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대만 정부 초청으로 전 세계 26개국에서 온 28명의 기자가 타이베이에서 만나 자기소개를 할 때였다.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에서 온 김은영입니다”라고 운을 뗐다. 아시아 기자 대부분은 부산을 알고 있는 듯했지만, 유럽과 중남미에서 온 기자들은 서울이 아닌, 부산이 낯선 눈치였다. 때마침 미국 기자가 “‘Train to Busan(부산행)’의 그 부산이냐?”고 물었고, 내가 “맞다”고 대답하는 순간, “그 부산!”이라며 웅성웅성했다.
‘부산행’은 부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스토리가 대부분을 차지해 부산의 실제 모습이 담길 이유는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 가장 촬영 분량이 많은 KTX 객차 내부를 부산영상위원회(BFC) 내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 세트에서 28일간 찍었고, 로케이션도 21일간 진행했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부산이라는 도시를 알리는 데도 기여했다. “부산 하면 영화, 영화 하면 부산영상위원회”로 자리를 굳히기까지 부산을 알린 로케이션 인기 촬영지를 알아보고, 현안이나 과제는 없는지 살핀다. ‘신문화지리지 시즌1’(2009)과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부산에서는 하루하루가 영화다
‘부산 로케이션 인기 촬영지 100곳’을 분류한 뒤 놀랐던 건 시즌1에 이름을 올렸던 장소 70%가 바뀐 점이다. 아예 사라진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새롭게 부상한 공간으로 인해 기존 촬영지 순위가 뒤로 밀린 것이었다. 그만큼 부산 촬영지가 다양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오랫동안 로케이션 지원 업무를 맡았던 BFC 이승의 경영지원팀장은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에서 영화를 찍었다고 하면 조폭/범죄/누아르 분위기를 주로 떠올렸는데, 지금은 로맨스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장르와 배경을 소화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촬영한 영화·영상 편수는 1999년 BFC 출범 이후 2008년 말까지 10년간 장편 극영화가 228편인데, 코로나19 와중이던 지난 한 해에만 10년 치의 절반이 넘는 142편을 찍었다. BFC 출범 23년(2022년 8월 기준) 성과로 치자면 1695편에 달한다.
구 단위에서도 작지만, 변화가 느껴진다. 자연환경과 도심의 모습을 두루 갖춘 해운대구가 최근 13년간 평균 촬영 일수 138일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기장군(평균 49.5일), 남구(48.3일), 수영구(46.4일), 중구(43.8일), 영도구(42.7일)가 엎치락뒤치락 2위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16개 구·군이 편차는 있어도 골고루 이름을 올렸다.
연간 촬영 일수는 크게 늘었다. 2010년 이후 지금까지 두 해를 제외하면 ‘부산에서는 하루하루가 영화’라고 할 만큼 1년 365일 내내 어디에선가 영화를 찍고 있음이 확인됐다. 2018년엔 연간 902일, 2017년엔 830일, 2014~2016년과 2021년엔 700일 이상 촬영했다,
부산의 촬영 랜드마크는 시즌1과 시즌2 통틀어서 최다 촬영 일수를 기록한 광안대교였다. 광안리·해운대 해수욕장, 자갈치시장, 수영만요트경기장은 변함없는 촬영 명소로 꼽혔다. 마린시티, 영도선착장은 공개 시설로, 옛 충무시설(수영구 광안동 지하벙커), 구 동부산대학교는 비공개 시설로 관심을 끌고 있다.
■부산 영화 영상산업을 이끄는 힘, BFC
부산이 ‘대한민국 넘버원 영화 인프라’를 갖춘 도시로 성장하는 데는 BFC 역할이 컸다. 부산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국내외 영화인이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BFC이다. BFC는 촬영 장소 소개는 물론이고, 제작진이 머물 수 있는 숙소나 식당 정보를 알려주고, 영화의 후반작업까지 아우르는 이른바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09년 이후 버추얼스튜디오 시설, 시네마로보틱스 시스템, LED Wall 같은 첨단 촬영 시설·장비 인프라가 새로 구축됐다.
지난해는 BFC 창립 후 최다 촬영지원 편수를 기록해 ‘촬영하기 좋은 도시 부산’ 명성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헤어질 결심’의 김현호 제작부장이 〈영화부산〉에서 털어놓은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한 지역으로 로케이션이 묶일수록 예산과 촬영 스케줄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팀은 꼼꼼히 살필 수밖에 없는데 부산에 로케이션 후보지가 눈에 띄게 많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로케이션 관련 행정, 허가 문제는 유관기관의 도움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한데 BFC가 제시해 준 체계적인 프로세스 덕분에 복잡한 행정절차를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감사했다.
흔히 말하는 로케이션 촬영 유치의 경제적 효과(연간 약 220억 원, BDI 분석)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시홍보 효과나 부산 관광지 발굴에 기여한 측면을 제외하더라도 엄청나다.
■로케이션에만 매달릴 순 없다
하지만 부산의 성공에 자극받은 다른 지자체들이 경쟁에 뛰어들면서 국내 최고의 영화 촬영도시라는 위상을 유지하는 일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현재 영상위원회는 전국적으로 12곳이 있다. BFC처럼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영상위원회도 3곳(대전·전주·제주)이나 더 있다.
BFC 영상사업팀 양영주 팀장은 "로케이션과 스튜디오의 원활한 연계는 부산의 강점"이라면서도 "요즘은 작품의 사이즈나 규모가 커져서 부산이 가진 250평, 500평 2개 동으로는 규모가 작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배주형 경영전략본부장도 "결국, 영화 영상산업은 규모의 경제이고, 규모 싸움에서 지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면서 "부산이 여전히 내세울 게 로케이션밖에 없다는 건 안타깝다"고 말했다. 장지욱 전략기획팀장은 "도로 세트까지 지은 국내 최대(약 1만1315평), 최다(13개 동) 규모를 자랑하는 'CJ ENM 스튜디오센터'만큼은 아니더라도 부산시에서도 스튜디오 확장에 대한 청사진을 내놔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부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부산촬영소는 착공조차 못 하고 십수 년째 지지부진하다. 이제는 짓더라도 예산 때문에 당초 계획보다 상당 부분 축소된 형태가 될 게 뻔하다. 한국 콘텐츠가 그 어느 때보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지금, 로케이션 유치 못지않게 실내·특화 스튜디오 건립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영화 영상도시 부산의 도약을 기대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특별취재팀=김은영 기획위원 key66@busan.com
사진 및 자료 제공=부산영상위원회
그래픽=비온후 김철진 대표 beonwhobook@naver.com
김은영 논설위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