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어지는 7월에는 어김없이 장마가 온다.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과 오락가락하는 장맛비는 여정을 망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여행의 운치를 더해준다. 흐리거나 비가 추적추적 내려 더 근사한 여행도 있는 법이다. 으레 떠올리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과학관 등 ‘실내형 여행’ 외에도 찬찬히 둘러보면 장마철에 떠날 수 있는 여행지가 제법 있다. 부담 없는 거리와 여정으로 기분 전환과 일상 충전이 가능한 그런 곳들이다. 장마철 여행지로는 뭐니 뭐니 해도 호수나 저수지가 제격이다. 잠잠하고 고요해서 좋고, 비라도 내리면 물가 숲속에서 타닥대는 빗소리가 좋다. 맑은 날에 볼 수 없는 새로운 경치와 시선을 발견하고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장마철에 어울리는 여행지 두 곳, 울산 북구 송정박상진호수공원과 경남 양산시 임경대를 다녀왔다.
■흐린 날의 수채화 ‘송정박상진호수공원’
흐린 날이나 비가 올 때 더 걷기 좋은 길. 송정박상진호수공원이 딱 그랬다. 송정박상진호수공원은 송정저수지 둘레를 잇는 산책로에 정원과 쉼터 등이 곁들어 있는 친환경 수변공원이다. 공원 이름 치고는 좀 이색적이고 낯선데, 울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의 이름을 땄다.
주차장으로 쓰이는 큰 공터에 주차하고 저수지 앞 둔덕 오르막길로 좀 걸으면, ‘송정박상진호수공원’이라고 적힌 표지석과 공원 산책로, 주요 시설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나온다. 공원 산책로는 저수지 둘레를 일주한다. 반시계 방향으로 걷든, 시계 뱡항으로 걷든 상관없다. 시시각각 직면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필요 없고, 시작이 끝이 되는 일주 산책로가 가진 장점이다.
길을 따라 도열해 있는 바람개비에 홀려 왼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알록달록 바람개비들이 동심을 자극한다. 바람개비는 울산 북구청과 송정동 주민들이 지난해 11월 설치했다. 자갈길을 걷다 주차장 쪽으로 내려다보면 터널에서 뻗어 나온 기찻길(동해선)이 도심 속 이색적인 풍경을 선물한다. 자갈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길이 없다. 자갈길이 끝나기 전 내리막 나무 덱길로 내려가면 일주 산책로로 본격적으로 접어든다.
일주 산책로는 순수한 산책로 길이만 왕복 6km다. 저수지 안쪽 끝에 있는 정원과 쉼터 등을 둘러 보는 코스까지 포함하면 왕복 7km가 넘는다. 그리 가볍지도, 부담스럽지도 않다. 산책로는 걷기 편한 보행 덱이 대부분이지만, 흙길로 된 구간도 있다. 어떻든 평지라는 점에서 걷기 편하다. 산책로 중간중간에 벤치나 정자가 있어 쉬었다 걸어도 된다.
바다의 윤슬에 익숙했는데, 호수와 저수지에 반짝이는 윤슬은 색다른 매력이다.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 미명 속 초록빛 수면에 윤슬이 반짝이고, 저수지를 둘러싼 산봉우리가 거울처럼 비친다. 보슬보슬 실비가 수면에 이따금 떨어지며 운치를 더한다. 송정박상진호수공원엔 비가 오는 날 장화 신고 비옷 입고 우산 쓰고 찾는 이들이 많다. 우중 산책의 은근하고 아늑한 정취로부터의 이끌림이다.
■산책로 걸으며 야생 동물 생태 탐방
저수지에 한가로이 노니는 오리 떼를 만난다. 대여섯 마리가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이 앙증맞다. 수면에 갈색빛을 띤 둥근 나무토막 같은 것이 떠 있는데, 거북이다. 저수지에서 거북이라니…. 예상치 못한 친구를 만나 더욱 반갑다. 사람들이 자신을 응시 중인 걸 아는지, 웅성웅성 소리 때문인지 이내 물속 깊이 잠수한다.
