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낮시간에 틈틈이 짬을 내 부산 동구 초량·수정·좌천동 일대 산복도로(山腹道路)를 따라 걸었다. 하늘과 더 가까운 고지대 산복도로에서 포근해진 기온을 느끼고 겨우내 추위와 코로나19에 잔뜩 움츠렸던 몸을 풀며 봄 마중을 한 셈이다. 산복도로 인근 산지에서 매화가 활짝 피어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봄의 전령사라는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산복도로 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진 원도심 시가지와 바다를 내려다보는 건 덤으로 만끽한 즐거움이었다. 걷느라 다리가 아픈 것을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았다.
부산시가 지난 16일부터 시 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cooolbusan)에 올리고 있는, 중·동·서·영도구 일원 원도심의 문화유산을 돌아보는 ‘원도심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답사기를 우연히 본 것이 계기가 됐다. 매주 2편씩 연재되는 총 8편의 주제 가운데 첫날 올려진 ‘초량동 산복도로’ 편을 읽고는 직접 현장을 찾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것이다.
봄을 재촉하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산복도로를 걸으며, 이 교통 시설의 가치와 역사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때때로 산복도로변 주택가에서 미로 같은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가거나 경사가 심한 계단을 통해 헉헉대며 산동네 끝까지 올라가 그곳 사람들의 삶을 미루어 짐작해 보기도 했다. 짧은 시간에 극히 일부 지역 산복도로를 주마간산하듯 지나쳤지만, 서민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부산의 산복도로는 ‘옥상 주차장’과 ‘옥상 카페’를 비롯한 특유의 문화가 존재해 어쩌면 부산의 여러 정체성 중 하나를 보여 주는 소중한 공간일 수 있다는 걸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산복도로의 도시, 그리고 중복도로
산복도로의 사전적 의미는 ‘산중턱을 깎아 만든 도로’이다.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부산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특수하게 발달한 교통 환경이 아닐 수 없다. 부산은 고지대에 형성된 주거지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중·동·서·영도구 등 원도심은 물론 부산진구와 북·사상·연제·동래·해운대구 등지 고지대 곳곳에도 산복도로가 조성돼 시내버스가 달리고 있다. 부산을 ‘산복도로의 도시’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산복도로는 가파른 산의 허리를 지나는 탓에 대부분 도로 폭이 12~15m의 왕복 2차로 규모로 좁은 게 흠이다. 산복도로는 1964년 10월 20일 초량동에서 처음 개통된 뒤 개설 구간이 조금씩 늘어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안에 가까운 지점까지 산지가 발달한 원도심의 경우 산복도로보다 더 높은 곳의 주택가에 중복도로가 많이 개설돼 산복도로와 만난다. 중복도로는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다. 역시 중턱에 놓인 도로여서일까? 아니면 산복도로 같은 도로가 중복된다는 뜻일까? 중복도로의 어원이 궁금해진다. 이 도로는 산복도로에 비해 더욱 좁아 중앙선 없이 차량 2대가 힘들게 교행이 가능할 정도다. 여기에는 크기가 작은 마을버스가 운행돼 고지대 주민들의 발 구실을 하고 있다. 부산 지역 산복도로 중 서구 서대신동 교차로에서 중구, 동구를 거쳐 부산진구 범천동 범천시장에 이르는 9.8km 구간 도로명을 ‘망양로(望洋路)’라고 한다. 부산항 북항과 남항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치 좋은 길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로 치솟은 계단길과 모노레일
원도심 고지대에 자리 잡은 주택가를 대표하는 생활 시설로 산복도로와 계단길을 꼽을 수 있다. 산복도로와 중복도로가 각 동네를 연결하는 대동맥, 골목길이 이웃 간을 이어주는 실핏줄이라면, 수직으로 놓인 계단길은 그 중간 기능을 하는 셈이다. 일제강점기에 부산항 부두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찾아 부산에 온 외지인들이 경사진 산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산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곳에 광복 후 부산항으로 귀국한 동포들과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몰리자 더 위쪽 산지에 판자촌이 속속 들어선 것이 지금의 산복·중복도로 일대 주택가의 기원이다. 게다가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에 부산으로 대거 유입된 인구가 가난했던 산동네에 주로 정착하면서 고지대 주택가가 팽창해 활기마저 띠게 된다.
