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소는 일본군 군사시설” 가해 시스템을 증명하다

입력 : 2023-02-02 15:03:37 수정 : 2023-02-02 1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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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하종문

일본군 조직 체계·작전과 깊이 결부
현지 부대장이 위안소 개설 권한 행사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휴머니스트 제공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휴머니스트 제공

하종문 한신대 교수의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는 진중일지라는 공식 기록물로 ‘위안소’를 일본군의 군사시설로 증명한 최초의 저작이다. 일본군의 가해 시스템을 증명한 문제작이다. 2007년 당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자 “위안부 강제 연행은 없었다”고 했다. 이 책은 그에 맞서 위안소를 일본군 조직 체계와 작전에 깊숙이 결부된 군사시설로 정의한다.

먼저 전 단계다. 1931년 만주사변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본군은 병사의 성욕 처리 방안을 놓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개선책을 강구했다고 한다. 그런 이후 1937년 중일전쟁 때부터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콘돔 조달과 위안부 징집을 위해 움직였다고 한다. 1937년 일본군 장교의 일기에 따르면 군이 중국인 여성을 모집해 후저우에 ‘오락기관’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일본군 상하이파견군 문서에 따르면 한 장군이 육군성에 요청한 대로 100만 개의 콘돔을 상하이파견군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때 위안부 모집에 일본군과 일본 정부기관이 동원된다. 1937년 12월 중순 일본 본토와 조선에서 3000명의 위안부 모집이 시작됐다. 모집한 위안부를 중국으로 이송하는 데는 ‘군용선’이 투입되었다. 이렇게 일본은 군과 정부 차원에서 계통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체계적으로 운용했다는 ‘공식 기록’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1938년 중일전쟁 때 진중일지에서는 ‘특종위안소가(假)규정’과 ‘특수위안소 취체규정’이 확인된다. 특히 ‘취체규정’은 위안소의 새로운 출현을 웅변한다는 것이다. 취체규정에 따르면 해당 군부대 사령관과 전임장교가 위안소 개설과 존폐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지녔는데 즉, 위안소 개설 권한은 현지 영사관이 아니라 현지 부대장이 행사했다는 것이다. 군사시설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번 책은 15년간 틈틈이 진중일지를 읽고 분류 검토 분석한 작업의 결실이라고 한다. 일본 육군은 물론 외무성과 내무성까지 위안소 설치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1941~1945년 아시아·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위안소는 곳곳으로 확산한다. 책은 진중일지를 토대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도네시아 말랑과 암본의 위안소도 찾아냈다. 6장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 지역별 위안소 체계’에서는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 주둔한 부대와 위안소의 흔적을 좇고 있다. 7장 ‘오키나와 결전과 위안소’에서는 오키나와 전투를 볼 때 위안소 제도는 완성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군 상륙을 앞두고 민간인을 퇴거시키면서도 위안부는 ‘군 요원’이라며 잔류시켰다는 것이다. 군의 부속시설로 여겼던 위안소를 실질적인 군사시설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외교 관료와 일부 언론은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일관계의 갈등과 대립은 한국 측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며 “한국의 지식인들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이 역사 인식의 빈곤과 왜곡”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이 광복 46년 만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했다. 저자는 “김학순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선각자였으나 그 이후 30년 넘게 여전히 험로를 걷고 있다”며 “이 책이 그 험로를 헤쳐나가는 작은 길라잡이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하종문 지음/휴머니스트/728쪽/3만 5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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