공원에서는 오랜 시간 도시에서 생활해 온 어른들이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이 평소 볼 수 없었던 생물들을 만날 수 있다. 물 위에는 소금쟁이들이 뛰어놀고, 덱길 난간에는 새끼 사마귀가 출현해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듯 관찰한다. 저수지 물은 꽤 맑다. 가장자리 수심이 깊지 않은 곳에는 물속이 훤히 보인다. 수질이 좋아서 그런지 크고 작은 물고기를 보는 건 쉬운 일이다. 송정박상진호수공원에서는 다람쥐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날 공원을 일주하면서 본 다람쥐만 해도 8마리나 된다. 산책을 하며 야생 동물 생태 탐방도 하니 일석이조다. 무룡산과 동대산, 동화산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는 자연 환경 덕분이다. 몇 년 전에는 울산의 한 고등학교 학생 2명이 공원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을 소개하는 생태 지도를 만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주 산책로의 반환점에 닿으면 곧장 돌아 나와도 되지만, 조금 더 걸어 들어가도 된다. 안쪽으로는 야외 공연장, 수변 쉼터, 무릉정, 피크닉장 등 친환경적인 휴식·나들이 공간이 펼쳐진다. 흔히 볼 수 있는 공원의 풍경이다. 반환점을 돌아 나오면 흙길이 이어진다. 맨발로 걷기 좋아 맨발로 걷는 이들이 종종 보인다.
산책로 일주가 끝날 즈음 박상진 의사의 숭고한 애국 애족 정신을 기리는 추모 공간이 이어진다. 박상진 의사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광복회를 조직, 총사령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울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실시한 판사 시험에 합격해 평양재판소 판사로 발령이 났지만, 일제가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재판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판사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판사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어머니가 위독하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오는 길에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산책로 추모 공간에는 박상진 의사 동상과 그의 독립 활동을 그림으로 표현한 벽화, ‘전별시’와 ‘옥중 절명시’ 시비 등이 있다.
■부산에 ’해운대’ 있다면 양산엔 ‘임경대’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가벼운 마음과 차림으로 교외로 드라이브를 하는 것도 좋다. 목적지는 멀지 않아야 좋고, 차에서 내려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면 더욱 좋다. 이런 조건에 딱 맞는 나들이 코스가 경남 양산시 임경대다.
임경대는 양산시 물금읍과 원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오봉산의 마루턱에 있다. 양산시 물금에서 원동 매화마을 쪽으로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왼편에 있다. 통일신라 시대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은 전국을 유람하면서 여러 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부산 해운대, 경남 거창군 수승대와 같은 곳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했다. 임경대도 그런 곳이다. 최치원이 임경대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한 이후 이황을 비롯한 당대의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임경대에 다녀갔다. 임경대는 양산을 대표하는 경승지인 양산팔경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임경대 주차장에서 정자까지는 2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짧은 거리라 부담이 없고, 나무 덱길 등 보행로가 잘 정비돼 있어 걷기 좋다. 계단 등 턱이 없는 슬로프길에서는 보행 약자를 위한 배려가 느껴진다. 길 옆으로는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비가 내린 소나무에 맺힌 빗방울들은 상쾌하고 영롱하다. 소나무 숲이 끝나고 마루턱에 다다르면 임경대가 눈에 들어온다. 낙동강을 굽어보며 기품 있고 늠름하게 서 있다. 정자 위에 오르면 S자로 휘어지는 낙동강 줄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고 자주 회자되는 임경대가 자랑하는 임경대만의 경치다. 직접 보니 실감이 간다. 최치원은 낙동강에 비친 산등성이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듯 아름다워 ‘천하제일의 거울을 대함과 같다’ 해 ‘임경대(臨鏡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며칠째 내린 비에 강물이 노랗게 변하고 흐린 날씨에 임경대 본연의 아름다움은 볼 수 없지만, 낙동강과 강변의 산과 들이 어울린 산천이 수려함을 뽐낸다. 정자에서 내려와 정자 앞 전망대에 서면 또 다른 각도에서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임경대는 차태현, 전지현 주연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를 봤던 이들의 추억도 소환한다. 전지현은 임경대에서 명대사 “견우야! 미안해”를 외쳤다.
여유가 있다면 임경대에서 용화사까지 이르는 산책로(850m)로 좀 더 걸어도 좋다. 새소리와 계곡의 물소리가 유난히 좋다. 경사가 높은 덱 계단이 있고 산길이 대부분이어서 보행 약자가 있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