이 바람에 직장과 일거리가 있는 저지대 중심가로 접근성을 높이고 여러 곳의 산동네를 잇기 위해 산복도로가 필요했다. 또 거리가 짧은 고지대와 저지대를 보다 수월하게 걸어 다닐 목적으로 수많은 곳에 크고 작은 계단길이 생겨났다. 경사가 심한 비탈길보다는 한 층씩 오르내리는 계단이 한결 편리하고 덜 위험했으리라. 그런데 밑에서 올려다보면 곧바로 하늘로 치솟은 듯한 가파른 계단이 부지기수다. 하늘을 향해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을 숨차게 오르고 또 오르며, 하루에만도 수차례 오르내렸을 산동네 서민들. 이들의 실생활은 높은 곳에 사는 것과 달리 하루하루가 팍팍한 밑바닥이었지 싶다. 삭막한 콘크리트 계단이 보기조차 싫었던 것일까? 바닥에 아름다운 꽃이나 풍경이 그려진 계단길도 눈에 띄어 동네 구경을 하기가 심심하진 않다. 이 지역에 정착하거나 거쳐 가면서 우리나라 경제 성장과 부산 발전에 일조한 인생 선배들의 고단했던 삶의 발자국이 계단 층계마다 선명하게 느껴진다.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한 고지대는 전반적으로 도시 개발과 확장 과정에서 소외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한 데다 저소득층 밀집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좁고 가파른 계단길과 비탈길을 이용하기란 여간 고역이 아닐 테다. 그래서 위험한 계단 이용이 잦은 지역의 주민들에게 유용한 이동 수단으로 등장한 게 바로 모노레일이다. 2014년 중구 영주동 부산디지털고 옆 가파르기로 악명을 떨치던 114계단 인근에 설치된 모노레일이 최초다. 이어 2016년 초량동 168계단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은 전국적인 관광지로 유명해졌다. 같은 해 좌천동 산복도로에도 증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경사형 승강기 형태의 모노레일이 운행되고 있다. 모두 지역민 편의를 위해 무료로 운영되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도 이어진다. 간혹 오작동 사고가 일어나 말썽이 되고 있어 철저한 관리와 안전 대책이 필요하다.
■30년 역사의 옥상 주차장 갖춘 주택 문화
산복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저지대 방향 도로변 건물 옥상에 주차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영업 중인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옥상 주차장이다. 산복도로 바로 밑 주택의 옥상 바닥 높이를 노면과 일치되게 만들어 도로와 연결한 뒤 주차장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주차 공간이 태부족한 고지대 주택가의 주차난을 완화하고 좁은 도로의 불법 주정차를 줄일 수 있는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든다. 생활의 지혜가 물씬 풍기는 옥상 주차장 건물은 부산의 산복도로 지역만이 가진 독특한 건축 양식이자 참신하고 획기적인 교통 문화라고 하겠다.
1~3대의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집의 옥상 주차장이 있는가 하면 차량 여러 대에서 20여 대까지 주차 가능한 연립주택이나 대형 건물의 옥상 주차장도 있다. 동구 지역 유료 옥상 주차장은 규모나 시설 수준에 따라 시간당 2000~3000원, 월 4만~6만 원가량의 주차료를 받는다. 코로나19 사태 발생 이전에 관광객들이 몰렸던 초량동 ‘초량 이바구길’ 위쪽 한 옥상 주차장은 관광객 차량 덕분에 수입이 짭짤했다고 한다. 옥상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건물을 증·개축하거나 신축할 때 붕괴 위험 방지를 위한 안전도 강화와 차량 추락을 막는 난간 등 안전시설 설치는 필수적이다. 산복도로변 옥상 주차장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께 소규모로 하나둘 생기더니 1990년대 중반 각 구청이 고지대의 극심한 주차난 해소를 위해 장려하면서 크게 증가했다. 결코 짧지만은 않은 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주택 문화이다.
■화분·물통 활용해 채소 키우는 텃밭
지은 지 오래돼 낡아 가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 산복도로 인근 주택가 골목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니 집집마다 문 옆이나 담벼락에 다양한 크기의 화분이나 고무 물통 몇 개씩을 내놓고 있다. 그냥 용도 그대로의 화분과 물통이 아니다. 여기에 흙을 담아 물과 거름을 주고 관리하며 채소류를 재배하는 미니 텃밭으로 활용하는 게다. 하얀 스티로폼 박스를 활용한 것도 있다. 아직은 겨울 기운이 남아서 그런지 대부분 화분과 물통에는 흙만 가득하지만, 일부에는 부추나 무, 대파가 자라는 장면도 보인다.
부산 지역 산복도로 주변 주택가는 독거노인을 포함해 노령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것이 특징이다. 평소 화분과 물통에 상추와 배추, 파, 고추, 토마토 같은 야채류를 가꾸는 것이 이들의 소일거리다. 몇 가지 반찬거리는 힘들게 동네를 오르내리며 마트나 슈퍼를 찾지 않아도 집에서 바로 조달할 수 있으니 많은 가정에서 화분이나 물통에다 채소를 키우는 걸 선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더욱이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생활비를 한 푼이라도 아낄 수 있어서다. 수정2동에서 만난 어느 80대 할머니는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큰 물통에 텃밭을 가꾸고 적게 쓰면서 만족하게 살다 보니 건강하고 행복하다”라며 웃었다.
