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베르사유 궁전에 흐르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랑

입력 : 2022-01-07 11:44:43 수정 : 2022-01-07 11: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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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학 기행-프랑스] 베르사유 궁전(2)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

■호프부르크의 마리아 앙투앙


“응~애, 응~애.”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음성이 작고 귀여운 걸로 보아 여자 아기가 태어난 모양이었다. 1755년 11월 2일 밤 8시 30분의 일이었다.

아기를 낳은 여성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걸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였다. 태어난 아기는 그녀의 열다섯 번째 자녀이자 막내딸인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안나였다. 19년 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아기였다. 가족은 그녀를 앙투앙이라고 불렀다. 당시 오스트리아 왕가에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모든 딸의 이름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디크루.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디크루.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린 자식들을 돌보기에는 너무 바빴다. 여름에는 새벽 4시, 겨울에는 6시에 일어나 하루 일정을 시작해 거의 자정이 다 돼서야 마칠 정도였다. 앙투앙은 태어나자마자 다른 오빠, 언니들처럼 어머니의 품을 떠나 유모에게 넘겨졌다. 그녀는 첫 겨울을 호프부르크 궁전의 육아실에서 보냈다. 유모는 고위관리의 부인인 콘스탄스 베버였다. 앙투앙은 베버를 무척 좋아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프랑스에 시집을 가서도 베버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앙투앙이 세 살이 될 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가족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공식 무대에 데뷔한 것은 세 살이던 1759년 아버지 프란츠 스테판 국왕의 생일 축하 파티에서였다. 부모는 물론 귀족, 왕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앙투앙은 프랑스어로 축하 노래를 불렀다. 다른 형제들은 악기를 연주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 궁정의 분위기는 격식에 별로 얽매이지 않고 느슨한 편이었다.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의 영향이 컸다. 남편을 정말 사랑했던, 그래서 아이들을 열여섯 명이나 낳은 마리아 테레지아도 이런 부분에서는 남편의 뜻을 존중했다.

앙투앙은 다른 형제들처럼 아버지를 좋아했다. 프란츠 요제프는 국왕이면서 국정은 부인에게 모두 떠맡기고 한량처럼 편안하게 살았다. 그는 딸들에게 자신의 유전자적 기질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식물과 꽃, 그리고 정원을 좋아하고 가꾸는 성격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봤다. 머니는 정말 대단한 정치가이면서 무서운 여걸이었다. 앙투앙은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를 정말 사랑합니다. 그러면서도 매우 무서워합니다. 심지어 먼 거리에서 보더라도 가슴이 콩콩 뛴답니다. 어머니에게 편지를 쓸 때면 마음이 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호프부르크 궁전. 호프부르크 궁전.

앙투앙의 형제들은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자신들끼리, 혹은 다른 귀족이나 왕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극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했다. 겨울에는 호프부르크 궁전 정원에 나가 썰매를 탔다. 썰매를 즐긴 뒤에는 깔깔거리며 따뜻한 초콜릿을 나눠 마셨다.

아이들은 여름이면 호프부르크 궁전을 떠나 쇤브룬 궁전에 가서 무더위를 피했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물놀이도 했다. 도시락을 싸 들고 궁전 여러 분수를 돌아다니며 소풍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이들에게 이른바 ‘평범한’ 어린이들과도 함께 놀라고 했다. 물론 그녀가 말한 평범한 어린이들이란 평민이 아니라 귀족의 자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1762년 앙투앙이 여섯 살 때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음악 연주회가 열렸다. 공연자는 당시 천재 꼬마 음악가로 칭송받던 모차르트였다. 연주를 마치고 돌아 나오던 모차르트는 마루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앙투앙은 쪼르르 달려가 동갑내기인 모차르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고는 뺨에 입을 맞추었다. 모차르트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좌중에서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는 정말 친절하구나. 나중에 너랑 결혼하고 싶어!”

앙투앙의 형제들은 대체로 매우 친밀했다. 물론 형제 사이에 시기와 질투가 없지는 않았다. 앙투앙과 언니들은 넷째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약간 질투했다. 어머니가 그녀를 가장 좋아했고, 게다가 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정략결혼을 하지 않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앙투앙은 특히 세 살 많은 언니 샬럿과 매우 친했다. 둘 다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다. 남들이 볼 때는 마치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샬럿은 1768년 열여섯 살 때 나폴리 국왕과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 그녀는 동생에게 수시로 편지를 써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나와 똑같은 너의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속으로 짊어져야 하는 엄청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 줘야 하는 의무감을 느낀단다.’

