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이 지났습니다. 설날이 지나면 곧 정월대보름이 다가옵니다. 한 해의 첫 보름이자 보름달이 뜨는 날로, 설날(음력 1월 1일)에 이어 음력 1월 15일에 지내는 우리의 또 다른 명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보름 간을 축제처럼 즐겼다고 합니다. 올해 정월대보름은 다음 달 5일입니다.
정월대보름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성탄절, 핼러윈, 밸런타인 데이…. 서양에서, 또는 상업적인 목적에서 유래된 축제나 기념일을 챙기는 요즘 젊은 세대들을 향해 뭇 어른들은 마뜩잖은 듯 혀를 찹니다. 외래 풍속에 더 익숙한 젊은 세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겠지만, 전통 명절과 풍속을 자연스레 잊힐 수밖에 없는 현실도 마냥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전통 명절과 풍속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올해는 정월대보름 행사가 4년 만에 대면 행사로 돌아옵니다. 정월대보름을 제대로 알고 즐길 수 있도록 정월대보름에 대해 파헤쳐 봅니다.
■정월대보름에 대해 ‘잘’ 몰랐던 것들
정월대보름은 커다랗게 뜬 보름달을 보며 한 해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날입니다. 우리 민족 5대 명절에 속하죠. 5대 명절은 설날과 추석, 단오, 한식, 그리고 정월대보름입니다. 이 중 정월대보름과 단오, 한식은 공휴일이 아닌 데다, 경제 성장과 해외 문화 유입, 세시 풍속 간소화 등으로 명절로서 존재감이 희미해졌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15일 동안을 축제 기간처럼 즐겼으며, 설날보다 정월대보름을 더욱 성대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정월대보름이 지나야 한 해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는 세초 액운을 쫓고 복을 구하는 시기였습니다.
대보름 다음 날인 음력 1월 16일은 ‘귀신날’이라 불렀습니다. 이날 집 밖에 나가면 귀신들이 들러붙기 때문에 외출을 피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대보름까지 축제를 즐긴 뒤 농업 등 생업에 복귀하기 위한 준비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대보름날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하루 종일 또는 저녁 한 끼 밥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보름에 밥을 주면 개가 몸에 파리가 꼬이고 쇠약해진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개 보름 쇠듯 한다’는 속담이 생겨났습니다. 풍성하고 흥겨운 명절을 못 먹고 쓸쓸히 보낼 때 씁니다.
북한에서는 대보름날이 공휴일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명절로 여기며 음식, 놀이 등 세시 풍속이 많이 남아 전승되고 있습니다. 우리와 달리 명태로 만든 음식을 꼭 챙겨 먹는 풍습도 있습니다. 척추가 늘어나 허리가 펴지고 눈이 밝아진다는 속설 때문이라고 하네요.
민속학자 최상수의 저서 <한국의 세시 풍속>(1960년)에 따르면 한 해 동안 행하는 세시 풍속 189건 중 음력 1월(정월)에 행하는 풍속은 78건에 이르며, 대보름 하루와 관련된 세시 풍속은 40여 건에 달할 정도로 정월대보름은 의미 있는 명절이었습니다.
■정월대보름에 즐기는 민속 놀이와 음식
정월대보름엔 다양한 풍속과 민속놀이를 즐겼습니다. 대보름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믿어 잠을 참으며 날을 샜습니다. 논밭에서 빈 깡통에 구멍을 뚫어 철삿줄을 매달고 깡통 안에 짚을 넣어 불을 피운 후 둥근 원을 그리듯 빙빙 돌리는 쥐불놀이도 했습니다. 잡귀를 쫓는다는 믿음과, 해충의 알과 잡초를 태우며 타고 난 재가 거름이 돼 농사에 유익하다는 생활의 지혜에 따른 것입니다. 쥐불이 크면 클수록 좋다고 여겼습니다.
나뭇가지나 장작을 쌓아 올린 달집을 태우는 달집태우기(사르기)도 했습니다. 달집을 태우며 나쁜 기운을 정화하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연날리기도 대표적인 대보름 풍속입니다. 연을 날리다가 끊어 멀리 보내 나쁜 기운을 날려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을 단위로 지신밟기도 했습니다. 풍물패가 각 가정을 돌아다니며 집터를 밟으며 지신(地神)에게 농악 소리와 함께 음식을 바치는 풍속으로, 지신을 위로하거나 지신의 심술을 달래 가정에 평안을 바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달맞이는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요즘도 대보름날이면 “보름달 보고 소원 빌어라”는 말을 많이 하죠.
