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 실사단이 다녀간 열기가 뜨겁다. ‘부산이라 좋다(Busan Is Good)’는 문구가 새겨진 가로등 현수막이 거리에 펄럭이고, 시내를 오가는 차량에도 엑스포 유치를 염원하는 작은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에 활기가 느껴진다. 실사단이 가장 인상 깊었던 점으로 시민들의 유치 열기를 꼽았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부산과 부산 시민의 삶은 훨씬 다양하고 다채롭기에, 모든 이슈가 엑스포로만 쏠리는 것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을 때도 있지만, 부산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들뜬 마음이 더 커진다.
실사단의 눈에 비친 부산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바깥에서 보는 시선은 부산을 새롭게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하기에, 때로는 외부인이 되어 바깥의 시선으로 부산을 바라보고 싶다. 익숙한 곳을 낯설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타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 그렇다. 먼 곳에서 부산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왔을 다른 이들과 섞여서 부산역 바깥을 나설 때, 동구의 주민인 나에게는 익숙한 공기지만 동시에 잠시라도 고향이자 살아가는 터전인 부산을 낯설게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부산역을 나서서 바라보는 풍경이 부산의 첫인상이라면, 실망감을 감추기가 어렵다.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성인용품점, 비뇨기과, 조금 더 뒤로 우후죽순 보이는 모텔촌, 거기에 텍사스 거리(Texas Street)라는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까지. 부산이 가진 개성 있고 역동적인 도시 문화도 느끼기 어렵지만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거리의 이름은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비극적인 현대사를 관통하는 부산의 원도심, 그 중에서도 초량 이곳의 지나온 역사를 생각할 때, 현재 모습은 말 그대로 ‘웃픈’ 현실로 다가온다.
최근 역사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에서 초량 왜관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구한말, 왜인들만 거주 가능했던 초량 왜관에 조선인 여성들이 숨어 있다는 고발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왜인 관리와 공모한 조선인 관리가 자신의 가족을 팔아넘겨 성매매를 시킨, 최악의 성 착취 범죄가 일어났던 것이다. 개항기, 부산의 원도심 일대에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유곽이 형성되었다. 전쟁 고아가 된 여성들이 한국에 팔려 오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조선 여성들의 인신매매 장소가 되었다.
그뿐인가. 한국전쟁 당시 부산항으로 미 군함이 들어오면서 인근의 중앙동 지역에 미군 전용 클럽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텍사스 거리라는 이름도 이때 생겨났다. 한때는 대낮에도 총성이 오갈 정도의 무법지대였다고 한다. 큰 화재로 지금의 부산역 맞은편 지역으로 옮겨 오게 되었는데 전쟁이 끝나도 외국인 전용 클럽이라는 형태로 성 착취 산업은 계속되었다. 얼마 전 국가가 미군 기지촌을 관리하면서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정당화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대상으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한 것이다. 이는 비단 경기도 일대의 미군 기지촌에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이곳 초량에도 무수히 많은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었으며, 성 착취 산업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동구청의 홈페이지에서 이곳 텍사스 거리에 대한 설명을 보면 하야리아 부대가 옮겨 가면서 부산을 입항한 러시아 선원들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고 되어 있다.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은 이후 러시아 선원들이 대거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텍사스 거리의 미군 전용 클럽은 외국인 전용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유흥업소로 운영되었다. 예술흥행비자를 통해 러시아 무용수들과 필리핀 가수들이 이곳 외국인 전용 클럽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가혹한 착취와 성매매 강요였다. 급기야 2003년에는 러시아 무용수들에 대한 예술흥행비자 발급이 중단되기도 했다. 2010년대에도 수십 명의 필리핀 여성들이 이곳 초량 텍사스 지역과 거제도 등의 지역에서 성 착취 피해를 입어 국제범죄수사대에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 적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텍사스 거리 입구에는 청소년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간판을 볼 수 있었다.
100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반복되어 온 이곳의 아픈 역사는 지자체의 홈페이지에서나 원도심 일대의 도시재생사업이나 지역 활성화 사업 속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텍사스 거리라는 화려한 네온사인의 간판 아래에서 현재진행형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곳 초량, 그리고 부산의 원도심은 부산의 오래된 미래이자 첫 관문이다. 엑스포와 같은 국제행사에 있어서도 주요한 역할을 해 나갈 곳이다.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보여 주는, 그런 부산의 첫인상을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