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분 같은 도시, 문학 속 부산은 ‘또 하나의 등장 인물’ [新 문화지리지 2022 부산 재발견] 6.

입력 : 2022-10-24 18: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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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화지리지 2022 부산 재발견] 6. 문학의 원천, 부산

산·바다·강에 역사까지 두루 갖춘 도시
스쳐 지나간 공간 아닌 삶의 현장이 배경
원도심·낙동강은 한국 문학사 주요 공간
시·소설·동화 곳곳에 지역성 담은 작품

낙동강에 버금갈 정도로 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금정산(위)과 기장군 대변항. 낙동강에 버금갈 정도로 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금정산(위)과 기장군 대변항.

문학작품 속에서 다양한 얼굴로 변주되는 부산. 왜 하필 부산일까. “산과 바다, 강에 역사까지 두루 갖춘 도시는 흔치 않다”는 배길남 소설가의 말처럼, 부산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관통한 역사적 배경을 아우르며 ‘문학적 활용도가 높은 장소’이기 때문이리라. ‘신문화지리지 시즌 1’ 이후 10여 년 간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부산은 잠시 머무르거나 스치듯 지나쳐버리는 공간이 아닌, 일상이 녹아든 삶의 현장이었다.


■여전히 사랑받는 곳 ‘원도심’

식민지 근대 부산의 중심이자 피란수도 부산으로 대변되는 원도심은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받는 장소였다.

전쟁을 관통했던 작가들의 시선은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성 파괴의 현장을 증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전후 새로운 정치 사회구조변동의 현장이었으며, 인간 존재의 고귀함을 발견하는 증언 공간’이라고 조갑상 소설가가 평했듯, 전쟁을 관통했던 작가들의 시선은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성 파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짧은 시간, 많은 작가들이 한정된 장소에 모여 부대끼며 살았던 체험을 토대로 작품을 생산했다는 사실 자체가 특이한 문학사적 현상”이라고 말한 조 소설가는 <이야기를 걷다>를 통해 피란수도 부산을 공간적으로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폭넓게 다룬 작품으로 이호철의 <소시민>을 꼽았다. 작가가 실제로 전쟁 중 피란 와 일한 경험을 토대로 자갈치, 광복동, 부두, 제면소 등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함께 염상섭이 일군 일종의 전쟁 3부작 <취우> <새울림> <지평선>을 두고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으로 꼽았다. 미국 패권주의를 위해 펼쳐지는 부흥과 재건이 시작된 부산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이들 작품에서는 전쟁 당시 활황이었던 남포동 다방 거리가 세세히 묘사되고 있다. 이순욱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 등 연구진은 <피란수도 부산의 문학풍경>을 통해 요산 김정한의 단편 ‘병원에서는’을 발굴했다. 요산이 전쟁 중 <부산일보>를 통해 발표한 유일한 소설인 이 작품에서는 오늘날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선 제5육군병원이 등장한다. 연구진은 단편을 두고 “전시 상황에서 작가의 이념적 선명성을 뚜렷하게 부각시킨 작품”으로 평했다.

요산문학관 요산문학관
동래읍성 동래읍성

후세대 작가들은 피란수도라는 과거를 딛고 현재진행형의 역사와 삶이 있는 부산을 읽어냈다. 조갑상의 장편 <밤의 눈>은 부마민주항쟁의 시작점인 남포동을 불러낸다. 6·25 전쟁부터 5·16, 부마민주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되살리며 민간인학살의 참상은 물론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을 그려낸 수작이다. 정영선의 장편 <실로 만든 달>에서 부산은 한수영 평론가의 언급처럼 ‘또 하나의 등장인물’이다. 85년의 시공이 교차하는 이 작품에서 왜관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조성된 원도심과 전통적인 부산으로 꼽히는 동래읍성이 지닌 역사성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롭다. 박솔뫼의 중편 <인터내셔널의 밤>에서 부산은 전성욱 평론가가 말했듯 “주인공들이 사회적 억압을 뚫고 연대와 결속을 이루는 장소”로 쓰인다. 임회숙의 소설집 <산복도로의 꿈>은 감천문화마을이라는 공간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면서 가난한 이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드라마로 제작돼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재미교포 이민진의 <파친코>에서는 주인공 가족들의 지난한 삶이 녹아든 영도가 등장한다.


■부산 지역성·역사성에 주목

부산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을 소설집으로 엮거나 여러 명의 작가가 협업한 부산 소설집이 잇따라 나온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부산이 관광도시로 변모하면서 부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장소에 대한 문학적 접근 역시 활발하게 요구된 덕분이다.

오선영의 소설집 <호텔 해운대>는 부산 곳곳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되 청년 실업, 지역 소외 등 다양한 주제의식을 녹여냈다. 5명의 작가가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집 <안으며 업힌>은 아예 초량 일대로 지역의 범위를 더욱 좁히고 사운드트랙을 소설집 안에 수록하는 색다른 시도를 펼쳤다.