대보름날에는 더위팔기도 했습니다. 한여름 더위를 먹지 않고 건강하라는 의미에서 행하던 풍속입니다. 친구나 이웃 사이에서 주로 했으며 아침에 만난 사람의 이름을 불러 “내 더위” 또는 “내 더위 사가라”는 말로 더위를 팔았습니다. 대답한 사람에게 그해 여름의 더위를 팔면 자신은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다 뜬 후 더위팔기는 효험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다리밟기도 했습니다. 새해 첫 보름달이 뜨는 대보름날 직접 다리를 건너는 풍속으로, 건너는 다리를 신체의 일부인 다리로 밟으면 다릿병이 낫고 튼튼해진다고 여겼습니다. 마을끼리 돌을 던지며 싸우는 석전도 성행했습니다. 치열하고 위험했기 때문에 대보름 풍속 중 가장 빨리 사라졌습니다.
줄다리기도 대보름날 행하던 대표적인 풍속이었습니다. 줄다리기는 다른 명절에도 했지만, 첫 보름달이 뜨는 밤에 하는 것을 원칙으로 여겼습니다.
대보름에는 겨울철에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모두 동원해 ‘잘 먹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명절 중 대보름에 먹는 음식이 특히 많았습니다. 오곡밥을 먹었고, 약밥도 먹었습니다. 풍년을 기원하고 농사철에 대비해 영양을 보충하자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대보름 아침엔 부럼깨기를 하고 함께 귀밝이술 마셨습니다. 부럼깨기는 호두, 밤, 잣 등 딱딱한 견과류를 어금니로 나이 수만큼 깨물어 먹는 것으로, 부럼깨기를 하면 얼굴이나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대보름날 견과류를 챙겨 먹는 풍습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다만, 껍질이 남아 있지 않는 견과류가 많이 팔리고 있어 딱딱한 껍질을 깨무는 데 의미를 뒀던 과거와 사뭇 달라진 풍경입니다. 데우지 않은 찬술을 마시는 귀밝이술은 귀가 밝아지고, 한 해 동안 귓병이 생기지 않으며 좋은 소식만 듣는다고 해서 즐겼습니다.
버섯, 순무, 오이, 가지 등으로 묵나물을 만들어 먹고, 동짓날 먹는 팥죽을 대보름날에도 먹었습니다. 이를 통해 여름에 더위와 악귀를 쫓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4년 만에 대면 행사로 돌아온 정월대보름
올해 정월대보름은 대보름 행사가 2020년 초 코로나19 확산 이후 4년 만에 대면 행사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남다릅니다. 우선 대보름인 다음 달 5일 해운대해수욕장와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제38회 해운대달맞이온천축제’와 ‘제24회수영전통달집놀이’가 열립니다. 모두 예년 수준(높이 25m)으로 초대형 달집을 태울 예정입니다. 해운대해수욕장 달집 앞에는 다음 달 3일부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새해 소원문 쓰기 등 행사도 준비돼 있습니다.
서구 송도해수욕장에서는 달집축제가, 사상구 삼락생태공원에서는 달집놀이가 열립니다. 사하구와 기장군에서는 동(면) 단위 또는 지역 단체와 함께 달집 태우기와 다채로운 주민 참여 행사가 마련됩니다.
남구는 용호별빛공원에서 대보름 행사를 개최합니다. 달집 태우기를 대신해 대형 LED 달집(지름 6m·높이 11.5m)을 점등합니다. 새해 복을 담은 대형 복주머니, 계묘년을 상징하는 대형 토끼도 전시합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 출연한 권원태 명인의 줄타기 공연도 준비돼 있습니다.
4년 만의 대보름 행사가 무척 반갑지만, 화재와 안전 사고는 주의해야 합니다. 2019년 2월 19일 정월대보름날 부산 해운대구 송정해수욕장에서는 달집 태우기 점화식에 참여한 참석자 3명이 폭발로 다쳤습니다. 2009년 2월 9일 정월대보름에는 경남 창녕군 화왕산 정상에서 억새 태우기 행사 중 역풍으로 인파 쪽으로 불이 번져 7명이 숨지고 81명이 다쳤습니다. 이후 화왕산 억새 태우기는 폐지됐습니다.
이번 정월대보름에는 온 가족이 모여 휘영청 떠오른 달에 소원을 빌고, 훨훨 타오르는 달집을 보며 액운을 날려 보내면 어떨까요? 건강과 안녕, 행복이 깃드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