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비 대신 이야기를 받는 산복빨래방입니다 [산복빨래방] EP1.

입력 : 2022-05-17 19:29:33 수정 : 2022-11-22 15: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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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산복빨래방은 부산 근현대사의 질곡을 담은 산복도로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이웃들의 이야기를 듣는 공간입니다. 저희 자그마한 빨래방이 주민들의 '소통 공간'이자 '힐링 공간'이 되는 게 목표이자 바람입니다. 부산만이 가진 '부산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하겠습니다.


지난 9일 산복빨래방이 문을 열었습니다.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빨래방 앞 계단을 오르내려 찾아온 어머님들, 매일매일 장사가 잘되느냐며 빨랫감 없이도 찾아오는 아버님들. 많은 주민이 ‘아들, 딸, 손자, 손녀’가 운영하는 산복빨래방을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다녀가고 계십니다.


빨래방을 찾아와주시는 어머님들은 저희를 손자나 자식처럼 대해주세요. '밥은 먹었나?' 라며 항상 저희 밥을 챙기십니다. 빨래방을 찾아와주시는 어머님들은 저희를 손자나 자식처럼 대해주세요. '밥은 먹었나?' 라며 항상 저희 밥을 챙기십니다.

“문을 열었으면 개업식을 해야 한다”는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조촐한 개업식도 했습니다. 아주 다행히 많은 분이 개업식에 찾아와 저희가 마을 주민이 된 걸 환영해 주셨습니다. 개업식에는 풍악이 있어야 한다며 빨래방을 무대 삼아 흥겨운 춤사위를 보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무려 140여 명의 주민이 6평 남짓한 이 작은 공간에 발걸음해 주셨습니다. 첫날부터 큰 이불, 패딩, 담요 할 것 없이 빨랫감을 이고 지고 찾아와 주신 주민도 20여 명에 달했습니다. 아무도 안 찾아주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기우가 되고 있습니다.(몰려든 빨래로 빨래방 한쪽에는 두툼한 이불 더미가 쌓이고 있습니다.) 혹시 흔한 말로 ‘개업발’은 아니겠죠? 많은 빨래만큼 1주일째 어머님, 아버님들이 마실 삼아 빨래방을 찾아와 주시고 계십니다. 산복빨래방을 찾아오신 어머님 아버님들의 재치 넘치고 진솔한 이야기는 차차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개업식은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서로 웃고 떠들고 안부를 물으며 개업식은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서로 웃고 떠들고 안부를 물으며 "개업 한번 제대로 했다"는 칭찬도 들었습니다. 후훗.

산복빨래방은 까마득히 높은 180개의 계단과 마을 슈퍼 앞 63칸의 가파른 계단 사이 ‘계세권’에 있습니다. 당연히 차로는 바로 올 수가 없습니다. 큰길에서 빨래방에 오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이용해야 합니다.(몇 주째 이곳을 오르내리지만 아직 호흡은 정돈이 안 됩니다.)

이곳은 부산 부산진구 범천동 산복도로에 있는 호천마을입니다.

“왜 여기에 빨래방을 차렸어요?” 하루에 몇 번씩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외지고 가파른 곳에 빨래방을 차린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바로 산복도로라는 매우 매력적인 장소 때문입니다. 산복도로는 산 중턱을 지나는 도로라는 뜻입니다. 부산에는 도심 가운데에 높은 산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 많은 부산 시민이 이 산 중턱에 모여 살았습니다. 시대별로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는 전국에서 피란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피란민들은 산 중턱에 판잣집을 지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산업화 시기 산복도로에는 노동자들이 모였습니다. 신발공장, 염색공장, 고무공장에 다니는 주민들에게 이곳은 일종의 직주근접이 되는 주거단지였습니다. 그렇게 50년, 피란민과 노동자들의 자식은 도시로 출가하고 마을에는 그 시대를 짊어졌던 주인공들만 남았습니다.