■침해받는 산복도로 일대 조망권
바다를 바라본다는 망양로가 그러하듯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지와 부산항 야경은 일품이다. 낮에도 여기에서 보이는 원도심과 바다 풍광에 눈이 시원해진다. 완연한 봄에는 산복도로 양쪽에 벚꽃 터널을 이루는 데가 많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산복도로 주변 많은 곳에서 탁 트인 경관을 확보하고 스카이라인(건물과 하늘이 만나는 지점을 연결한 선)을 유지하기 위해 높은 건물을 건립하지 못하도록 고도제한이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부산시가 산복도로 주변에 산재한 문화유산과 빼어난 경관을 활용해 ‘만디’(산 정상이나 언덕의 정상을 가리키는 경상도 사투리) 지역의 산복도로를 달리는 ‘만디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산복도로 일부 구간은 부산관광공사의 시티투어 버스 운행 노선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그런 반면에 중·동구 산복도로에서 사방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지역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몹시 아쉽다. 북항 재개발 사업 지역과 중앙대로변, 저지대 주택가의 재개발·재건축 사업지에서 수십층짜리 초고층 빌딩과 고층 아파트가 잇따라 들어서고 있는 까닭이다. 저지대에서 우후죽순 치솟고 있는 고층 건물의 비상 행렬이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과 바다, 부산항대교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려 버린다. 그동안 산복도로 일대 고지대 주민들이 누렸던 조망권을 머잖아 완전히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지역 서민층의 고달픈 삶을 위로해 주는 벗이자 일상의 낙이었던 ‘오션 뷰’가 자본의 힘에 밀려 사라질 판국이다. 이에 따라 부산시가 무분별한 고층 건물 개발로 공공재인 도시 경관 조망권이 사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근 지역별 높이 관리기준을 수립하고 있어 최종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주목된다.
■원도심 재생사업… 산복도로 르네상스
지금까지 산복도로 일대 고지대의 주거 환경 개선사업이 없었던 건 아니다. 경제 성장으로 국민 소득이 높아지면서 산동네 많은 지역에서 주택 개보수와 신축이 이뤄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돈이 없어 집을 리모델링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부산을 떠나거나 아파트 등지로 옮겨 가는 주민들이 증가하면서 인구 감소와 더불어 빈집이 늘어 낙후되고 있는 게 산동네가 처한 현실이다. 장기간 비어 방치되고 있는 노후 주택과 어두운 골목이 많아 자칫 우범지대가 될 것이 걱정된다. 부산의 공공 기관단체나 주요 기관을 산복도로 주변으로 옮긴다면, 지역을 활성화하고 산동네의 가치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전망이 좋은 곳에 건물을 새로 짓거나 이곳에 위치한 집을 리모델링해 커피와 각종 음료를 판매하는 카페도 속속 등장하고 있어 지역 발전에 고무적이다. 전망이 좋은 옥상까지 카페 공간으로 활용해 젊은이들한테서 인기를 얻는 업소가 있을 정도다. 지난 18일, 19일 부산의 모 콘텐츠 제작사가 영주동 산복도로를 배경으로 촬영·제작한 옴니버스 드라마 ‘심야 카페’ 시즌 2와 3가 MBC 드라마넷과 KT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서 방영돼 산복도로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다. 이 드라마는 자정부터 해 뜰 때까지 영업하는 한 산복도로 심야 카페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벌어지는 일을 그린 판타지로, 치유와 성장을 테마로 한 청춘물이라고 한다.
2011~2020년 부산시와 일선 구청이 산복도로변 주택가 곳곳에서 시행한 주민 참여형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사업으로 산복도로 일대는 아련한 부산의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방인들을 포용한 개방적 도시인 부산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장소로 재조명을 받고 있다. 서민층 삶과 주거 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체험이나 관광 자원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도시재생 사업이 벌어졌던 것이다. 토착민을 내쫓는 무분별한 재건축·재개발이 아니라, 마을 고유의 환경에 문화·예술·경제를 접목함으로써 지역을 활성화하고 이웃 간 커뮤니티도 강화해 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시도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물론 지역민과 관광객 모두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할 것이다. 오늘도, 이 순간에도 숨을 헐떡거리며 계단을 오르고 있을 산복도로변 서민들의 생활이 행복하고 살림이 훨씬 나아졌으면 좋겠다. 다른 곳보다 산복도로에 더 빨리 오고 있는 희망의 봄처럼….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