부모는 너무 바빠 앙투앙의 교육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 그들은 브란데이스 공작부인에게 딸의 교육을 맡겼다. 문제는 공작부인이 그다지 책임감이 강하거나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부모도 그 점을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국정 때문에, 아버지는 사생활 때문에 너무 바빴다. 게다가 부모는 막내딸인 앙투앙을 귀엽게만 보았지 엄격하게 교육시킬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앙투앙의 언니 마리아 캐롤리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 중 하나를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루이 왕세자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원래 마리아 캐롤리나가 신붓감이었지만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뜨는 바람에 앙투앙이 대체자로 떠올랐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들을 사랑했지만, 국가의 운명 때문에 할 수 없이 ‘외교 장기판의 말’ 같은 존재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앙투앙은 늘 상대에게 밝은 미소를 보여주는 게 특징이었다. 그래서 당시 오스트리아 빈 주재 프랑스 대사는 그녀를 ‘우아한 매력 덩어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영향 덕인지 앙투앙이 루이 14세의 손자와 결혼할 대상자로 떠오르자 프랑스 측에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앙투앙은 춤을 잘 췄고, 자수를 좋아했으며, 하프 연주를 즐겨 했다. 하지만 프랑스어를 읽거나 쓸 줄도 몰랐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결혼식까지는 2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루이 14세에게 좋은 가정교사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루이 14세는 애비 드 버몽이라는 교사를 빈으로 보냈다. 버몽은 다소 우둔하고 학습지진아 상태였던 앙투앙을 똑똑한 숙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친구에게 이렇게 밝혔다.

“앙투앙이 사물을 심도 있게 분석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네.”

앙투앙의 얼굴은 예쁘고 피부는 밝은 핑크빛이었다. 늘 발랄하고 표정이 밝아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외모였다. 하지만 치아가 문제였다. 전혀 가지런하지 않고 울퉁불퉁했던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나는 프랑스의 치과의사를 빈으로 불렀다. 의사는 앙투앙에게 치아교정기를 착용하게 했다. 결혼식 직전까지 교정기를 쓴 덕분에 그녀의 치아는 가지런해졌다.

마지막 문제는 헤어 스타일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금발이었지만 그다지 질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제대로 관리를 못해 깔끔하지도 않았다. 이마도 앞으로 툭 튀어나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역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미용사를 불러 문제를 해결했다.

앙투앙은 외양적으로는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될 준비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대 최고의 화가를 불러 앙투앙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프랑스 파리로 보냈다. 루이 14세는 손자며느리의 초상화를 보고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다.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프랑스 파리 외곽 베르사유 궁전으로 떠나는 앙투앙을 위해 1770년 4월 19일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이틀 뒤 그녀는 어머니와 형제들, 친구,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황금과 크리스탈로 장식한 마차에 올라 오스트리아 빈을 떠났다. 이것이 빈에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주일 뒤 앙투앙, 즉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안나를 태운 마차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었다. 그녀는 월경한 직후 오스트리아에서 입고 온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프랑스 왕실에서 보내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렸다. 그녀는 은색과 흰색 바탕에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남편 루이 왕세자와 함께 ‘거울의 방’을 지나 왕립 예배당으로 들어가 결혼식 미사를 올렸다.

열다섯 살이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식 디너파티에서 한 살 많은 남편 루이 왕세자와 실수 없이 춤을 추었다. 춤을 좋아하던 그녀에게 댄스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16가지 코스로 마련된 결혼식의 음식은 매우 화려했다. 다만 음식 유형이 오스트리아와는 너무 달랐다. 미식가인 루이 왕세자는 음식을 즐겼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입맛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파티를 마친 뒤 오스트리아에서 따라온 시녀에게 디저트를 가져오라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빵이던 크로아상이 프랑스에 퍼지는 순간이었다.


■베르사유의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700개의 방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바로 ‘여왕의 침실’이다. 이 방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개인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곳 한쪽 구석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덮개가 씌워진 침대가, 침대 옆 벽감에는 자개를 박아 넣은 초대형 보석함이 놓여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침대에서 일어나면 여러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꽉 조이는 코르셋을 입고, 구름처럼 짙은 화장품을 바르고, 짙은 냄새를 풍기는 향수를 뿌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사치욕이 얼마나 심했던지 ‘결핍 부인’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그의 사치욕은 일상생활에서의 의상을 넘어 침대에까지 이어졌다. 1783년에 나온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에 대한 역사적 소고』라는 소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생에서는 항상 방탕과 혼란이 따라다녔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대혁명 발생 이전 ‘여왕의 침실’에서 살 때 일어난 일들은 비밀에 싸여 있다. 비밀이 많으면 소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우도 그렇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그녀를 둘러싼 스캔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사실일 수도 있고, 그녀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기 위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


베르사유 궁전 여왕의 침실. 베르사유 궁전 여왕의 침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종종 침실에서 연애편지를 썼다. 물론 루이 16세에게 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와 시녀들 및 젊은 공작부인들 사이에 동성애 소문도 적지 않게 나돌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스캔들의 하이라이트는 스웨덴 출신인 악셀 폰 페르센 백작과의 관계였다. 베르사유 궁전의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이와 관련한 글이 실려 있을 정도다. 홈페이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많은 의혹의 주제였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소문을 지속시킬 만큼 많은 의혹이 존재한다.’

두 사람은 177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가면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페르센 백작은 5년 뒤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사했다. 그는 여동생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녀에게 의지할 수 없어. 그래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기로 한 거야.’