시도 마찬가지다. 금정산을 노래한 유병근은 물론 산복도로 시집을 통해 애환을 담아낸 강영환 시인이 있으며, 최영철의 <금정산을 보냈다>는 시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원북원부산 도서에 선정됐다. 독자들 역시 지역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기장군을 다룬 문학 작품이 꽤 늘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기장군은 지난 1995년 뒤늦게 부산으로 편입된 탓에 초반엔 작품이 그리 많이 발굴되지 않았지만 최근 10여 년 새 작품이 크게 늘었다. ‘부산 내 실향민’ 이해웅은 고리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고향 기장군 고리에 관한 시를 묶은 시집 <파도 속에 묻힌 고향>을 작고하기 3년 전 내놨다. 김영준의 ‘대변항’, 이기록의 ‘월내’, 박진규의 ‘달음산’ 등에서도 기장 구석구석이 등장한다. 소설 중에는 고리원자력발전소 사고를 정면으로 다룬 박솔뫼의 단편 ‘겨울의 눈빛’이 눈에 띈다. 고리원자력발전소 사고를 정면으로 다룬 가상의 역사소설이 지역 작가가 아닌 외부 작가의 시선으로 쓰였다는 게 주목할 만하다.

이밖에도 황령산(서진의 장편 <하트브레이크 호텔>), 미포(안민의 시 ‘미포’), 유엔기념공원(조향미의 시 ‘유엔공원에서 작은 우물을 생각하다’), 국도예술관(정안나의 시 ‘국도예술관의 올빼미들’) 등 부산 곳곳의 장소가 작품 전면에 등장한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성공한 ‘조선통신사’에 주목해 부산의 옛 공간을 되살린 소설도 나왔다. 시인 강남주의 첫 장편 <유마도>는 동래의 화가 변박을 통해 동래 등 옛 부산을 불러냈으며, 김탁환의 장편 <이토록 고고한 연예>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 주인공이기도 한 실존 인물 달문이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부산포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부산을 담아낸 동화도 제법 늘었다. 한국전쟁 이후 발간된 손동인의 동화집 <꽃수레>, 이주홍의 <못나도 울 엄마>를 비롯해 만화영화로도 제작돼 인기를 모았던 배익천의 <꿀벌의 친구>가 부산을 배경으로 한다. 한 방송사 어린이 드라마로도 제작된 한정기의 <플루토 비밀결사대>는 부산 기장군 대변항을 주 무대로 한다. 안덕자·박미경·양경화·김정애·현정란의 <인물로 만나는 부산정신>은 부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박재혁·박차정·안희제·이종률·최천택 선생을 부산 곳곳에서 살려냈다. 배유안·김나월·이자경·곽수아·박미라가 힘을 합친 시리즈 <오만데 삼총사>는 오륙도, 이기대 등 부산 전역을 배경으로 픽션과 역사를 넘나든다.


■부산의 강·바다는 문학의 원천

조명희의 <낙동강> 이후 한국 문학사의 중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낙동강은 그야말로 문학의 원천이었다. 구모룡 평론가가 총괄을 맡은 연구서 <낙동강 문학지도>는 김정한을 비롯한 이문열, 조세희, 강인수, 최해군, 유치환, 강은교, 허만하, 유병근, 김형술, 서태수 등 많은 문인들이 낙동강에서 작품을 벼리어냈음을 알린다. 비극적인 민족의 역사 공간(김용호의 장시 ‘낙동강’), 재난의 장소이자 미래를 발굴하고 세계를 다르게 시작할 수 있는 장소(김정한의 단편 ‘슬픈 해후’ 등), 소금뱃길로서 지속과 변화의 공간(강인수의 장편 <낙동강>), 난개발로 신음하는 강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박정애의 시집 <엄마야, 어무이요, 오, 낙동강아!>) 모두 낙동강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산항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논문을 통해 “해항도시라는 부산의 정체성은 부산항이라는 역사적인 ‘장소’를 통해서 구축됐다”고 한 전성욱 평론가는 윤정규와 윤진상의 소설을 두고 “부산항을 배경으로 밀수와 밀항, 그리고 항구와 관련한 노동과 인근 매축지 빈민들의 삶을 다룬 두 작가의 작품들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개발 근대화의 이면과 그 진상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고 밝혔다.

이에 해양문학은 부산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금성, 김성식, 김종찬, 장세진, 문성수, 옥태권, 이윤길에 이르기까지 해양문학의 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해양문학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때 부산을 이뤘던 장소들, 이를테면 밀다원 다방으로 대변되는 남포동 다방 거리(김동리의 단편 ‘밀다원 시대’), 100년 역사의 남선창고(조갑상의 장편 <누군들 잊히지 못하는 곳이 없으랴>), 1970년대 초 논밭 일색이던 구포 일대(김현의 장편 <봄날의 화원>), 돌산마을(나여경의 단편 ‘어둠의 방’) 등은 개발에 밀려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문학 속에 남은 지역성과 역사성은 여전히 생동감 넘친다.

이처럼 부산이 문학의 배경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것을 두고 구모룡 평론가는 “탈근대로 넘어오면서 장소를 찾아 쓰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로컬이 더욱 중요해졌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부산의 구체성을 살린다면 세계에서 주목받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지역을 주목하는 것 자체는 고무적이지만 문학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주문도 이어졌다. 강희철 평론가는 “지역성을 찾기 위해 많은 작가들의 글이 동원되지만, 문학이 그저 소비되는 데 그친다. 지역과 문학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사진=윤민호 yunmino@naver.com

그래픽=비온후 김철진 대표 beonwhobook@naver.com

도움말·자료제공=조갑상·문성수·이정임·배길남 소설가, 김수우 시인, 구모룡·박대현·전성욱·강희철 평론가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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