두 명 뿐이다. 이방인이지만 자신들의 국립묘소에 모신다는 건 이들의 항일투쟁정신을 추앙한다는 의미다.

한단시는 2004년 조선의용대의 항일투쟁활동을 기리기 위해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묘를 처음 쓴 초장지가 있는 서원마을 뒤편에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도 건립했다. 기념관에는 윤세주·진광화 열사를 비롯해 김사량(1914~1950), 정율성(1914~1976), 김학철(1916~2001), 이원대(1911~1943) 열사 활약상도 소개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한국과 중국 젊은이들이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해 장렬하게 자신을 희생한 곳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처럼 중국은 조선의용대의 활약상과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 정부는 윤 열사가 사회주의 계열이었다는 이유로 1982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진 열사도 같은 이유로 1993년에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밀양 독립운동가 연구자인 손정태(73) 밀양문화원장은 “조선의용대는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벌인 독자적인 무장세력이었지만,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그들의 정신과 활동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지 꼭 100주년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몸과 마음을 바친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해방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의 전장터에서 영면에 들었다. 무명 용사를 비롯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들이 수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지난 100년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그들을 이제부터라도 기억해야 한다.

허베이성/글·사진=김길수 기자

kks66@busan.com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부산온나배너
영상제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