2016년 <나는 당신을 미친 듯 사랑해요>라는 책을 쓴 역사학자 에벌린 파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비밀 편지들에 집중한다. 이 편지들 중에서 상당수는 암호로 적혀 있거나 보이지 않는 잉크로 적혀 있다. 페르센은 1791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쓴 편지에서 사랑을 고백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나의 신이여!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나는 단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살고 존재합니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나의 유일한 위안이랍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2년 편지를 통해 사랑의 답장을 보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여! 당신을 미친 듯 사랑해요. 단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존재한 순간이 없었다는 말을 당신에게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죽기 직전 페르센 백작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콩시에르주리에 갇혀 있을 때였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라 목이 잘리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편지는 그녀가 죽고 18개월 후에 백작에게 전달됐다. 편지는 딱 한 줄이었다.

‘안녕! 나의 가슴은 언제나 당신 것이에요.’


페르센 백작. 브레다 페르센 백작. 브레다

이처럼 간절한 사연을 담은 편지들이 남아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진실한 관계가 무엇이었는지를 놓고 엇갈린 주장을 한다. 일부는 ‘플라토닉 러브’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진정으로 서로 사랑했다’고 반박한다. 어떤 학자들은 ‘두 사람이 사랑했지만 성적 관계를 가지지는 못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랑스 역사학자 패니 코산디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잘라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는데 여왕의 침실에서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에벌린 파는 책에서 다르게 주장한다.

‘여왕의 네 아이 중 소피와 루이 샤를은 왕이 아니라 페르센 백작이 아버지였다. 마리 앙투아네트 침실에 있는 비밀의 방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린 채 둘은 아무도 모르게 만날 수 있었다.’

에벌린 파는 페르센 백작의 친구인 퀸틴 크라퍼드가 프랑스 왕가 가족의 탈출을 도와달라면서 영국의 윌리엄 피트 총리와 그렌빌 외무장관에게 쓴 편지를 보여준다.

‘저는 페르센을 개인적으로 잘 압니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명예롭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스웨덴 사람이며 여왕이 가장 아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현재 왕세자의 아버지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스캔들의 두 번째 하이라이트는 랑발 대공부인과 폴리냑 공작부인이었다. 그녀와 두 여인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 이상 사이였다는 게 당시 프랑스 상류사회에 퍼져 있었던 소문이었다.

랑발 대공부인은 결혼 직후 남편이 성병으로 죽는 바람에 미망인이 되고 말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절친한 사이가 된 랑발을 그녀의 가사를 돌보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당연히 궁에서 오래 근무했던 다른 궁녀들은 이에 불만을 갖게 됐다.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랑방을 ‘몽셔 콰르(mon cher cœur)’, 영어로는 ‘마이 디어 하트(my dear hear)’라고 불렀다. 여자 친구 사이의 호칭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낯간지러운 표현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 파견도 있던 오스트리아 대사는 고국에 보낸 편지에 둘의 관계를 담았다.

‘여왕은 지속적으로 랑발 대공부인을 침실로 불러들인다. 가끔 여왕에게 ‘랑발 부인에 대한 친절과 호의가 때로는 지나치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두 사람이 보였던 스킨십이 18세기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랑발 대공부인이 동성애였다는 소문을 일축하기도 한다.

랑발 대공부인은 나중에는 폴리냑 공작부인에게 밀려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호의를 잃고 말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공작부인을 1775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처음 만났다. 기록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계속 호의적 감정을 표시했다. 그리고 궁전으로 이사하라고 권유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냑 공작부인의 로맨틱한 관계는 2012년 브누와 자코 감독이 만든 영화 ‘페어웰, 마이 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다이앤 크루거)는 시녀 시도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자에게 마음이 끌려 본 적 있니? 눈에 보이지 않으면 괴로울 정도로. 몇 시간이고 그 모습을 상상해. 그 갸름한 턱과, 그 부드러운 피부와, 빛나는 눈빛을.”

물론 영화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시도나(폴리냑 공작부인을 상징하는 인물)의 성적 관계를 애매모호하게 표현한다. 대신 둘의 친밀한 우정에 집중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다른 스캔들의 주인공은 남편인 루이 16세의 동생 샤를 6세였다. 그녀가 시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청년 시절부터 성기능 장애로 고통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부부 관계는 아주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7년이 지나도록 합방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성적으로 굶주려 있었다고 분석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성적 갈증을 남편의 동생에게서 풀었다는 게 스캔들의 내용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를 놓고 지금도 사람들의 의견은 양분돼 있다. 책, 블로그 포스트, 영화 등을 보면 일부에서는 그녀를 무자비하고 방탕한 탕녀로 묘사한다. 반면 반대쪽에는 순결하고 비극적이고 아주 깊숙이 오해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진 것은 프랑스대혁명 때였다. 프랑스대혁명 발발 직전 혁명세력들은 각종 소책자나 연극 등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졌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프랑스대혁명이 터지고 왕가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에는 이런 소문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온라인 도서관에는 랑발 대공부인 팔에 안겨 누워있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린 만화 등을 보관하고 있다. 물론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분석한다.

“이런 소책자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도덕적으로 파산한 인물로 그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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