하나, 둘 빨래가 쌓였습니다. 이불, 담요, 카페트 같은 집에서 빨기 어려운 빨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나, 둘 빨래가 쌓였습니다. 이불, 담요, 카페트 같은 집에서 빨기 어려운 빨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부산의 근현대사를 굽이굽이 품어온 산복도로는 후대 부산에는 숙제 같은 곳이 됐습니다. 보존, 개발과 같은 현실적 고민부터 어떻게 산복도로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하는지도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정부가 2010년대 예산 수백억 원을 투입해 산복도로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현대식 시설이 산복도로에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마을 복지관, 마을 커뮤니티센터 같은 시설들입니다.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의 현대화가 추진되기도 했습니다. 집 고치기, 벽화 그리기 같은 것들이요. 하지만 번듯하게 지어 놓은 시설은 이용객은 없었고 ‘흉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령화된 주민들이 원하는 시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산을 받은 마을과 받지 않은 마을 간에는 묘한 격차도 생겨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예스러운 분위기와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관광지이자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드라마에 나온 산복도로는 관광객에게는 야경 명소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빨래방이 있는 호천마을도 2016년 한 드라마에 나온 뒤 관광객이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짙은 근현대사의 ‘살아 있는 장소’가 아니라 ‘드라마 찍은 관광지’라는 인식 속에 사진만 찰칵 찍고 가는 관광객이 늘어났습니다. 주민들의 삶은 오히려 더 힘들어졌습니다. 외지인이 보내온 산복도로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는 주민들에게 짙은 그림자만 남겼습니다.


까마득히 높은 마을의 180계단. 며칠째 계단을 오르내려도 호흡은 정돈되지 않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여기 어떻게 다니셨어요? 까마득히 높은 마을의 180계단. 며칠째 계단을 오르내려도 호흡은 정돈되지 않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여기 어떻게 다니셨어요?

올 1월, 빨래방이 있는 호천마을을 처음 찾았을 때 일입니다. 아름다운 경치와 풍광에 감탄하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다가왔습니다. “저리로 가서 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된다 학생.” 무슨 말일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할머니가 알려주신 길 끝에는 드라마에 나온 번듯한 건물이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 보기 힘든 마을에 찾아오는 젊은이는 모두 관광객이고 대부분 촬영지를 찾아가더라’는 경험이 작용한 안내였다고 여겨집니다.


아, 잘생겼다. 박서준이 살던 마을에 엉겁결에 같이 살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박서준이 그랬답니다. '사고치니까 청춘이다' 아, 잘생겼다. 박서준이 살던 마을에 엉겁결에 같이 살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박서준이 그랬답니다. '사고치니까 청춘이다'

세월이 흘러 마을은 평균 연령 73세의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곳이 됐습니다. “60대는 우리 마을에서는 각시, 총각이다”는 자조 섞인 농담도 나옵니다. 이런 마을에서 산복빨래방은 세탁비 대신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세탁비로 받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언젠가 찾아올 산복도로의 마지막을 ‘진짜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그냥 마을에서 웃고 떠들며 옛날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경청하고 싶습니다. 산복빨래방을 찾아주시는 현대사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우리네 이야기일 테고 부산의 진짜 이야기일 테니까요.


많은 관광객들이 드라마 촬영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갑니다. 산복빨래방은 주민들의 '드라마 같은 삶'에 관심을 더 가져보려 합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드라마 촬영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갑니다. 산복빨래방은 주민들의 '드라마 같은 삶'에 관심을 더 가져보려 합니다.

*P.S 산복빨래방은 마을의 유일한 시내버스인 87번 호천마을 정류장에서 계단을 내려오면 만날 수 있습니다.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고, 주말과 공휴일은 쉬고 있습니다. 대형 23kg 세탁기 2대와 건조기 2대가 쉴 새 없이 작동 중입니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는 제공되고 무료로 운영되니 편하게 빨랫감만 들고 찾아오시면 됩니다.

산복도로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거나 빨래방이 살짝 궁금하시다면 언제든지 찾아주세요. 직접 찾아오시기 전 네이버나 유튜브, 인스타그램에서 ‘산복빨래방’을 검색하셔도 산복빨래방 소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음 편은 마을 폐가가 산복빨래방이 되기까지 3개월간의 공사 여정. 전국 최초로 언론사가 빨래방 운영을 결정하면서 벌어지는 소소하지만 힘들었던 3개월간의 여정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야경이 아름다운 부산진구 범천동 호천마을에 있는 산복빨래방. 산복빨래방 야경도 마을 야경에 한 몫 하고 있습니다. 야경이 아름다운 부산진구 범천동 호천마을에 있는 산복빨래방. 산복빨래방 야경도 마을 야경에 한 몫 하고 있습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김보경 harufor@busan.com

이재화 jhl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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