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명을 연 18세기 계몽주의 지식인들만 해도 자연과 동물을 ‘영혼 없는 자동 장치’라 여겼다.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개를 마구 때렸으며 고통을 느끼는 듯 몸부림치는 생명에 동정심을 느끼는 이들을 비웃었다. 매 맞을 때 내는 비명 소리는 마치 시계 속에 있는 작은 스프링의 소음일 뿐, 몸 전체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여성과 흑인은 도덕적인 공동체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흑인 노예를 회초리로 때려 고통을 주어도 불법이 아니었다.
1920년대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타자와 맺는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의 본질적 차이에 관한 개념을 발표한다. ‘나와 그것’ 관계는 ‘나와 너’와 달리, 상대를 물건으로 여기는 관계이다. 상대를 비인격적으로 바라보고 대할수록 우리는 소비를 착취하는 대상들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 황폐해진 생태계 그리고 후손에 끼치는 고통과 단절하는 데도 익숙해진다. 이 ‘나와 그것’ 관계의 무의식적 심층부에 음식의 선택이 자리한다.
오늘날 밥상에 오르기 위해 연간 750억 마리의 동물이 무자비하게 도살당한다. 어류의 50%와 세계 농지의 80%, 물 소비의 70%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낭비되고 세계 식량의 40%가 가축 사료로 투입되면서 연간 10억 명은 배고파 죽어가는 반면, 20억 명은 배불러 만성질환으로 죽어간다. 그리고 치료용 신약 개발을 위해 연간 수억 마리의 동물들이 실험 대상으로 희생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제 구조의 왜곡과 인수공통전염병의 반복은 물론 식량 위기와 자원 고갈, 기후 변화와 생물종 멸종 등 치명적 생태계 파괴를 수반한다. 이는 우리의 음식 선택으로 인해 미래의 아이들과 생명체들에게 가해지는 무의식적 폭력과 고통이기도 하다.
폭력, 아동 학대, 자살, 약물 중독, 비만, 스트레스 등등 현대사회의 심각한 문제들도 성찰해 보면 이 죽음과 고통의 쳇바퀴 속에서 우리가 동물과 가금류들에 가한 행위들이다. 인공 수정을 통해 갓 태어난 새끼들을 떼어놓고 오로지 이익을 좇아 고기를 빨리 살찌우고 강제 임신시키는 데 온갖 약물을 투여하는 등 공장식 사육 환경과 도살 과정은 ‘현대판 홀로코스트’와 다름없다. 인류가 가축을 소비하고 처분하는 이러한 방식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이며 이 시대에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시급한 윤리적 문제이다.
모든 존재는 폭력 앞에 몸을 떤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사랑한다. 우리가 다른 존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본다면 어떻게 해를 가할 수 있을까. 옛사람들은 오합혜, 즉 다섯 개의 씨줄로 듬성듬성 엉성하게 엮은 짚신을 신고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곤 했다. 벌레가 알을 까고 나오는 봄철에 벌레들이 깔려 죽지 않고 하늘의 새가 한 알, 땅의 벌레가 한 알, 사람이 한 알을 먹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러한 배려는 다른 생명 속에서 자신을 보고 우리가 계속해서 생명의 그물을 찢어 놓는다면 그 덫은 곧 우리의 존재 자체에 구멍을 뚫어놓을 것이라는 세계의 상호 연결성에 대한 본능적인 자각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기후 위기에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 깜깜한 현실에서 보듯 파국으로 치닫는 지속 가능성 위기도 결국 인간의 위기이며, 스스로 그러한 자연과 생명이 우리에게 주는 준엄한 경고인 셈이다. 비거니즘(Veganism)은 육류·어류·달걀·유제품 등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를 넘어 삶의 전반에서 동물에 대한 착취를 거부하는 철학이자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이 비건적 삶은 우리 문화와 사회에 드리워진 거대한 고통과 죽음의 쳇바퀴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또 생명과 평화, 그리고 지속 가능성을 여는 선순환이자 ‘나와 너’ 관계로 전환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